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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74)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2)
"존명!"
구지경은 납작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전 세가 동원령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천붕오천멸살계는 귀광두와 주하연, 남
천벌을 하나로 묶는 선에서 끝나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주를 향해 직언을 할 수가 없다. 남천벌 무인
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를 가주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
보다 그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덕삼(德三)을 데려와라."
"쌍륜마왕(雙輪魔王) 말입니까?"
구지경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쌍륜마왕은 이곳 회하에서 암약
하고 있는 수적(水賊)의 무리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수적이라 하여 만만히 볼 자들은 결코 아니다. 장강(長江)을
기준으로 중원이 남북으로 갈리자 활동 공간이 좁아진 그들은 산적 집
단인 녹림(綠林)과 연합을 시도하였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녹림수
로채(綠林水路寨)라는 방파로 탈바꿈하였다.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고, 각자가 별개인 것처럼 활동하고 있어, 위
협적인 존재는 아니어도 그들의 잠재력만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심지어 녹림수로채를 접수한 곳이 중원의 주인으로 등극할 거라는 소
문마저 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북황련이나 남천벌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
다.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도
적 집단인 녹림수로채와의 연계는 득보다 실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런데 만철은 녹림수로채 일파인 회하채의 채주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그렇다 쌍륜마왕이다. 왕류(往流)에서 만나자고 해라. 나가 봐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구지경이 밖으로 나간 후, 아들 만자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만철은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놈! 기회가 생기면 죽일 테다.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네 놈을
죽이고 말겠다."
선수(船首)에 용머리를 달고 있는 적룡호를 노려보며 만철은 짓씹듯
말했다. 놈을 죽이는 건 북황련 방침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북황련 방침 따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들의 복수, 우선 먼저 해야할 일이었다.
만철이 적룡호를 보며 살기를 흘리고 있는 그 시간, 백산은 지저사
령계를 나온 이래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적룡호에 오르자마자 목욕을 하고 산뜻한 백삼으로 갈아입자 전신에
서 귀티가 줄줄 흘렀다.
입에서 흘러나온 쌍소리만 빼면.
"니미럴……. 이건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탁자에 앉아 열심히 화선지에 먹물을 찍어대던 백산은 얼굴을 찌푸
리며 투덜거렸다.
화선지 위에 비뚤비뚤 쓰여진 글자, 알아먹기조차 힘들지만 천자문
이 분명하다.
"유몽, 한번만 더 이빨 보이면 입으로 먹을 갈아야 할거다."
"흡!"
백산 곁에서 먹을 갈고 있던 유몽은 애써 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화선지를 외면한 채로 웃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제자들
과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그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그들 또한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나 참! 글 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 세상에, 땀까지 나잖아."
붓을 내려놓은 백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혼잣말을 했다.
비도를 이용하여 쓸 때는 별 것도 아니었는데 붓을 쥐고 쓰기 시작하
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흘러내리듯 미려하게 빠져야할 획은 뭉툭하게 번졌고, 멈춰야할 지
점에서는 길게 늘어지는 획이 속출했다. 글은 정신을 집중한다고 하여
써지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글을 모르십니까?"
어느 정도 웃음기가 가시자 유몽은 넌지시 물었다. 글을 모른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을 가진 그가 아닌
가. 글을 모르는 사람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이라 여겨졌다. 내공심법이며 초식은 대부분 글로 서술되어 있다.
스스로 무공을 창안하여 익히지 않은 이상 글을 모르면 익힐 수 없
는 게 무공 아닌가. 설령 무공을 창안했다해도 삼라만상의 이치를 알
아야만 가능하고, 그러기 위해선 글을 알아야 한다.
"지금 무식한 놈이 힘만 세다고 비웃는 거지?"
"아이고, 주공. 그럴 리가 있습니까. 글을 모르면 무공을 익힐 수
없으니까 그런 거지요."
"난 물론이고 내 동생들 누구도 이름조차 쓸 줄 아는 놈이 없었어
임마. 그런데도 전부 심검을 성취했어."
"설마……."
유몽을 비롯한 잠영루 살수들은 입을 쩍 벌렸다. 심검이라니. 백산
의 모습으로 보건대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심검이 무슨 동네 똥개 이름도 아니고 아
무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질 않는가.
한두 명도 아닌 동생들이 죄다 이름조차 쓰지 못한다니.
"이런 무식한 놈 봤나. 네 다리를 고쳐준 게 머리통 속에 든 글이었
더냐? 십 년 동안 내리 파도 못 고친 다리를 두 달도 안 돼 고쳤잖아.
글을 아는 것하고 무공은 상관없어 임마."
"그래도……."
"이런 썅! 그래도 천자문은 익혔어. 붓으로 쓰질 못해서 그렇
지."
팍 인상을 쓴 백산은 천자문을 익혔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이 오른
쪽 벽을 향해 발을 슬쩍 들어올렸다.
슉!
그의 오른 발에서 백색 광채가 일렁이자 일순 실내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허억!"
해쓱해진 유몽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방금 백색 광채가 일렁였던 벽
면을 보았다.
