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여 헷갈리는 일이 발생할까 해서 예수교회가 어떤 곳인가?하는 자료를 올려 놓습니다. 이것은 거기 소속된 사람이 쓴것으로서 제가 퍼온 글입니다. 이 예수교회는 어느 교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이며 스베덴 보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중 한 곳입니다. 다른 이름의 교회도 몇 곳 있고 스베덴 보리 학회라는 것도 있는데, 쓸데없는 호기심을 야기할까 싶어서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시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검은돌
Subject
해방 뒤 예수교회의 교리적 계승에 대하여
1] 필자는 예수교회가 스베덴보리 신학을 수용하여 그것을 예수교회 교리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자입니다.이 주장은 예수교회 안의 어린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신입 교우들에게는 신선하고도 이상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예수교회를 이단 교파로 보는 보수정통 교회인들에게는 이단의 증거라고 할 것이며, 예수교회의 교리적 문제에 필자와 의견이 다른 예수교회 인사들에게는 호감가지 않는 별난 소리일 것이며 스베덴보리는 1950년대 미국 새교회에서 유입되었고 새교회와 스베덴보리를 동일시하는 이들은 수용하기 힘든 주장입니다.
2] 스베덴보리 신학은 1931년 일본제국주의 통치 시절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미국 새교회와 무관하고 일본 새교회와도 연결이 없습니다.(외국 선교기관이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외국의 원조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이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하여 스베덴보리 신학교에 입학하여 배워 온 것도 아닙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 한국은 비상한 영적 각성기에 있었습니다. 그 때 신비신령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장로교단 전도사들이 인도의 사두.선다싱의 책과 기사를 읽다 스씨의 이름과 책을 알게 되어 일본어역 <천계와 지옥>을 읽게 된 것이 시초입니다. 이들이 칼빈주의와 다른 신학서를 읽고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입류라는 예언이 연관이 되어 <원산여선지파>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기도인들이었던 관계로 당대 저명한 부흥사 이용도목사와 친하게 되었습니다.평양에서는 1930년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감화 받은 청년 신자들이 기도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들을 <평양기도단>이라고 하였습니다.1932년 봄부터 장로교 평양노회가 기도단을 압박하였습니다. 그해 여름 원산에서 [새생명의 길]이라는 소책자가 나왔습니다. 늦가을 기도단 집회에 원산에서 온 청년 전도사가 일대 파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을 <평양강신극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교회는 이용도를 추종하는 열렬 기도인들을 출교 책벌하였습니다. 1933년 소속 교회에서 밀려난 무리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교회가 예수교회입니다. 예수교회는 1933년 9월 원산신학산을 개설하여 목사 후보생을 교육하였는데 이 신학산에서 수도생들을 가르친 교육 내용이 다름아닌 스베덴보리신학이었습니다. 이에 관한 문서 자료는 중앙선도원의 [예수]지, 이용도와 예수교회에 반대한 [신앙생활]지가 있습니다.
3]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이 점점 공산주의 세상으로 바뀌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탈출하였습니다. 예수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38도선이 고착되어 분단이 이렇게 오래 갈 줄을 예상하지 못하였고 다급한 상황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몸만 빠져 나온 것입니다.(월남하지 못한 교인들도 많습니다.) 예수교회 한강 예배당을 개척하여 교회 재건에 노력하고 있던 당시 조선신학교 학생, 이정선 전도사가 월남한 박재봉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흑석동 집에서 한 달 간 사경회를 하였을 때 그 집회에 동석한 평양 교회와 중앙 선도원 임원인 박선관 집사로부터 스베덴보리 신학과 예수교회의 관련성을 듣고 시내 서점을 뒤져서 스씨의 책을 읽었다는 것입니다.(박선관 집사는 이호빈 목사와 동향이고 중학 동창이라고 함) 이 시기에 정인보 장로가 이 전도사를 찾아와 자기도 헬렌켈러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신학교에 다섯 명 가량의 독서 그룹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4] 그러니까 이정선 목사가 스베덴보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시기는, 50년 12월 한국 전쟁 중에 함경남도 원산에서 월남한 한준명 목사(1931년 스베덴보리를 한국에서 최초로 연구하였고 예수교회 설립에 계기가 된 평양 집회를 인도하였으며 원산 신학산에서 수도생을 가르쳤습니다)를 재회하여 그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또 50 년대 후반기에 미국 새교회 신학교에 가서 처음 접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 확인됩니다.(이 시기에 정인보 이정선 두 분이 미국 유학을 하였음 *자료는 이모세 나의 회고록을 보십시오)
이것은 예수교회의 교리적 전승의 연속성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증언입니다.
검은돌 예수교회에서 집사라 함은 장로와 같은 것입니다. 즉 교회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 집사입니다. 200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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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김응남이란 분이 다른 글의 댓글을 달면서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정도가 되었으면 운영진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처를 취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실 자신을 밝히고 들어오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보이거든요.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인정해주는 꼴이 되어 버리는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지성방에서 활동하는 스베덴 보리의 제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 제가 파악하기로는 "인권의 왕도", "김응남"등입니다. 그 자료가 필요하시다면 김응남, 인권의 왕도 두분은 공개가 된 것 같습니다.
자연인이란 용어는 제가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제가 임의적으로 썼습니다. 순간적으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성경에 기록된대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구별을 두고자 했던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소속도 없다고 자신이 말씀하셨고 스베덴보리와 새교회적 입장에서는 기존교회를 대체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때문에 교회 밖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표현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무리가 떠나가는군요. ... 기동파, 구원파에 이어서 보리파! 다음에는 또 무엇이 오려나? ..... 뭐, 그 때 가서 싸우도록 하고, 수고하신 님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