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묵상했던 책이 바로 주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세종대왕이 집현전학자들과 함께 주역에 괴사를 토론하며 국정의 해법을 찾았던 수많은 순간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독방 변방에서 여진족의 도발이 거세지며 조정이 정벌론과 신중론으로 나뉘어 격렬한 살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대신들은 당장 대군을 보내 북방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하 오랑캐들이 우리 국경을 넘어 백성을 해치고 있나이다. 당장 정의 대군을 보내 저들의 기세를 꺾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세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정연 자리에서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 모은 세종은
주역에 48번째 괴인 정괴
곧 우물에 관한 괴상을 나직하게 읊조렸다.
우물은 마을을 바꾸어도 우물 자체는 바꾸지 못하며
아무리 퍼내어도 줄지 않고
채워도 넘치지 아니한다.
그러나 두레박줄이 짧아 밑바닥에 닿지 못하거나
두레박이 깨지면 도리어 재앙이 되느니라.
세종은 성급하게 군사를 움직이려던 대신들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언젠이란 국가의 명흔이 걸린 일이다. 준비가 완벽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군사를 내는 것은 두레박줄이 짧은 줄도 모르고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는 것과 같다. 때가 물을 익을 때까지 내실을 다지고 북방의 진지를 구축하며 사군 육진의 기틀을 완벽하게 세운 뒤에 나아가도 늦지 않다.
최종에게 주역은 맹목적인 점수를 아니었다.
정치가로서 자신이 빠지기 쉬운 오만함과 조급함을 경계하고
국가라는 거대한 배를 이끌 때 가장 객관적이고 현명한 시점 곧 때에 꼭 맞게 첫이 나는 시중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정밀한 국정 운영 지침서였다.
인재를 등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신분과 파벌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발탁할 때
주역의 11번째 귀인 테크의 구절을 인용하곤 했다.
너그러움으로 품고 강을 건너듯 용기를 내며 먼 곳을 버리지 않고 패거리를 짓지 아니하면
중용의 도를 지켜나아갈 수 있느니라.
노비 출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을 발탁하여 경물 취지의 조정을 만들고 집현전을 통해 젊은 인재를 길러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바로 세종이 주역을 통해 배운
포용과 균형의 통치 철학이 깊게 깔려 있었다.
왕조의 치열한 권력 암투 속에서도 세종은 주역을 통해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높이는 성군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왕들의 통치하기로 학자들을 구원서였던 주역이 마침내 후대 동양의 문명 전체에 남긴 사상적 파장 과연 얼마나 거대했던 것일까?
유리의 어두운 감옥에서 시작되어 춘추 전국의 전장을 거치고
공자의 위 편 삼절과 정약용의 유배지 골방 그리고 세종대왕의 정전에 이르기까지 주역이라는 3000년의 거대한 서사는 단순한 고대 점술서의 한계를 넘어 동양의 정치 사회 과학 그리고 예술 전반을 관통하는 거대한 사상의 물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손에 쥔 이 위대한 주역은 어느 한 사람이 홀로 완성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주역은 아득한 세월에 걸쳐 세 명의 위대한 성인의 손을 거치며 비로소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후대의 학자들은 세성인의 손을 거쳤다는 뜻으로
인경 삼성이라 불렀습니다.
다시 먼저 아득한 상고 시대의
복희 씨가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의 이치를 깊이 관찰하여 음과 양이라는 두 기후로 여덟 가지 기본 궤 곧 8궤를 처음으로 그어냈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근본질서를 8개의 상징으로 압축해낸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은나라 말기에
섭외 기창 곧 훗날의 문헌이 유리의 감옥에 갇힌 채 이 팔괴를 위아래로 두 개씩 겹쳐 예순 4개의 궤로 확장하고 각 그의 전체 뜻을 풀이한 괴사를 붙였습니다.
이어서 그의 아들 주공이 각 궤를 이루는 여섯 효 하나하나에 세밀한 불인 효사를 덧붙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문황과 주공 두 부자의 공을 하나로 묶어 새 성인 가운데 한 자리로 헤아리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수백 년이 흐른 뒤 공자가 이 간결하고 비밀스러운 경문의 열 가지 철학적 해설 곧 시빅이라는 날개를 달아주면서 주역은 점술서를 넘어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불멸의 철학서로 거듭났습니다.
