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공부와 마음수행
경전은 먹줄과 같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안내서이다. 담을 쌓을 때 먹줄을 쳐서 평형과 균형을 맞추듯, 경전은 수행할 때 잘못된 것과 올바른 것을 가려내어 올바르게 정진하도록 기준을 잡아준다. 그러나 경전 공부에만 집착하면 지식만 늘리는 것이지,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다. 마치 제주도를 가려는 사람이 직접 집을 떠나지는 않고, 여행안내서만 본다면 언제 제주도에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원효 스님이 젊은 수행자일 때, 경주 남산 토굴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하루는 어미 잃은 너구리 새끼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토굴 앞에 서 있었다. 곧 죽을 것 같이 보여서 토굴 안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아미타불 염불을 하였는데도 나아지지는 않고 죽어가고 있었다. 마침 그 때 대안 대사가 지나가다 들러서 염불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가는 너구리가 염불해 준다고 살아나겠느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너구리를 살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마을에 가서 애기 엄마 젖을 얻어다 먹여라. 그러면 진짜 아미타불이 나타날 것이다.”
원효 스님이 대안 대사가 시킨 대로 애기 엄마 젖을 얻어다 먹이자, 새끼 너구리는 즉시 기운을 차렸다. 원효 스님은 배고픈 새끼 너구리에게는 애기 엄마 젖이 진짜 아미타불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고통 받는 중생을 살리기 위한 지혜방편을 깨달았던 것이다. 지혜의 눈이 어두우면 작은 이익과 편안함에 현혹되어 가야할 길을 잃고 헤매면서 갖은 고통을 겪게 되지만, 지혜의 눈이 밝으면 가야할 길이 훤히 보여 힘들이지 않고 원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직지심경』282「고령신찬 선사 1, 법당은 좋은데 부처님이 영험이 없다」에 전하는 일화이다.
고령신찬(古靈神贊) 스님은 중국 북주에 있는 대중사(大中寺)로 출가하였다. 은사 스님이신 계현(戒賢) 스님은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참선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 보고 있었다. 경전을 보면서도 깊은 뜻은 알려고 하지 않고, 독경만 열심히 하였다. 신찬 스님이 가끔 읽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물으면 제대로 답을 주지 못하자,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형식적으로 경전을 보아서는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을 깨닫거나, 생사를 넘어서는 대해탈을 이루기가 힘들지 않을까? 나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하다. 다른 선지식을 찾는 것이 좋겠다.’
여러 번 자신의 뜻을 은사 스님에게 말씀드렸으나, 은사 스님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더 이상 헛되이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신찬 스님은 은사 스님 곁을 떠나 대선지식인 백장 선사를 찾아갔다. 여러 해 동안 정진한 끝에 마침내 견성오도(見性悟道)하여 백장 스님의 인가(認可)를 받았다. 인가란 바르게 불법을 이해했다고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은 신찬 선사는 처음 자신을 입문시켜 경전을 가르쳐 주시고, 지극히 아껴주신 은사 스님의 은혜를 잊지 못해 대중사로 돌아왔다. 제자를 본 은사 스님이 물었다.
“너는 나를 떠나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내 곁을 떠나가서 어떤 공부를 하였는가?”
“아무것도 공부한 바가 없습니다.”
이 말에는 살아있는 법문이 담겨 있는데도 은사 스님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저 제자가 허송세월만 하고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여 절의 허드렛일을 시켰다. 신찬 선사는 아무런 불평 없이 나무를 하고, 마당을 쓸고, 공양주(供養主)를 도와 물을 긷고 불을 때기도 하였다. 공양주는 절에서 밥하는 소임을 말한다.
은사 스님은 예전처럼 큰소리로 열심히 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를 보고 생각했다. ‘은사 스님은 여전히 문자에만 얽매인 채 조박(糟粕)만 씹고 있구나.’ 조박이란 깨로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을 말한다. 깊은 뜻은 체득하지 않고, 문자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마치 기름은 먹지 않고 깻묵만 씹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하루는 은사 스님이 목욕을 하다가 신찬 선사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신찬 선사가 등을 밀며 말하였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하지 않구나(好好法堂 佛無靈驗).”
이 말을 들은 은사 스님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려서보니, 이렇게 말하였다. “부처가 영험하지는 못해도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佛雖無靈 具能放光).”
