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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3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탈출 32,7-14
복 음 : 요한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오늘의 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요한 5,3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지혜롭다는 자들” 또는 “슬기롭다는 자들”(마태 11,25)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며 깨달은 지식은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대신
그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탐닉하게 하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11,25) 까닭은
교만한 지식이 아니라 겸손한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따라오는 사람들의 칭송에 우쭐해진 나머지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없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에
그들이 듣는 수많은 소리 가운데 무엇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그들이 보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연구하던 성경의 말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마주하고도 알아 뵙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가장 바른 자세는 바로 하느님을 향한 겸손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지닐 때, 성경은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시험 성적표가 나왔다면서 성적표를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1등부터 10등까지는 우수한 성적이라면서 이름을 부르며 칭찬해 주셨고,
아이들은 축하의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저의 등수는 10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반은 70명이었기에 그중에서 10등 한 것은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뛰어갔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께 자랑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 친구가 와 계셨고,
저는 그 앞에 성적표를 내놓으며 10등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친구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공부를 잘 하지는 않는구나?”
제 위의 형, 누나 성적을 잘 아시는 어머니 친구였기에
10등은 못 하는 것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 뒤에 60명이나 있는데도 못한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1등이 아니면 못 한 것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때의 성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임을 많은 경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또 이를 위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잘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너는 대단해. 오늘도 해낼 거야.”
이런 힘이 되어주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힘을 빼는 말이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더욱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과연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당시 1등의 삶을 사는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하시지 않고,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면서 힘이 되어주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당신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했고,
그리고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메시아이심을 드러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삶은 전혀 실천하지 못하고,
그저 율법의 글자에만 얽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힘이 되어주는 말과 행동,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과연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분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듣고 싶어도 들려주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가 없고,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여주지 않으면 결코 볼 수가 없듯이,
드러내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계시가 있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응답이 없이는 또한 믿음이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거 하십니다.
먼저 알려주고, 계시해 주고,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들었고,
예수님 행적의 표징을 보았고, 성경을 연구하였지만,
혹 예수님을 알았을지는 몰라도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마음을 열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완고함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불신앙이라 부릅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할 때,
우상숭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완고함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받들어 섬기거나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황해져서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똑똑한 채 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 1,21-23)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외의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혼연일체가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따르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 사순절, 우리 마음 안에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완고함을 버리고,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조욱현 토마 신부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절)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37절).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절).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절).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신다(42절).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한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절)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에”(46절)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3월 8일 토요일입니다. 자매님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응급실에 있는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구역장 회의가 있었지만, 병자성사가 더 급하기에
총구역장에게 먼저 다녀온다고 이야기하고 응급실로 가기로 했습니다.
병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시 자매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님이 선종하였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고인의 마지막 모습도 보고, 가족들을 만나려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응급실에는 고인의 가족들이 와 있었고,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고인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고인께서는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매님은 저와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자매님의 전화가 있었기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고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누군가 싸우려고 하면 말려야 하고,
반대로 서로 협상하려고 하면 잘 연결해 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말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정신과도 연결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느님,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간청하며, 백성을 대신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싸움을 말리는"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를 모세가 중재하며 막아낸 것입니다.
우리도 주변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누군가 갈등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모세처럼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싸움을 부추기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라!"라고 외쳤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엄격하고 강한 사람이지만,
사실 그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너희는 끝났다!"라고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길을 닦고,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라!"라고 외쳤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느님과 백성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 다리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누군가에게 새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절망할 때,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중재자의 역할입니다.
역사 속에도 중요한 중재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헨리 키신저입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대를 보면,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위협 속에서 서로 으르렁거렸고,
중국과 미국은 철저한 적대 관계였습니다.
그때 키신저가 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요?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 대화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를 핑퐁 외교라고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피할 수 있도록 긴장을 완화했습니다.
이를 데탕트 정책이라고 합니다.
중동에서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평화 협정을 맺도록 도왔습니다.
