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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24강
로마의 셋집에서
말씀 / 사도행전 28:1-31
요절 / 사도행전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했던 사도행전의 역사가 어느덧 로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주의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 하셨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마지막 장입니다.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의 마무리를 바울이 로마 셋집에서 복음을 강론하는 모습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인생의 모델로 사도 바울의 선교 열정과 복음 역사에 대한 심정을 배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 바울을 인도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을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로마로 가는 도중 파선된 배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풍랑을 맞아 간신히 버티다 육지를 발견하고 해안을 향해 배를 최대한 가깝게 붙이고자 시도했습니다. 배는 부서졌지만 바울과 275명의 승객들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이 육지에 오른 곳은 어디였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멜리데라는 섬이었습니다. 멜리데 섬은 이탈리아 반도에 거의 붙어 있는 시칠리아 섬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 제주도의 4분의 1 정도 크기의 작은 섬입니다. 이 섬은 전 세계에서 은퇴 후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하나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또 원래 가고자 했던 이탈리아 남부와도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에 밀려 15일 이상을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남쪽으로만 밀려간다고 생각했는데 도달한 곳은 머나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원래 목적지와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바울은 항해의 어려움을 함께 당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항해의 여정이 완전히 잘못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습니다.
바울과 275명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이 지나기까지 석 달을 지내게 됩니다.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빨리빨리’에 중독된 사람에겐 느린 것이 고난이고 곤욕입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을 갇혀 지낸 것이나 이곳 멜리데 섬에서 석 달을 지내게 된 것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가이사랴 2년은 왕과 로마 총독들과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적 위정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 2년을 통해 바울이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멜리데 섬에서의 3개월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곳은 미전도종족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이들과 바울 일행 사이에서 한 에피소드가 벌어졌습니다. 이날은 비가 오고 날씨도 매우 추웠습니다. 그 섬의 원주민들은 특별한 동정심이 생겨 바울 일행과 배에 탔던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불을 피워주며 맞이해줍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가져다 불에 던져넣었습니다. 그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나뭇더미에서 잠자고 있던 독뱀이 뛰쳐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독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서로 놀라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공의’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고 처벌해 질서를 바로잡는 여신 ‘디케’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공의의 여신 디케가 바다에서 이루지 못한 공의를 독뱀을 통해 이룬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독뱀에 물린 바울의 손이 “언제 부어오를까, 몇 분 후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져 죽을까?”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독뱀을 불에 떨어 버립니다. 바울은 조금도 상함이 없습니다. 원주민들이 놀라 소리 지릅니다. “이분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갓 바울!” 바울을 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나무 묶음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바울의 부주의로 인해 생긴 사고였습니다. 왜 하필 그 속에 뱀이 있었는지, 또 바울은 왜 하필 그 나무 묶음을 집어 던졌는지 운이 참 나쁩니다. 간신히 풍랑과 싸우며 바다에서 살아나왔는데 육지에 오르자마자 또 불행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바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분입니다. 바울이 독뱀에게 물린 일이 어떻게 선이 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바울 일행을 초대합니다. 3일 동안 친절하게 대접합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과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므로 그를 낫게 합니다. 그러자 그 섬에 있는 다른 병든 사람들도 바울에게 나아와 다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로 인해 멜리데 섬 사람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 ‘원주민’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낯선 말을 쓰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바울 일행이 쓰는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바울 일행도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사 표현이 잘 안 되었을 것이지만 섬사람들은 석 달 동안 바울 일행과 배에 탔던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합니다. 섬사람들은 3개월 동안 바울 일행과의 사귐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보블리오가 예수님을 믿고 멜리데 섬 최초의 교회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몰타 섬에 가면 바울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원주민들은 감사함으로 바울 일행을 풍성하게 대접했고 바울 일행이 겨울을 나고 3개월 후 떠날 때는 필요한 것들을 넉넉히 실어 보내주었습니다. 결국 3개월의 조난이 그냥 선교 여행이 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로마에서의 생활필수품을 지원받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또 미리 미전도 종족을 섬기는 경험들을 통해 로마와 땅끝 선교의 워밍업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을 겪는다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일정이 변경되고 늦어지고 차질을 빚는다고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 고난 속에서 믿음의 사람은 그의 믿음이 더욱 빛이 나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석달 후 바울일행은 알렉산드리아배를 타고 떠납니다. 멜리데 섬에서 로마까지의 여정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의 항구도시 수라구사에서 3일,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엄지발가락에 해당하는 곳인 레기온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보디올에 이릅니다. 이제 배 타고 가는 여행은 끝나고 여기서부터는 육로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개척한 후 로마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가이사랴에서 2년간 투옥되어야 했고 지중해 바다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 일행과 늘 함께 계셨고 드디어 바울의 비전대로 로마로 이끄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바울의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오직 바울의 것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이 두려워하고 힘들어할 때마다 ‘너는 로마에 가야한다. 가이사 앞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 말씀해주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곧 바울의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로마 선교의 비전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주신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로마 성도들이 바울 일행의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마중 나옵니다. 로마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당시 로마는 세상 최고의 권력이 지배하고 세상의 온갖 풍요와 쾌락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화려함과 풍요와 웅장함이 자리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문화와 종교를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런 로마를 가리켜 우리가 잘 아는 ‘세네카’는 ‘악의 소굴’로 정의했습니다. 이런 로마에 첫발을 내디딘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바울은 자신을 맞으러 나온 로마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습니다. 