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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브온의 아들 아비멜렉
삿 9:1-6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삿 9:1-6 / [왕위를 꿈꾸는 아비멜렉]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하루는 세겜으로 가서 자기 외삼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어르신들, 세겜 사람들에게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세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겠느냐고 물어 봐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들의 피붙이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혀 주십시오' 3) 아비멜렉의 외삼촌들은 그를 대신하여 온 세겜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자기들의 피붙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에게 마음이 쏠려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4)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보화 중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바쳤다. 아비멜렉은 그 은으로 할 일 없이 싸돌아 다니는 건달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5) 아비멜렉은 이들을 이끌고 자기 아버지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브라로 가서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아버지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한 바위 위에다 놓고 모두 쳐죽였다. 이 70명은 모두 자기 형제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살해한 것이다. 다만 기드온의 막내 아들인 요담만이 몸을 숨겼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6)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은 모두 세겜 부근에 있는 석상 곁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받들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죽은 이후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는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맙니다.
왕이 되려는 아비멜렉(1-2) 기드온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누가 왕이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제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화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에게는 칠십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아비멜렉은 첩의 아들이었습니다. 출생 때부터 아픔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자라면서 권력의 힘을 쥐는 것이 자신의 삶을 세우는 비결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에 가서 혈육의 중요성을 인식시킴과 동시에 기드온의 70명의 아들이 통치하는 것에 대한 부당성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라는 질문을 던져서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이 세겜 사람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왕이 되려는 자가 이처럼 권모와 술수를 통해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과 행동은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선하고 의롭다면 과정과 방법 또한 정당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의 입장을 매도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왕이 된 아비멜렉(3-6) 아비멜렉의 술수에 속은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문제는 문제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되려는 아비멜렉의 방법도 선하지 않았지만 아비멜렉을 돕는 세겜 사람들의 방법도 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입에서 돈을 모아 후원한 것이 아닙니다. 바알의 신당, 즉 우상의 신당에서 후원금을 모아 아비멜렉을 도와주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종교적인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영향력이 이스라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면 그들의 정신적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우상중심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선하지 않은 후원금을 가지고 아비멜렉이 한 일을 보십시오. 그는 방탕하고 경박한 건달들을 사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오브라에 있는 아버지 기드온의 집으로 가서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5).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를 죽이는 일도 불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은 마귀의 방법입니다(요 10:10).
적 용 :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쳐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경험은 없습니까?
지금 무엇을 이루고자 애쓰고 있는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혈연과 지연이 최고라는 논리, 돈으로 다 된다는 논리를 따라선 안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 이 논리가 유입되면 교회는 세속화되어 세상의 가치를 좇는 왜곡된 공동체로 타락하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논리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야 합니다. 세상의 논리에 따라 세상의 나라를 세워선 안 됩니다.
< 설 교 >
맷돌에 맞아 죽은 남자
삿 9:1-15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을 어지럽힌 무서운 독재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사람을 꼽아본다면 먼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활동하던 로마의 네로황제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로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 때문에, 의붓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자기 부인까지 차례로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64년에는 로마시내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대학살을 감행했습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종 중,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특성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600백만 이상의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죽은 이디 아민 전(前) 우간다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는 지난 1971년에서 1979년까지 아프리카의 우간다에서 30만∼50만 명을 무참하게 죽인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또한 1979년에 대통령에 오른 후, 살육과 폭정을 일삼고, 테러 단체나 폭력 조직에 협력하고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과거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가 실패한 후세인 전(前) 이라크 대통령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들 외에도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 중국의 모택동 등 수많은 독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또한 잡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죄 없는 고귀한 생명들을 처참하게 짓밟은 비극을 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사기 9장을 보아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꼭 독재자들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 혹은, 현대 정치의 어두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입니다. 8장 30절과 31절에 의하면 기드온은 많은 부인에게서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아비멜렉은 세겜 출신의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야심을 품고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척들인 외가 식구들에게 말합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비멜렉은 혈연관계를 강조한 것입니다.