정치는 물론, 우리 신앙과 삶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많은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싸우고, 친구 사이에서도 오해가 생기고,
직장에서도 경쟁과 갈등이 끊이질 않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 간에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싸움을 말리는 사람", 그리고 "화해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불길을 더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모세처럼 중재하고, 요한처럼 길을 닦고,
키신저처럼 대화의 장을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분쟁과 갈등을 십자가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나를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3-40)
1)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어라.”, 또는
“나를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인데, 겉으로만 보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증거와 증언들을 제시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당신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와 증언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지만,
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보아도, 또 어떤 증언을 들어도, 그 증거와 증언 자체를 부정합니다.
2) 믿음은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는
신앙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증명할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증명을 못 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을 마지막 날에 만드셨기 때문에,
천지창조를 본 사람이 없고, 본 사람이 없으니 증언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나는 믿는다.”는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
‘그날’ 부활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신앙에 대해서,
“나는 믿는다.”라는 말 외에는 더 할 말도 없고,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도 없습니다.
3) 33절의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였다.”라는 뜻입니다.
34절의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당신의 구원사업에 반드시 필요했던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요한을 미리 보내신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메시아다.”라고 선언하는 것보다
세례자 요한이 “이분이 바로 메시아시다.”라고 증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36절의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한다.”입니다.
여기서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활동을 가리킵니다.
설교와 병자 치유와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일들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수난, 죽음, 부활, 승천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4) 37절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는,
“하느님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지만,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입니다.
뒤의 14장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9절의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입니다.
믿음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구원과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옛날이야기’를 읽는 것이 될 뿐입니다.
언제나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는 사람은(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되고 구원과 생명에 도달하게 되지만,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공부만 하는 사람,
또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도만 닦고, 수행만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인생을 낭비하기만 할 것입니다.
물론 평생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지가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는 구원도 생명도 없습니다(요한 14,6).
신앙생활은 공부하는 생활도 아니고, 도를 닦는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뭔가 큰 업적을 남기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다고 해도,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한 채로 끝난다면,
그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 허무한 인생이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리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대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들을 나열하는데 공통점은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을 위한 마음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자리에는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위한 자리가 없고,
그분이 보내신 당신을 믿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우리도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하느님과 주님을 위한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 안에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겠지요.
베틀레헴 여관이 만원이어서 주님 머무실 방이 없었고,
출퇴근길 버스가 꽉 차서 내가 탈 여유가 없는 것처럼.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우리 마음의 여유가 왜 없는지 얘기하는데
현대인의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그래서
‘다른 이를 위한 자리가 없어 가난한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도 없으며’
그 결과로 현대인의 마음이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좀 다른 각도에서 얘기하렵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 대신 자녀가 차지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옛날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중시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자기애가 크기 때문이고 부모 사랑보다 자식 사랑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일까 자녀를 위한 미사가 대부분이고,
생미사든 연미사든 부모를 위한 미사 봉헌이 전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아니, 요즘 사람들은 부모가 아프면 걱정은 해도 기도나 미사는 드리지 않고,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후회는 해도 기도나 연미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을 위한 마음자리가 이렇게 저렇게 없어서
결과적으로 마음의 병들이 생기는 거라고 앞서 봤듯이 복음의 기쁨은 지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위한 마음자리가 없기에 마음에 병이 생기는 것이라면,
심리학에서는 마음 병의 이유를 다른 데서 찾겠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 없음이 병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자리엔 무엇이 있을까?
하느님을 위한 마음자리가 있을까?
그래서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믿지 못하는 건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어제 심판이나 판단, 평가는 생존과 관계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사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평가를 하려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평가를 위한 ‘증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무언가를 평가하려면 증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젊을 때는 판단해야 하는 게 많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이나, 직장, 혹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단은 인생을 좌우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고민합니다.
그러나 그 신중한 만큼 만족스럽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배우자를 선택하기를 정말 잘하셨습니까?
