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탄금대] (彈琴臺)
충주에 있는 삼국시대 가야의 우륵 및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신립 관련 사적지. 정식명칭은 충주 탄금대이다.
2008년 7월 9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42호로 지정되었다. 탄금대는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야산인데, 기암절벽을 휘감아돌며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울창한 송림으로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다.
신라 진흥왕 때 당시 3대 악성 중 하나이자 가야금의 창시자격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해 왕으로부터 찬사를 받게 되어 충주 땅에 거처지를 마련하여 신라의 청년들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데 그 소리를 듣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으니 바로 지금의 탄금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 때의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살게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을 뽑아 보내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가 이곳에 터를 잡아 풍치를 즐기며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때 무장 신립이 8,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맞아 탄금대전투를 치른 전적지이기도 하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의 열두대라고 하는 절벽은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신립은 강에 투신자살하였다.한편, 탄금대는 2013년 세계조정선수권대회의 배경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중기의 무신 신립(申砬, 1546~1592)
신립은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가 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신립설화>의 핵심인 ‘신립 장군 이야기’는 그의 이적(異蹟)과 충주 전투를 내용으로 한다. 신립에 관한 인물전설은 문헌·구전을 통해 전승되어 왔다. 문헌설화는 『어후야담(於于野談)』, 『대동야승(大東野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기문(大東奇聞)』 등에 실려 있고, 구비설화는 각 시·군지와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실려 있다.
신립관련 설화를 ‘출생-성장-결혼-이적-출사-사망’의 6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신립은 고자의 아들로 기생의 몸을 통해 출생하였다고 한다. 신립이 저잣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다니다 율곡의 눈에 들어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호랑이를 부리고 귀신도 알아볼 수 있는 신이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권율이 관상을 잘 보는데 신립이 삼국대장 재목이라서 사위를 삼는다.
이적은 <신립설화>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한 이야기를 소개하면, 신립이 사냥을 나갔다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가를 발견했다. 사람을 찾으니 소복을 한 여인이 홀로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 집에 종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인집 식솔과 종들을 모두 죽여 자신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녀는 종의 아내가 되든지 맞아 죽든지 택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신립이 의기가 나서 종을 없애려고 그 집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이 되자 종이 나타났다. 신립이 화살을 쏘아 죽이고 처녀를 구해 주었다. 처녀가 자신은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라며 데려가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신립이 자신은 이미 취처를 한 몸이라 청을 받아 줄 수 없다고 하자, 거절을 당한 처녀가 이튿날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을 하였다.
신립이 장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장인이 듣고 잘못한 일이라고 꾸짖었다. 그 원혼이 신립으로 하여금 조령이 아닌 탄금대에 진을 치게 하여 왜군에게 패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이인인 그의 장인에게 선택을 받아 무관으로 출사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로 임명을 받고 조령에 포진을 한다. 그날 밤 꿈에 처녀가 나타나 “장군님 어찌 험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되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왜군과의 접전이 벌어지자 대문산 탄금대 북쪽의 기암절벽인 열두대에 화살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번개처럼 활시위에 화살을 먹여 쏘았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활시위에 열이 올라 불덩이처럼 뜨거워지자 백 여척이나 되는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강물에 열을 식혔다고 하여 열두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신립이 배수진을 친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 또는 견문산으로 불리던 산으로, 북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흘러내려 서로 만나는 곳에 있는 독산(獨山)이다. 산세는 평탄하면서도 남한강 쪽으로 암석이 첩첩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고,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탄금대라는 지명은 신라 때 악성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주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망은, 조령에 진을 치지 않고 꿈에 나타난 처녀의 말을 듣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가 패하여 투신 자결하였다.
변이
신립의 이적 중 처녀의 집에 나타나 가족을 해치는 존재는 귀신, 도깨비, 이무기, 장사, 장군 등 다양하게 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신립의 패전을 유도하는 존재도 처녀 원귀 외에 산신, 백발노인, 귀신 등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사망과 관련해서는 신립이 패전한 뒤 강물에 투신해 자결하려고 하였는데 새들이 방해하여 화살에 맞아 죽었다, 금마산에서 죽었다,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죽었다, 고향에 돌아가 자살했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등 다양하게 변이되어 있다. 사후담은 문헌설화에는 나타나지 않고 구비설화에 주로 지명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분석
<신립설화>는 출생부터 사망까지 고르게 일화가 전승되고 있으며, 영웅의 일생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문헌설화에는 나타나지 않고 구비설화에서 비정상적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되며, 성장 시 율곡의 눈에 들어 수학하는 등 구출 양육자를 만난다. 이는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결혼담은 신립이 권율의 사위이며 권율을 이인이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임진왜란의 영웅인 권율의 선택을 받았다면 장차 그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인물이라는 복선을 깔고 있으며, 그가 훌륭한 장군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적담에서는 용력과 지혜가 뛰어나 종을 퇴치하는데, 이는 신립이 장차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가 청혼을 하는 처녀의 청을 거절하자 처녀가 자결을 하여 원귀가 되는데, 이런 원귀형 전설에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보상을 받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인간 세상에 재생하고 있다. 원귀 모티프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것을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귀의 탓으로 돌려 패배에 따른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립이 처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내용에서 전승자들은 신립을 통해 도덕적 명분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양반들의 형식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이 전설은 신립이 포용력이 부족해서 왜군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통해 암암리에 전달하고 있다.
특징
문헌설화에서는 신립이 충주 전투에서 패한 것은 무능하고 용렬하며 지략이 부족한 그의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하는데, 구비설화에서는 이를 원귀의 작용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신립을 실패한 영웅으로 이해하고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립설화>는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사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립과 처녀의 은원관계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처신과 인간관계의 본질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유형은 인물의 실제 행적과는 상관없이 향유층에 의하여 변형될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