혈연관계 강조
2절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드온의 다른 70명의 아들들이 세겜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내가 이 세겜을 다스리는 것이 옳으냐’ 그는 친척들에게 묻고 나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이 말은 피를 나눈 친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집안사람이니 이번 선거에 자기 좀 밀어 달라. 어차피 누가 당선 되나 마찬가지인데, 다른 70명을 밀지 말고, 이왕이면 집안사람인 내가 당선되면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먼저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종국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친척들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그의 말에 넘어갔습니다. 친척들은 알지도 못하는 다른 70명보다, 이왕이면 집안사람인 아비멜렉을 밀어주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세겜 지방에 살고 있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아비멜렉 지지운동을 벌였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 어미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온 세겜 사람들의 귀에 고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이러한 행동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지역감정 조장이라고 말합니다.
지역감정 조장
아비멜렉의 친척들이 ‘이왕이면 다른 지역출신보다도 우리 지역 출신인 아베멜렉을 밀어주자’라고 지지운동을 벌이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은 우리 형제다”라고 적극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의 인물됨이나 과거의 정치 경력이나 자기들을 이끌고 갈 비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는 우리의 형제다’라고 외치며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외친 이 말을 과거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 아닙니까? 우리가 두고 온 조국에서 선거철만 되면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외치던 말이 아닙니까? 경상도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또 전라도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 아니랑께.”를 외치고, 충청도지역에서는 “우리가 핫바진가봬!”를 외치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같은 지역출신이라는 단순한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의 인물됨과 비전과 포부는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더기로 지지해주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동향(同鄕)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정치자금까지 대주던 한국의 정치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금권과 폭력정치
세겜 사람들은 동향 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아비멜렉을 지지하고 그에게 정치자금까지 대줍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세겜 사람들은 동향출신인 아비멜렉에게 정치자금을 대주었습니다. 물론 그 정치자금이 아비멜렉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정치자금을 대주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치자금이 떳떳한 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치 자금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들이 땀 흘려 번 돈을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다시 말하면 바알 우상에 바쳤던 헌금 중 은 70개를 다시 꺼내어 정치자금으로 주었습니다. 검은 돈을 받은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조직 폭력배들을 매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아비멜렉은 돈으로 깡패들을 동원하여 한 자리에서 아무 죄도 없는 자기의 형제들을, 그것도 무려 70이나 되는 자신의 형제를 무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8:23),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는 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를 앞세워,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지역감정을 부추기어 세겜 사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조폭들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살인을 저질러 스스로 왕이 된 것입니다. 한편 70명의 형제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 중 한 사람 요담은 다행히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아비멜렉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이 산의 맞은편에는 에발 산이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두 산이 만나는 계곡은 일종의 원형극장처럼 되어 있어서, 마이크 없이도 산위에서 소리를 치면 산 아래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담은 그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네 나무 이야기>입니다. 네 나무 이야기는 비유설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네 나무 이야기
어느 날 숲 속의 나무들이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영화롭게 해야 하므로, 이 직분을 놔두고 나무들의 왕 노릇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될 것을 요청하지만, 무화과나무 역시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버리고 내가 나무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요청을 하지만, 역시 포도나무도 “포도주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는 내가 이 일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역시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감람나무나,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5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여기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말은 ‘나의 지배를 받으라.’, ‘내가 너희들을 다스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시나무가 누구를 상징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아비멜렉이라는 못된 녀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네 나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가시나무는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혈연을 앞세워 주위 여론을 조성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정치자금을 모으고, 검은 돈으로 조폭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수많은 형제들을 죽인 후 왕위에 오른 아비멜렉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자신의 정적들을 다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결코 길지 않았습니다.
