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그러나 힘이 담겨 있었다. 국군포로 송환, 탈북청소년 문제, 6·25추념공원 건립 등에 대한 그의 생각과 신념은 누구보다 확고했다. 특히 국군포로 송환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도 최근 사단법인에 국군포로 송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됐다.
“북한내 우리 국군포로에 대한 실태는 알려진 게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정부가 지금까지 국군포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죠. 사실 살아서 돌아오시는 국군포로마저도 숨기기에 급급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국군포로에 대한 실태 파악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북한에서 돌아오신 지금 살아계시는 분들께 (북한에 계실 때) 누가 같이 계셨는지만 제대로 물어보면 될 문제에요.”
탈북자, 국군포로, 납북자, 사할린 한인, 731부대 희생자 등을 ‘역사의 조난자’로 일컬으며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가 있다.
양구출신 박선영(57) 사단법인 물망초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자 6·25 추념공원 건립 추진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를 지난 10일 오후 동국대 법학대학 연구실에서 만나 일련의 활동들에 대한 생각과 신념을 들어봤다.
박 이사장은 18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 때보다 요즘이 더 바쁜 것 같았다. 근황을 물었다.
“대학 교수다 보니 일단 학기중에는 학교일로 굉장히 바빠요. 그간 언론에 알려지는 건,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알려지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관심을 갖고 해 오던 일을 계속하고 있죠. 탈북자 돕는 일, 국군포로 돕는 일과 같은 게 그런 거예요.”
그는 사단법인 물망초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물망초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물망초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어요. 물망초 학교는 탈북고아, 탈북아동,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친환경형 대안학교이며, 물망초 열린학교는 남녀노소,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탈북자들을 찾아가는 1대 1 맞춤교육을 하는 곳이에요. 탈북민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치과봉사인 물망초 치과도 서울대 치과대학이 함께 운영중이죠.
물망초인권연구소는 역사의 조난자들에 대한 연구, 교육, 출판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어요. 여기에 국군포로신고센터는 북한에 생존 또는 사망하신 국군포로들의 신원과 생사확인을 위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물망초 꽃망울사업은 탈북대학생들을 위해 해외유학프로그램을 운영중이에요. 나아가 생환 국군포로 어르신들을 위한 물망초의 집이 건립될 예정이에요.”
우리 정부는 한국전 당시 전사한 중국군의 유해 송환을 중국 정부에 약속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는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 유해 송환에는 소극적이다. 물망초와 같이 민간에서 오히려 나서고 있는 실태에 대해 물었다.
“죽어서라도 한국에 오고 싶어 한 분들이 최근 고국으로 돌아오신 고 손동식씨 말고도 너무 많죠. 동물도 죽을 때는 고향을 바라보고 죽는다고 하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고등학교 때 책가방 집어 던지고 군대에 갔어요.
징집영장 받고 가기도 하고 자원입대 하기도 했죠. 나라를 구하겠다고 전장에 뛰어들었는데 포로가 됐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분들을 구출해 주지 않았어요. 유해라도 당연히 모시고 와야 하는 거예요. 유해도 국군포로에 준해서 모시고 와야 하는 거죠.
미군이 유해발굴을 하는 이유는 유해라도 그분들의 가족에게 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그게 국가예요. 대한민국은 이제까지 국가이기를 포기한 나라와 다름없는 거죠.”
박 이사장은 탈북청소년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최근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진 강연에서도 탈북자 문제를 거론했다. 탈북 청소년을 위한 최근 활동과 생각에 대해 물었다.
“탈북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할 때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있어요. ‘탈북자 지원이야 말로 북한 주민을 돕는 길’이라는 것이죠. 탈북 청소년들을 통일시대의 리더로 키워야 한다고 봐요. 알겔라 메르켈은 동독 사람이에요.
그런데 독일의 수상을 3번째 하고 있어요. 같은 맥락이에요. 탈북청소년을 안 키우면 통일을 해도 참다운 통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이는 중요한 문제예요. 북한의 공교육은 다 무너졌어요.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몰라요. 탈북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청소년이에요.
그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여기는 우리들이 설 땅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대한민국과 북한간 학력차가 심하기 때문이죠. 탈북 청소년들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어요.”
박 이사장은 6·25전쟁 추모공원 설립 계획도 발표했다. 추진 배경과 의미가 궁금했다.
