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시켜야 하나 고민하지 마세요…뭘 내놓을지는 주인장 맘이라오
- 제철 식재료로 푸짐한 한 상 차림
- 진주 대표하는 서민 음식 명성
- 통영다찌·마산통술과 같은 부류
- 현대식 오마카세의 원조인 셈
- 인근 삼천포 싱싱한 해산물로
- 생굴·멸치무침에 고랑치 생선회
- 전복 멍게 소라 낙지 갈치구이…
- 1인 안줏값 2만5000원이면 끝
한때 진주지역 시인들과 잦은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다. ‘부산경남젊은시인회의’란 단체의 일을 맡으며 경남 각지의 시인과 더불어 그 지역의 사회 역사 문화를 배우며 박주일배(薄酒一杯)를 기울이곤 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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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서민의 음주문화를 대표하는 진주 실비의 가장 큰 특징은 정해진 상차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주인이 주는 대로 술상을 받아야 한다. 일종의 ‘오마카세’인 셈이다. 매일 새롭고 맛깔스러운 안주를 사시사철 먹을 수 있다. |
당시 진주에도 여러 문학 도반들이 있었는데, 멀리서 온 나그네를 박대하지 않고 늘 반겨 주었다. 모두들 주머니가 가벼운 시절이라 거방한 술자리는 언감생심이고 그럭저럭 가성비 좋은 단골 술집에서 권커니 잣거니 했었다.
그때 자주 찾았던 곳이 진주 서민의 음주문화를 대표하는 ‘실비집’이었다. 말 그대로 허름한 식당에서 실비(實費)로 술을 팔던 곳으로, 싸게 판다는 뜻의 ‘실비로 파는 집’을 뜻한다. 당시 안주는 정해진 것이 없이 주인장이 그날그날 장을 봐온 식재료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두었다가 술이 떨어지면 술과 함께 안주를 채워 주는 방식으로 영업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오마카세’의 원조이기도 하다.
진주는 서부경남의 최대 도시로, 역사 경제 문화 교육의 도시이자 소비도시이기도 하다. 다양한 물산이 인근 지역에서 집산이 되기에 식재료가 풍성하다. 특히 당시 삼천포에서 싱싱한 해산물이 곧바로 진주로 직송되었기에, 언제나 풍성한 해산물의 안주로 술을 한잔할 수 있었던 곳 또한 진주이기도 했다.
진주 시인들과의 술자리는 늘 행복했던 것 같다. 술상을 삥 둘러 가며 술병을 세우고는 술병 놓을 자리가 없으면 옆 술상으로 옮겨 다시 술자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추억이 있는 진주 실비집을 얼마 전에 찾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실비집. 진주 사람들이 말하는 ‘실비’는 원래 제철에 나는 값싼 재료로 밥반찬처럼 음식을 만들어 놓았다가 안줏값 없이 술값만을 받고 술을 팔던 술집을 통칭한다. 진주뿐만 아니라 사천 등 서부경남의 서민들이 즐겨 찾는 술집, 또는 음주 문화를 지칭하기도 한다.
지역 원로 문화인들에 의하면 “1970~80년대 시내 중심가인 중앙로터리 기업은행 뒷골목에 공짜로 안주를 제공하던 ‘옥이집’ ‘남이집’과 계동의 안주 값이 싼 ‘화랑집’ ‘신라집’ 등의 술집이 실비만 받고 술을 팔았다고 해서 ‘실비집’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현재는 원도심 이외에도 대단지 아파트 밀집 지역인 신안동 인근에 10여 곳이 거리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진주 실비집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정해진 상차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림표도 없고, 손님이 먹고 싶다고 특정한 안주를 시킬 수도 없다. 그냥 주인이 주는 대로 술상을 받아야 한다.
인근 시장에서 제철에 나는 것 중 싸고 많이 나는 싱싱한 식재료로 조물조물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새롭고 맛깔스러운 안주를 사시사철에 걸쳐 먹을 수가 있다.
