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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75)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3)
"홍아야 너 내 선실에 가서……. 아니다 내가 갔다 와야겠다."
다시 글 쓰기에 집중하는 백산을 지켜보던 주하연은 무엇인가 생각
난 듯 재빨리 선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선실로 들어온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책이 들려 있었
다.
"오빠 내가 글 쓰는 법 가르쳐 줄게. 글도 무작정 쓴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요."
백산 곁으로 바짝 다가앉은 그녀는 들고 왔던 책의 첫 장을 넘겼
다.
"우선 어떤 글씨첸지 대강은 알아두어야 해요. 서체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이 정도구요, 우선 전서는 진한 시대 이전에 쓰였던
글을 말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오빠의 도인 혈월에 새겨진 갑골문도
전서체의 한가지라 할 수 있어요."
전서에 대해 설명하던 주하연은 한쪽에 놓인 혈월을 가리켰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하지만 백산은 장황한 설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
파 왔기 때문이다.
"글 배우는 데도 그렇게 많아 알아야 하냐?"
백산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쉬운 게 어디 있다고, 천자문은 뗐다면서요."
"천자문도 배우고 싶어서 배운 게 아니라 천비(天匕)를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 배웠던 거야."
"오빠! 무식한 건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니란 말 몰라요? 잔말말고
듣기나 해요."
엄한 눈으로 백산을 향해 일침을 놓은 주하연은 다시 서체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지겨워 죽겠다는 듯이 꾸벅꾸벅 졸며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던 백
산은 영자팔법(永字八法)이란 소리가 들려오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영자 뭐라고?"
"쳇! 졸고 있었어."
백산의 허벅지를 슬쩍 꼬집은 주하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해서(楷書)의 기본적인 필법을 갖춘 문자로 영(永)자가 있는데, 이
영자를 쓰는 기법을 가리켜 영자팔법이라 하는 거예요. 붓 줘봐요."
백산의 손에서 붓을 낚아챈 주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영자를 써 내
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측(側)이라 부르는데요, 점이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데서
유래했어요. 그리고 이건 늑(勒)이라 불러요. 한 일(一)자와 같이 옆
으로 긋는 획을 쓸 때 대부분 응용되는 기법이에요. 글 쓰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한 일자 하나만 제대로 쓸 줄 알면 나머지 글자는 절로
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획이에요."
"횡소천군(橫掃千軍)!"
횡으로 그어 가는 주하연의 모습에 백산은 낮게 웅얼거렸다. 붓을
힘있게 끌어가다 멈추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검법을 시전하는 모습처
럼 보였다.
"직도황룡(直刀黃龍)!"
이번엔 붓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흐르다가 갑
자기 폭발할 듯한 힘을 발산하는 그녀의 모습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흰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영(永)자 하나에 무수한 힘의 경로가 숨어 있었다. 그녀의 손목위로
드러난 근육들은 무섭게 꿈틀거렸다.
활을 당기는 사냥꾼의 모습, 말에 채찍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를 빗어 내리는 모양을 보았고, 새가 모이를 쫓는 모양을 보았
다.
그리고.
영자 필법의 마지막에서 피(血)를 보았다. 가볍게 힘을 넣어가다가
점차 힘을 더해 이윽고 쭉 빼는 모양새는 분명 고기를 자를 때와 일치
했다.
탁!
"왕희지는 이 한 자를 15년 동안 썼데요."
"왕희지? 그 사람이 살았을 땐 글 쓰는 것도 직업에 해당했냐?"
"그게 아니고, 먹고사는 것 따윈 걱정 없었던 사람이었어요."
주하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의 중요성을 말하려
고 했는데 백산은 다르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할일 없는 놈!"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서예가이자 행서 해서, 초서를 예술의 경지까
지 끌어올린 왕희지에 대한 백산의 평가였다.
하지만, 왕희지 정도는 아니더라도 글 쓰는 법 정돈 알아야하기에
진땀을 흘리며 주하연의 설명에 집중했다.
붓을 잡는 법과 힘을 줘야할 때와 빼야할 때를 배우고 있자니 시간
은 금방 지나갔다.
"사양선, 얼음으로 제사 지내냐?"
온통 검은 먹물로 범벅된 백산은 여전히 얼음을 노려보고 있는 사양
선에게 건성으로 말을 건넸다.
제 머리만 했던 얼음이 주먹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양선은 몽류
(夢流)를 뽑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으니 답이 안 나오지."
오른 손을 들어 혈월을 끌어당긴 백산은 사양선 곁으로 다가가며 천
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느릿한 동작으로 시작했던 혈월의 움직임은
어느 순간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빨라졌고, 얼음 아래쪽으로 눈이 쌓여
갔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면 되는 거야. 허공섭물로는 얼음을 붙잡고,
칼로는 잘라내란 말이다. 허공섭물로 얼음을 잡을 땐 손에 힘을 빼고,
칼질을 할 때는 허공섭물을 멈추는 거야."
"으음!"
유몽을 비롯한 잠영루 살수들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할지라도 매 순간마다 본인의 최고
힘을 뽑아낼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무공을 약하게 시전
하며 내기를 조절해야 하는데, 그 때가 바로 허점이 되는 것이고, 살
수인 자신들이 노리는 시점이다.
한데 백산은 내기를 조절하는 그 시간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안되겠다. 니들 밧줄 하나씩 들고 따라와."
