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짜리 황금 바둑판
1000억 광화문광장 재조성
“치적쌓기용 수단으로 예산 활용” 지방자치 혐오 기류도
민주적 정당성 확보하는 데에 주민자치가 필수
단체장 독단 견제할 시민사회 감시 제도장치 시급
지방재정이나 지역에 피해를 주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독단적 결정으로 지방자치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단체장들의 ‘책임감 결여’ 때문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그 결과 지방자치가 선출직 공직자의 사적 이익 혹은 향후 진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치적 쌓기용 수단으로 전락하고,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이른바 ‘지방자치 혐오’를 낳아 정치발전과 지역 균형 발전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엿보인다. 교수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전북 무주군은 9일 무주읍 향로산 정상에 ‘초대형 태권브이’ 조형물 설치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전해 논란을 빚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에 대해 군청 내부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마땅한 제도적 제어 방법은 없는 실정이다. 같은 날 시민들은 이를 두고 “예산 72억에서 얼마를 해 먹었을지” “72억이면 45억은 해 먹었다고 본다” “군수랑 제작업체 사장이랑 골프 쳤겠지” “영혼 없는 공무원들 싹 잘라야” 같은 비판적 반응을 보였다.
신안군은 8월 ‘바둑의 메카’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싶다며 100억원가량을 들여 황금 바둑판을 만들기로 했다가 예산 낭비라는 비판 여론에 밀려 잠정 보류한 상태다. 군은 당초 이 안을 이달 중에 군의회로 상정할 예정이었다. 신안군 관계자는 10일 “당분간 보류하지만 이후 공론화 과정을 거쳐 다시 사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고 완전 철회까지는 아니”라고 밝혔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앞선 2014년 9월 조형물의 무분별한 건립에 따른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주민대표 참여 건립심의위원회 구성’ 등을 권고했지만 권익위 권고에는 법적 강제력이 없다. 권익위 관계자는 11일 “점점 지자체의 이행률이 높아지고 있고, 이행을 독려하겠다. 지자체들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무주군과 신안군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요즘 ‘치적 쌓기용 행보’라는 비판이 제기된 대표적 사업 사례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밀어붙이는 광화문 광장 재조성 사업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한동안 이를 반대하며 박 시장이 대권 도전을 위해 무리한 욕심을 낸다는 글들이 잇따랐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에서 29일 이를 비판하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3일 이에 관해 “박원순 시장이 대선을 염두에 둬 헛발질을 많이 한다”며 “큰 거 한방(대표적 치적)을 만들려 할 게 아니라 다른 식으로 접근해 전략을 짜야 하는데 답답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7월 서대문구청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에 거대 추모공간 조성을 추진했다가 문화재청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당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위원인 강동진 경성대 도시공학전공 교수는 서면을 통해 “서대문구청에서 새로운 랜드마크로서 추모공간을 조성하려고 한다. 이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우려의 뜻을 전했다. 문화재청은 구청 측에 ‘적정성이 부족하다’며 부결을 통보했다.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돼 문화재청 등에서 단체장의 자의적 판단을 막을 수 있게끔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강경태 신라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지방자치는 강시장-약의회 구조 또는 강시장-시장보조의회 구조로, 단체장이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때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별로 없다.
다수 학자들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등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주민의 참여와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며 ‘주민자치’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정원식 경남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방자치단체장이라고 해서 민주적 정당성을 자동적으로 담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형식적인 민주적 정당성에서 나아가 실질적이고 실효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주민자치가 필수적”이라고 봤고, 최인수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은 “지방분권의 핵심은 생활정치와 맞물린 주민자치강화와 진정한 마을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밝혔다.
차재권 부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6일 “행정안전부 등 지방자치를 책임지는 중앙부처에서 자치법규 심사를 해서 조례안이 법률에 위반되면 제2요구를 하는 등 방식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 이건 지방자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일 좋은 건 지방자치단체 안에서 그런 것(단체장의 독단적 결정)들을 걸러낼 자정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운을 뗀 뒤 “시민사회에서 감시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제도들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 교수는 이어 “우리나라는 단체자치에 중점을 두다보니 주민자치라는 지방자치의 또다른 한 축이 제대로 안 굴러가는 게 문제”라며 “풀뿌리 단계에서 나오는 주민자치가 활성화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을 허용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많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지방자치는 지방분권이라는 측면에서 ‘단체자치’와 민주주의라는 측면의 ‘주민자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나뉜다. 우선 단체자치란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뜻한다. 반면 주민자치는 국민자치를 지방적 범위 내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지방시정에 직접적인 관심과 이해관계가 있는 지방주민이 스스로 다스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주민자치는 지방정부에 대한 주민의 참여 내지 통제를 통한 자치가 핵심의제가 된다.
강경태 교수는 주민자치가 지방분권의 가장 주요한 근간이라며, 특히 자치운영에 대한 주민의 참여와 통제는 지방자치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주민자치는 주민들로 하여금 이익을 찾고 요구하게끔 하며, 직접민주주의의 보완이라는 측면도 있다는 데 주목했다.
최창호 건국대 명예교수는 주민자치를 통해 직접민주제의 원리를 현실적으로 적용한 조직으로 주민총회(popular assembly system)를 소개했다. 이는 해당 자치단체의 유권자 전원으로 구성되는 주민총회가 해당 자치단체의 최고기관으로서 자치단체의 기본정책, 예산, 인사문제 등을 직접 결정하며 집행하는 것으로 일본의 정촌총회(町村總會), 미국의 타운 미팅(Town meeting), 스위스의 게마인데베르삼릉(Gemeindeversammlung; assemble communale) 등이 있다.
차재권 교수는 “우리나라는 지방분권적인 전통과 풀뿌리 자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층조직들이 약하다”며 “그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키워주기 위한 제도적인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단체자치 중심의 지방자치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했다.
강경태 교수는 여전히 형식적인 지방자치에서 주민자치의 실현이 어렵다며, 지방정치가 발전하기위해서 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주민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를 위해 지방자치의 단위를 시군구에서 읍면동으로 바꾸고, 주민들에 대한 단순한 정보 제공에서 주민과의 상담, 숙의적 포럼, 주민의 직접 통제에 이르기까지 주민자치의 형태를 다양하게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흐름 속에 주민자치와 관련한 주민자치회 중심의 민관, 민민협력 시스템의 마련도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차 교수는 우리나라에 주민자치조직이 활성화된 사례도 많다면서도 “문제는 그런 모범사례들이 파편화돼 있어 한 마을의 경험에서 끝나버리고 공유가 안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편 현 정부 들어 행정안전부 주도로 주민자치시스템 재정비 작업을 해온 것 역시 그런 사례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며 “주민자치회가 잘 조직되면 주민총회 형태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범진 기자 jin@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