빙(氷).
오른쪽 벽면에 새겨진 글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글이 쓰여졌다면 유
몽을 비롯한 잠영루 살수들은 지금처럼 놀라지 않았을 터였다.
빙자가 새겨짐과 동시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냉기가 선실 안에 들어
찬 것이었다.
"세상에 무슨 무공이……."
손에서 먹이 떨어져나간 사실도 알지 못했다. 50평생을 무공에 매진
했고, 익히진 않았더라도 누구보다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무공 중, 단순히 글을 새기는 것으로 어떤 기운을
만들어 내는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한번만 더 입을 벌리면 네 머리에 사(死)자를 박아버릴 테니까 알
아서 해."
"오빠! 이거……! 괜히 가져왔잖아."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선 주하연은 들고 있던 뭔가를 한편으로 내려
놓으며 낮게 투덜댔다.
"뭐냐 그건?"
"더울까봐 얼음 만들어 왔지. 오빠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네?"
"잘됐다, 그걸로 빙수나 만들어 먹자. 사양선, 너 쾌검 쓴다고 했
지? 이 얼음 눈처럼 만들어 그릇에 담아와. 손은 쓰지 말고 검으로 해
야한다."
"알겠습니다, 주공."
사양선은 곤혹스런 얼굴로 얼음을 집어들고 한 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무공을 전부 끄집어내도 얼음을 눈처럼 만들 방
법은 없다. 무공수련의 일환으로 한 말인 줄은 알겠지만 무슨 수로 얼
음을 눈처럼 만든단 말인가.
"끄응! 일단 해보긴 해야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하라고 했으니까."
낮게 신음을 내지른 사양선은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얼음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리고 얼음을 향해 막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검이 느리면 마찰열로 눈이 녹지만, 검이 빠르면 눈은 잘린다는 걸
명심해라. 그리고, 바닥에 물방울 생기면 네 혓바닥으로 치워야 하니
까 조심하고."
백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저건 눈이 아니고 얼음이라고."
여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주하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뗐다.
검이 빠르면 눈이 녹지 않는다는 의미는 알겠는데 사양선이 허공으로
띄워 올린 것은 눈이 아니고 얼음이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발검에 3푼의 공력을 싣고, 기검에 2푼 그리고 나머지 5푼의 힘은
평검에 써라. 가장 빠른 쾌검을 쓸 수 있는 비결이다."
이번엔 잠영루 살수 전부가 몸을 떨었다. 지금껏 쾌검의 요체를 발
검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발검에 모든 힘을 집중하면 나머지 동작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배웠다.
지금껏 배워왔던 무론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틀어쥔 사양선은 뚝뚝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얼음을 노
려보았다. 백산은 단순한 자르기만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일수에 수십 번의 칼질을 원하고 있다. 얼음의 특성상 쾌검으로 잘
라낸다 하여도 다시 붙어버릴 게 분명하다. 찰나의 순간에 눈처럼 만
들어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유몽사부의 성명절기인 비폭환류(飛瀑幻流)를 완성해야만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경지였다. 바로 이것이 백산이 원하는 바였다.
"근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얼음 덩어리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긴 사양선을 힐끔거리던 주하연
은 탁자위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여기 저기 얼룩진 먹물로 탁자 위는 엉망이었다. 검어진 백산의 손
을 보건대 그가 탁자를 지저분하게 만든 장본인임에 분명했다.
"응? 으응! 나도 좀 유식해 보이려고……. 그런데 생각처럼 안 되
네?"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빤 글을 알기는 하는데 쓸 줄 모른다 이거지? 어째 힘
깨나 쓰더라니."
괴발개발 갈려놓은 글을 보며 주하연은 피식 웃었다. 완벽하게만 보
였던 백산에게서 의외의 약점을 발견하니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그럼 저건 뭐야?"
애써 표정을 감추며 주하연은 오른 쪽 벽에 쓰여진 글자를 가리켰
다. 허연 서리가 끼어있는 그것은 어름 빙(氷)자가 분명했다.
"그게 칼로는 되는데 붓으론 안 돼 그 모양이야. 그래도 형님인데
녀석들보단 나아야 할 거 아니냐."
"혹시 살우 아저씨 일기 때문에?"
"살우 글은 글도 아냐. 모사나 섯다 녀석의 글을 보니까 기절하겠더
라. 내가 누워있는 동안에 지들만 글을 배웠던 거지. 나쁜 새끼들."
"형님 노릇 제대로 하려고 붓을 배우겠다 이 말이에요?"
"붓말고 글이다, 글."
"킥킥! 백산 아저씨, 원래 글 쓰는 법을 배운다는 걸 고상한 말로
붓을 배운다고 하는 거예요."
주하연을 따라왔던 홍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가까스로 말
을 이었다.
"그래 홍아 너 잘났다. 잘난 줄 알았으니까 가서 네 일이나 보셔.
난 붓 말고 글 쓰는 법을 배울 참이니까."
홍아를 흘기던 백산은 다시 붓을 들고 탁자 위를 노려보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즐독 입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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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즐독.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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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