고해성사 때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 증거를 꼼꼼히 살펴보고 판단을 했을 텐데
왜 결국엔 배우자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분명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무시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 개츠비는
데이지 부캐넌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대할까요?
그는 믿지 말아야 하는 증거들을 무시했기에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이 개츠비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 군인이었을 때 데이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고,
전쟁 후 돌아왔을 때 데이지는 이미 부유한 톰 부캐넌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개츠비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막대한 부를 쌓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밤마다 파티를 엽니다.
개츠비의 이웃이자 이야기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데이지가 톰을 떠날 거라고.
오로지 사랑만으로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고.”
마침내 개츠비는 닉의 도움으로 데이지와 다시 재회하게 됩니다.
데이지는 처음엔 개츠비를 잘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결국 처음의 어색함을 지나, 두 사람은 다시 감정을 나누게 되지만,
개츠비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데이지”를 되돌리려 합니다.
그는 닉에게 단호히 말합니다.
“그녀는 톰을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언제나 나만을 사랑했어.”
그러나 데이지는 진실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내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나는 그땐 톰도 사랑했어.”
개츠비는 돈 때문에 자신을 떠났던 것, 자신을 잘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톰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다는 것 등의 증거들을 무시합니다.
자신의 사랑만 완전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데이지가 몰던 차로 인해 마틀드 윌슨이라는 여자가 죽게 되고,
그 사건의 책임을 개츠비가 대신 지게 되면서 벌어집니다.
그는 데이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아무 말도 없이 톰과 함께 집을 떠나버리고,
개츠비는 그녀의 전화만을 기다립니다.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전화가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여자가 그를 구해줄 거라고.”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고, 대신 마틀드의 남편인 조지 윌슨이 찾아와
개츠비를 총으로 쏘고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납니다.
개츠비는 끝까지 데이지를 믿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랑에 감동하고, 자신과 함께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안위와 사회적 지위, 안정된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개츠비가 모든 것을 걸고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그저 ‘잠시의 기억’에 불과했습니다.
닉은 결국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그를 이렇게 평합니다: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가 그토록 순수하게 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실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뿐’입니다.
데이지를 사랑하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의 심연에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마치 나폴레옹처럼 자기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대부분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옳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해 가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 자신은 ‘뱀’으로 표현됩니다.
뱀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다니 될 말입니까?
겸손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뱀이 하는 수많은 잘못된 판단을 통해 배워나가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옳을 수 없다는 것을.
증거를 통해 올바로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까?
아이에게 진리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옳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시키는 일은 잘 따라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쉽게 믿습니다. 그리고 올바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을 잠깐 보고 판단할 때 그 판단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굳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교만해지니 문제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자기 자신이 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앤터니 플루(Antony Flew, 1923–2010)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 철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주장을 이끌었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찍이 1950년대에 발표한 논문 「신학과 반증(Theology and Falsification)」은
“신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반증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라고 말하며,
이후 수십 년 동안 무신론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은 과학과 이성에 반한다”는 확신 속에서,
신앙을 가진 철학자들과 수 차례 공개토론을 하며
신의 존재를 반박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플루는 단순한 이론적 무신론자가 아니라, 매우 고집스럽고 철저한 논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나는 항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다”라고 말하며,
철저하게 ‘증거에 따라 사고하라’는 과학적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가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공공연하게 무신론을 전파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삶이 후반부에 보여준 변화를 세상은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04년, 이미 81세의 고령이 된 플루는 전 세계 철학계를 놀라게 할 선언을 합니다.
그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의 증거를 보며,
우주의 기원과 생명체의 복잡성을 단순한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하느님(personal God)이라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첫 원인(First Cause)”
혹은 “우주의 지성(intelligent mind)”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고,
이를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신론적 신앙(deism)”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플루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학적 진보와 철학적 성찰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DNA의 구조와 복잡성, 우주의 미세 조정(fine-tuning),
생명 현상의 통합성과 목적성 등을 살펴보며
“이런 정교한 구조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증거를 따르는 철학자다. 그리고 지금, 그 증거는 나를 신의 존재로 이끌고 있다.”