다만 이 복희와 문항 주공과 공자로 이어지는 계보는 어디까지나 오랜 세월 전에 내려온 전통적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주역을 어느 한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 수많은 세대에 걸쳐 축적된 전복의 기록들이 오랜 세월 편집되고 다듬어지며 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분명한 사실은 주역이 단 한 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고뇌와 지혜가 켜켜 있어요. 완성된 책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완성된 주역이 후대 문명에 남긴 가장 위대한 철학적 유산은 바로 궁지통 곧 막힘이 극에 달하면 변화가 시작되고 그 변화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통한다는 사유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주역 대사전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차물의 운행이나 인간의 삶이 벽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한 종말이자 비극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하지만 주역은 그 절망의 벽이야말로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가장 위대한 변화에 시작점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물극 필반 곧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 기운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법칙은 동양 특유의 유연하고 냉철한 세계관을 형성했습니다. 한밤중에 어둠이 가장 짙게 매립 깔리는 그 순간이 바로 동력해해가 떠오르기 직전이 된 음 양해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장 깊은 음의 계절 속에 이미 새로운 양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이치입니다. 이러한 주역의 세계관은 동양의 의학과 과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건강을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으로 바라보았으며 어느 한쪽의 기운이 지나치게 치우치면 병이 되고 그 균형을 되찾을 때 비로소 치유가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현대 물리학과 서양 철학 역시 주역의 정교한 음양 대립과 상호작용이 있지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심리학자 칼융은 주역의 괴상과 인간의 무의식이 연결되는 동시성 이론을 연구했고 이진법을 완성하여 현대 컴퓨터 문명의 초석을 놓았던 수학자 라이프니츠 역시 주역 64개의 음과 양 기후 조합에서 완벽한 이진법 숫자 체계를 발견하고 깊은 경외감을 표하기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라이프니츠가 감탄했던 그 64개 배열도가 실은 복희 씨가 아니라 송나라의 학자 소웅이 정의한 것을 예수의 선교사 부배가 그에게 전해준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3000년 전 바닥에 그어진 긴 막대기와 끊어진 막대기라는 두 가지 단순한 기후가 오늘날 첨단 디지털 문명의 0과 1이라는 정보 체계와 놀라울 정도로 궤를 같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역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사유의 무게는 과학적 도시나 신비로운 예언에 있지 않습니다. 주역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간이라는 존재가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위기와 절망 그 피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바로 서게 만드는 인간 구원의 서사시였습니다. 폭군의 칼날 아래에서도 억울한 유배지에서도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는 전장 속에서도 주역을 집어든 자들은 미래의 복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역이라는 거울을 통해 지금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물러서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 곧 때를 아는 자로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켜냈습니다. 이제 이 3000년의 여정이 남긴 마지막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볼 차례입니다. 300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의 풍상을 견뎌내며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와 헤아릴 수 없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지켜보아온 위대한 유산 주여 그 길고도 긴 서사의 여정이 마침내 오늘 우리의 삶 앞에서 잔잔한 울림으로 머물러 섭니다. 그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 가장 절박하고 외로운 순간마다 주역의 책장을 넘겼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결코 막연한 미래를 점쳐. 요행을 바라거나 하늘이 내려주는 요술 같은 복을 구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역 속에서 마주한 것은 어쩌면 거창한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변화의 거센 파도 앞에서 요동치는 자기 자신의 정직하고도 쓸쓸한 내면의 얼굴이었습니다. 주역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가슴 깊은 시에는 인생의 그 어떤 길도 영원히 순탄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 어떤 절망의 나락도 영원히 갇혀 있지 않는다는 우주의 지극히 당연하고도 냉철한 이치입니다. 지금 아무리 눈부신 성공과 권력의 최정상에 서 있다. 한들 오만함에 빠져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그 태평함은 머지 않아 참혹한 비극의 괴로 변하고 맙니다. 반대로 지금 내 삶이 아무리 도망칠 곳 없는 절벽 끝에 서 있고 앞길이 사방으로 가로막혀 캄캄한 어둠뿐이라 할지라도 결코 절망하거나 스스로를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역의 이치에 따르면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해 가슴이 저미는 그 절망의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빛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양의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전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저마다의 수많은 선택과 결정이라는 이름의 산가지를 던지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64개의 궤를 넘어 스스로 써 내려가는 삼백여덟네 개 정직한 줄그린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 궤를 지나고 있습니까? 찬 위에 물이 있어 정면에 길이 막혀 버린 건괴의 한가운데 서 계신가요? 아니면 캄캄한 땅 속 깊은 곳에서 동짓날에 따스한 햇볕처럼 새로운 희망의 우례를 준비하는 복귀의 순간을 지나고 계신가요? 어떤 위치에 서 있든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바람이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가물이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솟구치듯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엄과 바른 태도를 지키는 자에게 세상에 그 어떤 흉괴도 결코 삶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3000년에 거친 세월을 건너온 주역의 서늘하고도 따스한 지혜가 오늘을 견뎌내는 당신의 고단한 어깨 위로 깊고 정직한 위로의 빛이 되어 내리게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책밤이었습니다. 오늘도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