“6·25 전쟁에 대한 왜곡을 막고 그 의미를 재조명 하기 위한 것이에요. 6·25 전쟁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주도한 공산권의 침략을 대한민국과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자유를 지켜낸 승리한 전쟁임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죠. 6·25전쟁은 전 세계가 하나가 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 낸 자랑스러운 전쟁이에요.
전쟁사적으로만이 아니라 국제법적으로도 많은 선례를 남긴 기념비적인 전쟁이죠. 그리고 6·25를 극복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던 것이에요. 이제부터라도 후손들에게 6·25를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
이른 시일내에 6·25 추념공원을 비무장지대 인근에 만들고 나면, 최근 들어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DMZ 평화공원도 통일과 함께 성공적으로 조성되리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추진하고자 하는 6·25추념공원은 DMZ 평화공원의 시금석이 될 거예요.”
박 이사장은 한국전쟁, 국군포로, 탈북자 등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일하는데는 소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잊지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물망초는 아주 작은 꽃이에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아주 소박한 의무이기도 해요.
지난 백여년동안 대한민국은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그 시간동안 우리는 앞만 보며 너무 바삐 달려오느라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분들,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지 못했던 분들, 그래서 하루 빨리 도움의 손길을 보내 드렸어야 할 분들을 망각속에 잊어버렸어요.
물망초는 작지만 행동하는 양심을 가진 분들이 모여 ‘역사의 조난자’들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리는 일을 하고자 뜻을 모은 곳이에요. 그동안 국가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보살피지 못했던 역사의 조난자들을 물망초인과 함께 기억하며 구조하고 싶어요. 가장 쉬운 일,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는 조난자들부터 구하고자 해요.
우리 곁에 미리 온 통일세대인 탈북아동과 탈북청소년들을 돌보고, 여든이 넘으신 노구를 이끌고 스스로 생환해 오신 국군포로 할아버지들을 모시고자 해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 ‘영혼의 꽃길’을 내고 싶어요.”
박 이사장의 고향은 양구다. 태어나서 1년을 살았고, 이후 대전, 대구, 포천을 거쳐 춘천에서 봉의초교,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다녔다. 그런 그에게 일련의 활동과 고향과의 상관관계를 물었다. 관계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물었던 게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였다.
“고향인 양구와 학교를 다닌 제2의 고향 춘천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의 활동과 고향은 아무 상관 없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인 것뿐이에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탈북자나 국군포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내 고향이 강원도이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에요. 6·25추념공원 건립도 마찬가지예요.
6·25동안의 가장 격전지였고 DMZ에서 가까운 곳이자 외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펀치볼이에요.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죠. 춘천은 대한민국 국군이 6·25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곳이요. 하지만 고향과 아무 상관 없어요. 만약 내 고향이기 때문에 이렇게 활동한다고 하면 추념공원 건립을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을 어떻게 하겠어요?”
박 이사장은 제18대 국회에서 자유선진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국회의원으로 4년 동안 일하면서 보람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4년 동안 모든 국민의 사랑을 저 만큼 받은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안티가 거의 없이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다고 봐요. 제3당이라 언론도 처음에는 상당히 무시했죠.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존재감없는 제3당에 별볼일 없는 초선에 여자에 비례에… 악조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올해 한글날이 공휴일로 재지정됐는데 관련 법안을 제가 제출했어요. 한자로 돼 있는 국회의장 명패가 올해 한글날에 맞춰 한글로 바뀐 것도 노력의 결실이죠. 이번에 국군포로 유해가 송환됐는데, 국방부에서 도와줄 수 있었던 것도 지난 4년동안 이 부분에 대해 죽어라 하면서 일한 부분이 결실을 거둔 것 아닌가 생각해요.”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다. 6·25를 잊고 사는 국민과 북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강원도민에게 바라는 점은 없을까?
“강원도민들은 6·25와 떼려야 뗄 수 없어요. 6·25때 가장 격전지가 강원도잖아요. 그렇게 격전을 치렀기 때문에 강원도쪽 대한민국 군사분계선이 금강산 코 밑까지 올라가 있는 거죠. 강원도는 그리고 유일하게 분단돼 있는 도잖아요. 탈북 1세대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아바이 마을이고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느끼지 못하는 북한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곳이 강원도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강원도민만이라도 북한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가졌으면 해요. 그리고 통일을 대비해서도 강원도가 주도권을 잡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국군포로를 생각하고 탈북자를 생각하는 곳. 그리고 그런 운동이 강원도부터 출발했으면 해요.”
서울/진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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