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2006.08.25 뿌리아름역사동아리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2006.09.15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2006.05.05 민족문제연구소 안산시흥지부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 주장은 명예훼손 ? 2005.12.21 이 땅과 우리시대, 2005년 세상 만주의 친일파 행적 폭로한 책 출간 연합뉴스 연예 | 2000.08.11 (금) 오후 5:45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프레시안 사회 | 2006.04.28 (금) 오후 7:44 [MBC 스페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주의 친일파> (20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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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 진보 학자들 "박정희의 과거는 학술적 평가 대상" | 등록일자 : 2006년 04 월 28 일 (금) 19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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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간도특설대' 기고 실은 <말>지 피소 | | [프레시안 2006-04-28 19:44] | [프레시안 김하영/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주장을 편 중국 연변 조선족 역사학자 류연산 씨의 국내 발간 저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 2004년 2월 간)의 출판사 대표가 박 전 대통령의 차녀 근령 씨에 의해 고소된 후 결국 검찰에 의해 '사자(死者) 명예훼손'으로 기소된 가운데, 이 고소에 대한 류연산 씨의 반론문을 게재한 <월간 말> 지의 전현준 전 대표도 역시 근령 씨 측에 의해 고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세균, 정현백, 정대화, 조희연 교수 등 진보적 학자들 152명은 최근 의견서를 공개해 "박 전 대통령의 친일 경력에 대해서는 앞으로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전직 대통령이라고 하는 역사적 공인(公人)에 대한 논란을 사적인 명예훼손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견서는 검찰에도 제출될 예정이다. 박정희 '간도특설대' 출신설 두고 법정 다툼 | ▲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직후 '예비소위' 시절의 박정희. | 쟁점은 박 전 대통령이 1940년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행적이다. 류연산 씨는 "박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며 독립군과 중국군을 토벌한 공에 힘입어 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며 "이는 연변의 조선족 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설"이라는 주장을 폈다. 반면 박 전 대통령 측은 "박 전 대통령은 1937년 3월부터 1940년 3월까지 문경 소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한 뒤 시험을 통해 1940년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다"며 "간도특설대 복무설은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라고 반박하고 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은 조선인이 잡는다'는 명목 아래 창설된 부대로 당시 만주에서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각종 증언과 사료가 엇갈려 논란이 분분하나, 박 전 대통령 측은 경북 문경군청에 보관돼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의원 면직서에 표기된 날짜 '소화 15년'(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연호, 1940년)이라는 표기 및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장의 <실록 군인 박정희> 등의 저서, 중국 연변대 박창욱 교수의 자필 진술서 등을 제출하며 아이필드 유연식 대표와 <일송정...>의 추천사를 쓴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2005년 2월 고소했다. 검찰의 조사가 이뤄지던 중 <일송정...>의 저자 류연산 씨가 자신 주장의 정당성을 알리는 글을 <월간 말>지에 기고해 왔고, <월간 말>은 2005년 6월호와 8월호에 각각 '독립군 때려잡던 박정희 왜 거짓말 하나', '두 사람의 박정희 설을 비판한다'는 제목으로 이 기고문을 게재했으며, 이에 박 전 대통령 측은 지난 2월 <월간 말>도 고소한 것이다. <월간 말>의 전현준 대표 측 변호인은 검찰 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만주국 육군 중위로 복무한 것만으로도 친일파에 기회주의자"라며 "중국의 조선족 학자의 양심에 비춰 학문적인 글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지난해 12월 검찰은 박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아이필드 유연식 대표를 불구속 기소했으나, 김삼웅 관장에 대해서는 기소 처분하지 않았다. "박정희 친일행적 논란을 법으로 막으려 하나…학술적으로 따질 일" 이번에 의견서를 제출한 학자들은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지지하든 비판하든 한국 현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한국 사회의 역사적·사회적 공인"이라며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은 더 확실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규명을 위해 학술적인 연구와 논쟁을 통해 입증돼야 할 문제이지 결코 사법적 심사나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고소인 측을 비난했다. 이들은 "우리들은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 및 독립군 탄압설 자체를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며 "우리 내부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현재와 같은 명예훼손의 이슈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 법적 장치를 이용해 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일체의 언론, 학문, 사상의 표현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한 "핵심 쟁점은 박 전 대통령의 친일 여부이고 이는 더 폭넓은 논의가 이뤄져야 할 주제"라며 "헌법상 상해 임시정부의 항일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전직 대통령, 그것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지금도 격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의 친일 행적 여부가 언론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김하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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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004년 3월 7일 (일) / 제 75 회
'만주의 친일파'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병참기지로서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이래 당시 많은 한국인이 일제에 협력했다. 만주군관학교와 간도특설대를 필두로 협화회, 건국대, 대동학원 등 여러 분야에서 이들은 일제에 기생하여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였으며 민족을 배신하였다. 만주의 친일인맥은 해방 후 반민특위가 와해되는 가운데 친일파 청산 논의에서 벗어나 온존했고, 분단과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부상했다.