여전히 고민스런 얼굴로 앉아 있는 일행을 향해 짤막하게 말한 백산
은 먼저 선실을 나섰다.
"주공! 왜 저까지……."
유몽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밧줄을 준비하여 선미 쪽으로 오기는
했으나 백산이 무슨 일을 시킬지 걱정이 앞섰다.
"왜는 임마, 수영 가르쳐 주려고 그러지. 각자 밧줄을 몸에 묶고 물
속으로 들어간다. 먹고 마시는 건 물론이고 싸는 것까지 전부 저 속에
서 해결해, 실시!"
"주공!"
유몽은 울상을 했다. 내공도 없는데 물 속에 들어가서 뭘 어떻게 하
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암담하기만 했다. 더구나 제자들과 함께 움직
여야 하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백산의 말에 밧줄을 질끈 동여맬 수밖에 없었다.
"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놈은 밖으로 나와도 된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풍덩!
자신의 분신처럼 되어버린 혈월을 들고 유몽은 물 속으로 몸을 던졌
다. 그를 따라 다섯 제자들도 동시에 몸을 날렸다.
곧이어 선미에 묶인 여섯 개의 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여태 백산을 지켜보고 있던 주하연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하긴 저 놈들 물 먹이려는 거지. 노느니 염불한다고 우린 얼음이
나 만들어 볼까?"
"얼음?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입을 삐죽 내민 주하연은 빽 소리를 질렀다. 잠영루 살수들을 물 속
으로 밀어 넣는 것도 부족해 이제는 얼음이라니. 도무지 백산의 의도
를 모를 일이었다.
"머리 좋은 녀석이 왜이래 이거. 저 놈들이 익힌 무공이 뭐냐?"
"그야 월영은둔술하고 비폭환류……. 아! 월영은둔술을 완성시키기
위해서구나."
그제야 주하연은 활짝 웃었다. 월영은둔술이 가장 강점을 보일 수
있는 곳은 대기중이다. 액체인 물 속에서는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
하여도 물살이 생겨나기에 은신술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살마저도 본인의 통
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아, 저 놈들이 물이 된다면 월영은둔술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
겠지. 이 줄들이 힘을 잃고 저기 보이는 물살이 사라져야만 놈들은 밖
으로 나올 거야."
하고 소용돌이처럼 조그맣게 생겨나는 물결을 가리켰다.
"근데 얼음은 왜?"
"얼음? 그건 비폭환류를 익히는 보조물이라 보면 된다. 시작해 볼
까."
싱긋 미소를 지은 백산은 선미 난간에 다리를 걸치고 앉은 채로 오
른 발에 있던 빙천비(氷天匕)를 아래쪽으로 쏘았다.
"우선은 둥근 모양부터 시작하자."
슬쩍 내기를 운용하자 빙천비로부터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며 강물
을 얼리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공처럼 생긴 얼음 덩어리들이 잠영루
살수를 향해 흘러갔다.
"재밌는데? 근데 난 오빠처럼 둥근 모양을 만들 수 없는데 어쩌지?"
"대충 만들어 보내, 많이만 보내면 되니까."
"그럴까?"
고개를 끄덕인 주하연은 백산 곁에 걸터앉아 물을 향해 빙천수라마
공을 쏘아댔다. 그녀의 양손에서 쏟아져 나온 백색의 빙백강기가 강물
을 강타할 때마다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이 무더기로 생겨나고 이내 물
결을 타고 흘러갔다.
"우리 동백산에서 밥 먹을 때 했던 놀이 있지? 그런 식으로 얼음을
조정해서 녀석들에게 보내."
"좋아! 나도 얼음 모양을 마음대로 만들 때까지 할거야. 이야합!"
주하연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지자 수면에 둥둥 떠 있던 얼음
들이 빠른 속도로 잠영루 살수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 또한 얼음 만드는 작업을 수련의 일환으로 여기는지 제법 신중
한 얼굴로 내기를 쏘아냈다.
"녀석들 고생 좀 해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살수들을 보며 백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제길……, 뭐야 이거."
사양선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물 속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
도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겨울도 아니고 무더운 여름이 아닌가.
백산의 말처럼 물살을 느껴보기 위해 눈을 감아보기도 하였고, 이리
저리 움직이기도 해보았다. 눈을 돌려 동생들을 쳐다보는 여유까지 만
끽하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면으로부터 커다란 덩어리들이 무차별하게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이내 그것들이 얼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무공을 가르치고자 하는 백산의 의도를 알아차린 사양선은 몽류를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선실에서 백산이 말했던 쾌검의 원리를 생각하
며 얼음 덩어리를 베어내기도 하였고, 주먹으로 쳐내기도 했다.
때로 몸을 피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였으나 얼음 역시나 쉬지 않고 부
딪쳐왔다. 처음 둥근 모양으로 떠내려왔던 얼음덩어리는 어느 순간부
터인가 날카로운 모양으로 변하더니 크기마저 줄었다.
단순한 얼음덩어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무기로 돌변한 것이다.
고개를 돌려 사부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
았지만 그곳은 다른 쪽보다 물살이 거칠었다.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물에 떠 있기도 힘들 터인데 사부는 얼음을
피하며 용케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불쑥 오기가 생겼다.
"사부도 하는데, 몸이 불편한 사부도 하는데. 비폭환류(飛瀑幻流)!
첨(尖)!"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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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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