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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일(성령강림절 후 열 번째 주일)
여호수아 2:1~15
성벽을 넘어선 사랑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문: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고백은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선대로 이어지고, 그 선대는 다시 하나님의 구원 약속으로 이어진다.
*설교 목적문: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말에만 머물지 않고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과 중보기도로 나타나도록 결단하게 한다.
where?
어떤 분이 군 생활을 하던 부대에 유명한 법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설법을 잘할 뿐만 아니라 노래도 좋아해서 찬송가, 복음성가도 잘 불렀습니다. 시간이 남으면 기독교 모임에도 참여했습니다.
어느 날, 모임에 갔다가 그가 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기도를 깔끔하게 잘하더니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스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가 있나요?”
그 법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의 공식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습니다. 멋지다고 추켜세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법사는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출처: 황명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두란노,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3월호), 65쪽에서 재인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두 명의 정탐꾼과 기생 라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보냈습니다.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에 도착해서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기생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성벽 위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관은 많은 여행객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 때문에 정탐꾼이 숨기에도 편하고, 정보를 얻기에도 편한 곳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여리고 왕에게 알렸습니다. 왕은 군사들을 라합의 집에 보내 정탐꾼들을 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왔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라합은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급히 따라가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추격군들을 성 밖으로 유인했습니다. 이러한 라합의 대답에는 정탐꾼들을 도와주려는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라합도 위기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합은 정탐꾼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추격자들은 정탐꾼을 잡기 위해 요단 나루터까지 쫓아갔고, 그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습니다. 이제 정탐꾼들은 성안에 갇힌 신세였습니다. 만약 라합이 그들을 끝까지 돕지 않는다면 그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기생 라합은 침착하고 담대하게 정탐꾼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녀는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정탐꾼들을 숨겼습니다. 고대 근동의 가옥은 지붕이 평평했고 거기에 곡식이나 아마(flax)라고 알려진 ‘삼’을 말렸습니다.
라합의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거기에 정탐꾼들을 숨겨놓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합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풍경 속에 정탐꾼들을 숨겨놓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why?
왜 라합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정탐꾼들을 숨기려고 했을까요?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적군이었고, 곧 전쟁이 일어날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자기 주민들을 배신하고 적군을 도와주고자 했을까요?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을 참고하면, 우리는 왜 라합이 그들을 돕고자 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여리고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줄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여리고 왕과 관리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라합은 거짓 소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참된 소망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비록 정탐꾼들을 돕는 일이 자기 동족을 배신하는 일이었지만, 라합은 하나님 백성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절).
라합의 말대로, 여리고 성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셨고,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무찌르셨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라합 만은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두려움을 신앙고백으로 바꾸었습니다. 라합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11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고백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정탐꾼들을 숨겼고, 왕이 보낸 추격자들을 따돌렸으며, 자기 목숨을 걸고 그들을 성 밖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라합의 신앙고백은 정탐꾼들에 대한 선대로 이어졌고, 선대는 곧이어 구원의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4절).
참된 믿음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바른 신앙고백을 할 때, 이 고백은 이웃을 향한 선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선대는 거꾸로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라합이 지킨 것은 자기 목숨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2절과 13절에서 반복해서 요청합니다. “나와 내 부모와 형제와 자매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십시오.”
그녀의 믿음은 자기 한 사람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러나 분명하게 책임지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은 병상에서 "Devotions upon Emergent Occasions"(우연한 사건에 대한 명상)(1623)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섬이 아니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출처: 17번째 명상(Meditation XVII)
존 던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과 연결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 발견한 이 연대의 진리는, 오늘 우리에게는 거꾸로 생명을 향한 사명으로 다가옵니다.
누군가의 심판이 곧 우리와 무관하지 않듯이, 누군가의 구원 역시 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 귀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who?
우리는 여기서 질문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라합은 여리고 성 사람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혈통으로 보면 그녀는 언약 밖의 사람이고, 심판받아야 할 주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시니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6장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라합과 그 가족은 살아남습니다. 여호수아 6장 2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언약 밖에 있던 여인이 언약 백성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인, 7장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유다 지파, 이스라엘 정통 혈통이었습니다. 혈통으로 보면 가장 안전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간은 하나님이 온전히 바치라 명하신 물건을 탐내어 숨겼고, 그 결과 그와 그의 온 가족이 멸망 당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아간 한 사람의 죄를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로 확장해서 해석하더라는 겁니다(7:1 참조).
라합이 정탐꾼을 숨긴 것은 생명을 위한 것이었고, 아간이 전리품을 숨긴 것은 탐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숨기다”라는 행동이 한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여호수아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결정합니까? 혈통입니까, 신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입니까?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이 자동으로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혈통적으로 이방인이라는 것이 자동으로 심판을 의미하지도 않았습니다. 라합은 밖에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왔고, 아간은 안에 있었지만,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롬 9:6~7).
과연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단지 혈통적 유대인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합처럼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웃을 향한 선대로 이어간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명하실 때도 할례받은 외국인에게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출 12:48~49).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12:3).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혈통으로는 이방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믿을 때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이 교회 안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왔기 때문에 여러분도 자동 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혹 우리 주변에서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다.”, “저 사람은 자격이 없다”라고 여기는 이들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을 진실하게 붙들고 있는 자는 없습니까?
how?
여리고 성이 멸망 당할 때, 하나님은 약속대로 기생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라합이 살몬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는데, 보아스는 다윗 왕의 증조할아버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5~6).
이방 여인이었던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편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후손을 통해서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놀랍습니다.
중동 지역에 사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아무 관련 없이 자란 그녀는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우연히 예수님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밤 가족들이 잠든 뒤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가 본 적도 없고 누구와 신앙 이야기를 해 본 적도 없었지만, 영상 속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조심스럽고도 큰 결심이었습니다.
어느 날,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마음에 그녀는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아무도 듣지 못했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 순간 그녀의 마음 안에서 분명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전에 하지 않던 방식으로 가족을 대했고, 말 한마디를 조심했으며, 작은 유혹 앞에서 잠시 멈추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김성욱,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1월호), 312쪽.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설교의 제목을 “성벽을 넘어선 사랑”이라고 붙였습니다. 여리고 성벽은 라합에게 두 가지를 의미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속한 세상의 경계였고, 다른 하나는 곧 무너질 심판의 벽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 벽 안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소식을 고백으로 바꾸었고, 그 고백을 이웃을 향한 선대로 표현했습니다. 결국, 그녀의 선대는 자신과 가족을 살리는 약속으로 바뀌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믿음의 여인 라합을 통해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셨습니다. 여리고의 기생이었던 한 여인의 믿음이 메시아의 족보 속으로 흘러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세운 경계를 넘어서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자리까지 이어집니다.
저는 끝으로 여러분께 세 가지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정말 여호와가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심을 입술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앞서 나눈 스님의 기도처럼, 형식만 있는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고백 말입니다.
둘째, 그 고백은 우리 곁의 누군가를 향한 선대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라합의 믿음이 정탐꾼을 숨기는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났듯이, 우리의 믿음도 오늘 누군가를 향한 선대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셋째, 여러분은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까? 라합이 “나와 내 가족을 살려주소서”라고 간구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가정과 이웃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혈통으로는 아무 자격이 없던 저와 여러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말에서 멈추지 않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성벽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구원의 붉은 줄을 매다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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