제자가 범상치 않음을 짐작하였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목욕을 마친 후에 평소처럼 창 아래 놓은 책상에 단정히 앉아 경전을 읽었다. 때마침 벌이 방으로 들어왔다가 반쯤 열린 창문 틈을 찾지 못하고, 창호지에 몸을 부딪치는 모양을 묵묵히 지켜보던 신찬 선사가 은사 스님에게 들리도록 게송을 지어 읊었다.
“공문불긍출(窓門不肯出) 투창야대치(投窓也大癡) 백년찬고지(百年鑽古紙) 하일출두시(何日出頭時)”
이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열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봉창을 치니 크게 어리석구나. 옛 종이를 백 년 뚫는다 한들 어느 날에 나갈 수 있겠는가.”
공덕 삼아 형식적으로 경전을 읽어서는 생사 해탈할 수 없다는 말씀인데, 은사 스님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목욕할 때 들은 말과 지금 외운 게송을 새겨보다가 문득 느낀 바가 있었다. ‘어쩌면 신찬이가 깨달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읽던 경전을 덮으며 물었다.
“너의 말을 듣자하니, 매우 이상하구나. 신찬아, 나는 네가 허송세월만 하고 돌아온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구나. 너의 태도가 범상치 않으니, 그동안 누구에게서 어떤 법을 배웠는지 말해 보아라.”
“스님, 무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실은 그동안 백장 선사에게서 불법의 요지(了知)를 깨닫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스님께서 참 공부에는 뜻이 없으시고, 여전히 문자에만 골몰하고 계신 것이 민망하였습니다. 제가 권하여도 듣지 않으실 것 같아서 버릇없는 말씀을 누차 드려 참다운 발심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은사 스님의 덕을 갚으려 할 뿐입니다. 부디 제자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기특한 일이다. 비록 나의 제자이긴 하나 공부로는 나의 스승이니, 지금부터 백장 스님을 대신하여 나에게 불법의 참뜻을 알려다오.”
계현 스님은 대중을 모이게 한 뒤 법상을 차려 신찬 선사에게 설법하게 하였다. 신찬 선사는 위의(威儀)을 갖추고, 엄숙하게 법상에 올라 대중을 향해 설법하였다.
“영광독휘 형탈근진(靈光獨輝 逈脫根塵) 체로진상 불구문자(體露眞相 不拘文字) 진성무염 분자원성(眞性無染 本自圓成) 단리망연 즉여여불(但離妄緣 卽如如佛)“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남이여, 육근과 육진을 초월한 자리로다. 참되고 항상 된 몸이 드러나 있거늘, 어찌 문자에 구속되고 끄달리겠는가. 참된 본성은 더럽혀짐이 없고, 본래부터 스스로 원만성취 되어 있네. 다만 허망한 인연만 떨쳐 버리면, 곧 그대로 한결같은 부처이니라.”
법상 아래에서 제자의 법문을 조용히 듣고 있던 계현 스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 어찌 늘그막에 이와 같이 지극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짐작이나 했겠는가.”
불자는 현실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그 길을 찾아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 그리고 불교를 믿는 그날부터 조금씩 행복해져야 한다.
사람들이 네 잎 크로버를 찾는 가운데, 세 잎 크로버는 버린다. 네 잎 클로버는 콩과의 여러해살이풀인 토끼풀(Trifolium repens)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일시적인 기형 현상으로 네 잎이 된다. 오래전부터 전해진 미신으로는 행운을 가져온다고 하지만, 역사나 과학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다만 아일랜드의 전설과 줄리어스 시저에 따르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처음으로 가졌던 사람들은 영국 제도(British Isles)와 갈리아(Gaul) 지방의 드루이드교 사제들이라고 한다. 드루이드교의 사제는 성스런 오크나무 숲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켈트족의 성직자들이었다.
대략 1만 개에 1개꼴로 네 잎 클로버가 핀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 5백만 개의 클로버를 조사한 결과 네 잎 클로버가 핀 것은 5천 번에 한 번 꼴이었다. 식물학자들에 의해 네 잎 클로버 씨앗이 발견된 1950년대부터는 네 잎 클로버를 인공적으로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자연 상태에 있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면 여전히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네 잎 크로버는 행운을 의미하고, 세 잎 크로버는 행복을 의미한다. 행운을 바라는 욕심 때문에 행복을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행운을 바라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도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인데, 행복은 욕심만 내려놓으면 얻을 수 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 때문인데, 현재 조건에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면 저절로 기쁨과 행복이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