일제 만주국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친일행적을 현지취재를 통해 살펴보고 이들이 해방 후의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부상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로써 친일문제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될 것이다.
* 만주국은 무엇인가, 만주는 한국의 타임캡슐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였다. 일제는 왜 만주국을 세웠으며 그들은 만주국을 어떻게 경영했는가. 일제가 시도한 병역국가, 통제국가 만주국은 5. 16 이후 한국 사회에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된다. 만주국의 당시 수도 신경(현재의 장춘)에서 건설과정과 운영실패 등을 만주국 당시의 선전 영상물(만영시보, 만영통신)을 통해 들여다 본다. 독립군과 팔로군, 소련군에 대비하는 국민동원체제나 관동군이 주도하는 철저한 계획경제식의 통치 운용 등 30년대 만주의 상황은 70년대 한국사회와 상사관계에 놓이고 있다.
* 만주의 친일인맥
일제는 한반도의 반일투쟁을 진압하고 안정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대전의 준비를 위해 만주를 침탈하였다. 만주는 그들에게 생명선이자 방파제였다. 이후 일본에 순치된 많은 조선인이 만주를 향하였다. 괴뢰국가 만주에 협력하는 것은 사실상 일제를 돕는 적극적인 친일행위에 해당한다. 항일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도특설대를 창설한 이범익, 만주군관학교에 참여한 윤필상, 이선근, 건국대 교수 최남선 등의 인물들이 이 시기에 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만주에서 무엇을 했으며 그들의 행위가 오늘의 이 시점에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지 중국인들은 당시 일부 조선인(한국인)들이 한 행위를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일본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며 유사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친일파들을 중국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
*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 현지 인터뷰
만주 친일파의 흔적을 추적해 간 중국 동북지역에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박정희의 중국인 동창생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러나 같은 군관학교를 나왔지만 해방 후 그들의 행로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공산당 지역이나 국민당 지역이나 한간(민족배신자)들을 청산하는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생들 그리고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 대한 육성 증언을 들어보았다.
* 한일협정에는 만주 친일파가 있었다.
1963년 8월 1일. 박정희는 일본의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전달자는 만주에서 화신 백화점을 운영하던 박흥식이었다. 반민특위 검거 1호였던 반민족 친일파, 박흥식 그리고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박정희는 한일회담의 막후에서 왜 대표적인 친일파, 박흥식을 전달자로 택했으며 기시 노부스케와는 어떤 관계가 숨어 있었나? 만주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친일행동이 1930, 40년대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박정희 정권하 한일 수교 국면에서 한일 유착의 커넥션으로 부활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만주 친일파의 부정적 유산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지 방송된다. |
첫댓글 역사의 얘기지만 역사지만 그시대엔 우리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썼기땜 별의별얘기들이 나오는데
현재의 한국 정치의 얘기만도 여러 가지로 헷갈리고돌고 있다
그래서 난 누구도 비방이나 헐띁는얘기는 않는다 글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