가시나무왕의 최후
26절을 보면 가알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어디에서 들었던 말 아닙니까? 가알은 전에 아비멜렉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로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겜은 하몰의 땅이었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하몰의 후손을 섬겨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출신인 아비멜렉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동안 아비멜렉을 추종했던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이번에는 가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아비멜렉의 부하 스불은 자기 상관인 아비멜렉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세겜 성을 공략하여 가알을 죽이고 거기에 있는 세겜 성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세겜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소금을 뿌렸다는 것은 영원히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망대로 올라간 세겜 사람들을 불로 태워 죽였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데베스라는 곳에 가서 진을 치고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망대를 불사르려 하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5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망대에 위에 있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그의 두 개 골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은 아버지를 배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자기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압살롬의 죽음과, 헤벨의 아내 야엘이 내리친 말뚝에 죽은 시스라의 죽음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에 속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죽어가면서 보여준 마지막 행동입니다. 54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지라.” 이것은 웃지 못할 장면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는 것이 창피하여 두개골이 깨어져 죽어가면서도, 자기 옆에 있던 부하에게 칼로 찔러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후세에 남길까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사사기 9장은 이와 같이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록하며 끝내고 있지만,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
첫째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요담이 비유로 들은 네 가지 나무 중 감람나무를 보십시오. 감람나무는 기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나무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다릅니다. 가시나무는 건물을 짓는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벽난로에 집어넣어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화목(火木)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굳이 가시나무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남을 찌르는 일입니다. 찔러서 피 흘리게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숲 속의 모든 나무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의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아비멜렉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왕위에 오를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권을 잡았습니다만, 결국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분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인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파트나, 악기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제2바이올린입니다. 왜냐하면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제1 바이올린과 같은 열정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과거에 들은 바에 따르면, 우리가 오케스트라를 볼 때, 왼쪽 첫 부분에 제1바이올린,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등 작은 악기부터 큰 악기 순으로 앉습니다. 그리고 현악기 뒤에는 관악기가 앉습니다. 그런데 청중이 보는 방향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악장이라고 부릅니다. 악장은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주를 잘하는 순서에 따라서 앉습니다.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이 앉는데, 이 자리가 언뜻 보아서는 매우 애매한 자리입니다. 제1바이올린이 멜로디를 주도하는데 반해, 제2바이올린은 제1바이올린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제2바이올린을 다루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멜로디를 주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제2바이올린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케스트라가 구성될 수 없고 결국에는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멋있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1바이올린만큼 중요한 것이 제2바이올린입니다. 소프라노가 멜로디를 주도합니다. 그렇다고 합창에서 소프라노만 중요하고 알토는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프라노 못지않게 알토도 중요합니다. 알토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름다운 화음의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가장은 가장으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목사는 목사로서의 독특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이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허구헛날 카지노나 출입하며 있는 돈 없는 돈 날리고 다니고, 가정주부가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춤바람이 나서 밤마다 나돌아 다닌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 파탄이 나지 않겠습니까?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당구장만 출입하고 밤새도록 인터넷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학생의 인생 뻔한 것 아닙니까? 목사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연구하지 않고, 목회는 하지 않고 놀러만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목사를 삯꾼 목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있는 자리가 별로 빛이 나지 않아도, 내가 맡은 일이 탐탐치 않게 보여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가장 좋은 때에 여러분들을 더 귀한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분명한 원칙을 세우라
본문은 둘째로 분명한 원칙을 지키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혈연과 지역감정과 검은 돈을 이용한 그의 계략 때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세겜 사람들의 협조도 일조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협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거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비멜렉의 잘못도 문제지만, 백성들의 잘못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세겜 출신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아비멜렉을 지지 했습니다. 더구나 돈으로 조폭들을 매수하여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때려죽인 사람을 왕으로 떠받든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정의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다스릴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97년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씨의 인기는 대통령 선거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분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으로 엄청나게 많은 정치자금이 몰렸습니다. 그 분 스스로 대통령이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대통령처럼 행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대통령선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감사원장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에 보여준 ‘원칙주의자’라는 고유의 장점을 잃어버렸습니다. 대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인 것이 그의 인기가 폭락한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그 동안 ‘법대로’를 외치면서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분의 인기가, 표 좀 얻겠다고 전직 대통령 사면론을 들고 나오면서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결정타를 맞은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원칙의 중요성입니다. 환경과 상황에 이끌리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저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아비멜렉의 말에 현혹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원칙이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까?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은 변하여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원칙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저에게는 목숨 걸고 붙잡을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말씀의 원칙입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의 원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원칙을 고수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인 이 성경을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을 기억하라
본문은 세째로 마지막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대권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다시 말하면 그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고작 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는 왕위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과 24절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누가 아비멜렉을 망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형제들에게 행한 죄 값을 물으시고, 그가 형제들을 죽일 때 보았던 피 값을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또 본문 마지막 56절과 57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참한 죽음은 무고한 70명을 악한 방법으로 죽인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큰 속성이 있습니다. 꼭 동전 양면과 같이, 한 면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공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자에게는 의로움으로 상을 주시지만, 불의한 자에게는 불의함으로 심판하십니다.
찰스 베어드라는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에게 하루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사람들을 멸한 때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교만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했는가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역사의 면면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항상 남겨 둔 자가 있고, 그루터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갈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집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계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계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계산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에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살았던 아비멜렉과 같은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는 분명히 우리의 삶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답게 자리를 지키고,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