로마 형제들은 3년 전 바울이 로마서 편지를 써서 로마 성도들에게 보내면서 그토록 만나보기를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악의 소굴’ 같은 로마에서 신앙 중심을 지키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온 등불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왔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로마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소망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에게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죄수에겐 두 명의 군인이 지키게 되어 있었지만 바울에겐 한 명이었습니다. 마치 형사가 범죄자에게 수갑을 채워 자기 손목에 매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쇠사슬로 그 군인과 매여 있었지만 가택연금 상태로 제한된 자유가 바울에게 주어졌습니다. 항해 여정 가운데 벌어진 일들과 멜리데 섬에서의 일을 겪은 율리오 백부장이 좋게 말해줬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지 고작 3일 후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울에게는 여독을 풀고 시차를 극복할 시간도 3일이면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청해 자기가 왜 이곳에 죄수로 오게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아마도 로마에서의 복음 역사에 유대인들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동족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목자 심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가르칩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 성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임을 열정적으로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믿는 사람들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해 지적합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교만과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30,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여기 ‘온 이태’는 만 2년을 말합니다. 바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상고심이 2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고 지연됩니다. 바울은 아직 재판을 받지 않아 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세를 주고 렌트한 셋집에 살면서 재판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재판이 지연되면 근심과 염려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유리한 판결을 받아내고자 골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언제 풀려날지, 언제 재판이 열릴지에 대해 관심 가지기보다는 셋집에 머무르면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다 따뜻하게 맞아주고 복음에 대해 가르칩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어디에서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현재 셋집에 가택 연금된 상태입니다. 군인과 쇠사슬로 매여 있기에 활동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환경과 상황의 제약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습니다.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기회로 삼습니다. 이때 쓴 빌립보서 1장 13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의 쇠사슬에 매임이 로마 온 시위대 안에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기를 감시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군인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한 명의 간수와 4시간씩 묶여 있어야 했는데 바울은 그 시간 동안 각 간수들의 삶의 고뇌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몇 사람의 간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을 때 빌립보서 4장 22절을 보면 그 복음이 가이사의 황실 사람들에게까지도 전해집니다. 이렇게 매여 있을 당시에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도 도왔고 빌레몬서 1장 10-12절에서 그에 대해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내 심복(심장)이라”라고까지 말합니다.
자유의 몸이 좋지만 매이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바울이 매여 있었기 때문에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2차 투옥 때는 디모데후서 등 영감 넘치는 은혜의 편지들을 써서 교회와 각 사람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 편지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들로 풍성합니다. 매여 있기 때문에 묵상과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13절에서는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디모데후서 2장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바울의 매임을 쓰셔서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이 거침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결과가 어떠합니까? 아쉽게도 바울의 셋집 역사는 결론이 없습니다. 32절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29장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끝이 납니다. 누가는 바울이 셋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치는 모습만 말하면서 사도행전의 붓을 놓습니다. 뭔가 뜨겁고 희망적이긴 하지만 결과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더 이상 기록되지 않은 데는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충분히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의도하시는 바가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결론을 도출하거나 더 이상의 살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통해 생각되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궁금해하는데 결과에 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삶을 과정과 결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 성도들의 최종적인 신앙의 결과는 이 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과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는 성과, 보상, 열매 이런 것들도 다 신앙 과정의 일부일 뿐입니다. 자꾸만 결과를 도출하고 결과에 매이고 눈에 보이는 열매나 보상, 축복 이런 것들에 매이기보다 우리 신앙의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영접했고, 또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충실하므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감사하고 오늘이라고 부르는 매일의 삶을 주님 안에서 의미 있고 즐길 줄 아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결말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전승에 의하면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이 나타나지 않아 재판을 받지 못하고 2년 후에 풀려나게 됩니다. 그는 스페인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몇 년간 전도하다가 다시 체포됩니다. 그리고 네로황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감옥 안에서 추위와 고난으로 말년을 보냅니다. 그리고 AD 67년 봄, 로마 외곽 오스티안 언덕에서 목 베임을 당해 죽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바울의 셋집에서 이룬 복음 역사로 인해 결국 로마가 복음화되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결과를 강조하면서 바울처럼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면 큰 열매와 결과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셋집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비밀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힘은 외형이나 사람의 규모나 크고 웅장한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장소는 셋집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고 확신있게 거침없이 전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져 갑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셋집 역사처럼 우리가 감당하는 1팀의 전도와 1팀의 1대1 성경공부를 통해 캠퍼스와 지역사회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물론 우리가 결과와 열매에 대한 소망이 없으면 복음 역사의 과정이 팍팍하고 힘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뜻 두신 대로 완성해가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신앙 과정에 좀 더 충실한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오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완성해 가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때를 AD 60년 초로 보고 그가 순교 당한 해를 학자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길게는 67년으로 본다면, 적어도 대략 5년 이상 가장 열정적으로 모든 역량을 발휘하면서 말년의 삶을 보냈음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생 중반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년은 누구보다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신앙 여정 속에서 가면 갈수록 주와 복음을 위해, 또 신앙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할 일이 있고,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셔서 담대하고 거침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