한때 실비집은 맥주를 중심으로 술값만 받고 안주는 무제한 공짜로 주는 방식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넉넉한 안주를 제공하는 대신 소주 만 원, 맥주 6000원 등 술값을 더 받는 형태로 변했다. 지금은 ‘통영 다찌’나 ‘마산 통술’처럼 1인당 일정액의 안줏값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비교적 진주 술꾼들에게 잘 알려진 실비집에는 1인당 2만5000원의 안줏값을 받고 있는데, 제철 따라 나오는 스무 가지 안팎의 안주를 넉넉하게 받아볼 수가 있다. 실비 2인 술상의 안줏값이 부산의 생선회 작은 접시, 또는 평범한 일식집 점심 특선 수준이다. 그런데 가성비로 보자면 안줏값만 족히 10여만 원은 훌쩍 넘겨야 할 듯 싶다.
우선 상차림을 살펴본다. 전화로 예약할 때 안주 몇 가지가 떨어졌다고 주저하더니, 차려지는 모습을 보니 보통이 아니다. 자연산 생선회에 전복 멍게 소라회 낙지탕탕이 생굴 무침 멸치회 무침 꽃게찜 가리비 꼬막 숙회 대하찜 죽방렴 갈치구이 해물 빈대떡 새우튀김 조개 미역국 등이 줄을 지어 상에 오른다.
10월인데 벌써 햇굴이 나오는지 생굴 무침이 상에 올랐다. 한점 집어 먹어보니 갯냄새가 입 안에서 진동한다. 질릴 정도의 고소함과 맵싸한 양념에 짭조름한 젓갈 등이 어우러져 흔쾌하기 이를 데 없다. 꼬들꼬들 씹히는 고랑치를 비롯한 가을 생선회도 좋고, 전복 멍게 소라 낙지회도 달큰쌉쌀하고 살강살강하니 쫀든쫀득하다. 차례차례 하나씩 음미를 한다.
찬 음식을 먹었으니 조금 속을 데워야겠다. 새우튀김과 해물 빈대떡으로 술 한잔 한다. 적당히 기름지고 고소한 음식이 속과 입을 따듯하게 데워준다.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음식에 젓가락을 가져간다.
갓 쪄낸 가을 꽃게 속에는 뽀얀 살점이 꽉꽉 들어차 웅숭깊고, 가리비 숙회와 꼬막 숙회 또한 입 안에 바다의 짙은 맛이 물결치듯 넘쳐흐른다. 남해 죽방렴에서 건져낸 갈치구이는 부드럽고 고소함이 남다르다. 크지는 않지만, 살이 통통한 것이 진한 풍미를 내고 있어 참 좋다.
마지막으로 조개 미역국이 나온다. 대부분 경남의 비슷한 형태의 술집은 마지막에 술국이 나온다. 이 술국이 나오면 이제 안주가 다 나왔다는 뜻이다. 음식이 다 나왔으니 술국으로 시원하게 해장을 하라는 것이다.
조개는 대합을 썼다. 조갯국 중에 가장 시원하고 개운한 육수를 내는 조개다. 특히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대부분이 이 대합으로 제사의 탕국이나 비빔밥 등과 곁들이는 국을 끓인다.
한술 뜬다. 뜨끈한 조개 국물이 속을 환하니 풀어준다. 미역 육수의 걸쭉함 또한 속을 다독여 준다. 자칫하면 이 진하고 시원한 조개 미역국이 오히려 해장이 되며 술을 더 부를 수도 있겠다.
‘진주 실비’는 ‘통영 다찌’와 창원 ‘마산 통술’과 함께 ‘경남의 3대 서민 음주문화의 공간’이다. 지금은 타지의 관광객이 지역의 음식문화를 체험하는 관광문화자원이 되었지만, 한때는 서민의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지인들과 하루의 피로를 술 한잔에 담소로 풀어내던 문화사랑방 같은 장소였다.
모쪼록 진주의 실비집을 비롯한 경남의 이 모든 서민 술집들이 좋은 사람과 허물없이 하루의 일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계속 남기를,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묻히지 않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