이 말은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의 입장변화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원칙 ― ‘이성에 따른 판단’ ― 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나온 결과였음을 보여줍니다.
2007년에는 그의 사상적 전환 과정을 담은 책
『There Is a God: How the World's Most Notorious Atheist Changed His Mind』가 출간되었고,
이 책에서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내 고집으로 세상을 보았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고, 내 방식이 가장 이성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나를 진실에 가까이 데려다주었다.”
앤터니 플루의 사례는
한 인간이 자기 신념을 얼마나 고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신념이 참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는 지적 겸손의 위대함을 증명합니다.
그는 살아오면서 자기가 평생 주장해 온 것을 바꿀 줄 알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더는 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이와 함께 익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겸손의 문제입니다.
겸손해지면 증거가 보이고, 교만하면 증거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기 머리에 왕관을 씌우지 않고 부모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렇게 증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믿음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증거가 많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증거를 주는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믿지 못합니다.
내가 뱀임을 믿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증거들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증거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심오함에 비해
문자적으로만 보면 좀 이해하기가 모호하며,
복음 전체가 예수님께서 혼잣말로 하신 것처럼 보인다.
즉 삼단논법적인 논리적 기술로 본다면 무언가 내용이 잘 맞지 않고,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증거를 내세우며
그 위에 또 다른 증거를 내세우는 것 같은 오류 즉 논점 상위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복음을 잘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성서 전체에 대한 말씀을
이 글에서 다 요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요한 복음사가는 그가 묵상한 내용을 진지하게 전달하려는
열정이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예수님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기적들을 보고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고
시기와 질투의 불신 늪에 빠져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씀이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인기와 명성이 예수 때문에 실추되는 것 같아서
예수께 망신을 주고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으로 하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이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복음 내용이다.
그들이 가장 존경하고 위대한 순교자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당신에 대해서 한 증언들을 먼저 내세우시고
그 다음에는 구약의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가르침과 예언이
바로 당신께 대한 것임을 주장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증언은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적들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뿐이지,
내가 내 사리사욕을 위하여 또는 내 인기와 명예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알아들을 이가,
없다는 것도 아시고는 답답해하시는 표현이 나온다.
“너희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모습을 본 일도 없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를 믿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아버지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다는 오늘 복음은
오늘날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사실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사물이나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네가티브하게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흔히 남이 잘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잘한다고 칭찬해 줘야 하는데
자기의 적수나 자기의 경쟁상대가 잘하는 것은 인정하기 싫어하고
보기도 싫어하는 못된 심보가 있다.
그 예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의 경쟁상대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기적들은
모두 다 그네들의 전공 분야를 침범하는 월권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자기네 밥줄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악착같이 예수를 모함하거나 부인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영생을 얻는 길을 가르치는데 그 말은 듣지 않고 영생을 달라며
봉창 두들기는 소리만 하는 경우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서부터 열까지 틀린 말씀이 없고,
바로 예언자들의 말을 실현하고 그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주는 데도
눈에 콩꺼풀이 씌어진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요 이것이 바로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사람들의 소아병적인 증세이다.
그것도 아주 중증의 경우인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이가 없은 것이다.
계명이 무서워서 억지로 지키는 것과 계명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서
옳게 사는 것과 천지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너희가 모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
이것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너희가 다른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는데
죽었던 나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이 일상의 진실과 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 와서 드높은 이상과 진리를 외친다고 해도
전혀 먹혀들어 가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늘의 복음은 처음에 읽기엔 무슨 소리인지
또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겠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정성을 들여 읽어보면
모든 말씀이 참으로 우리 인생의 진리이며
우리들의 삶의 깊은 내면까지 꿰뚫고 있는 말씀들이다.
한 줄도 그냥 넘어가기엔 아까운 말씀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색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고 진정한 구원자이시며
모든 성서의 가르침과 예언 말씀들의 핵심과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