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철 前 Liceo Frassati 디렉터, 현지 고등학교 교사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이 문구는 '로마에 있을 때는, 로마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라' 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말로, 성문법(成文法)뿐 아니라 관습법(慣習法)도 따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즉, 자기가 하던 행동양식이나 습성보다는 그 지역의 풍습과 문화를 따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비즈니스에서도 적용된다. 한국에서 비즈니스 출장 오시는 분들이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왜 이렇게 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비즈니스 문화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회의는 토론의 장
이탈리아인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읽고 쓰기는 물론 말하는 방법도 성적평가에 들어간다. 쉽게 이야기해 필기시험은 물론 말하기 시험도 필수라는 이야기 입니다. 본인이 의도하는 주제 또는 답이 어떤 식으로 도출됐는지를 또렷하게 선생님 앞에서 설명하는 구두평가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점수를 받게 된다. 필자가 이탈리아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친 이탈리아인들과의 회의를 상상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주제를 관철시키거나 상대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은 이들의 문화이다. 때로는 현학적인 표현이나 주제에 다소 벗어나있는 설명을 동원해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탈리아에서는 아주 비일비재한 것으로 언제 어디에서든 토론이라는 형식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필자는 한국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의 비즈니스 미팅 시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기준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인들에게서 '예' 혹은 '아니오'의 단답형 대답을 듣기는 아주 어렵다. 필자가 이곳에서 20년 이상 직장생활을 하며 내린 결론은 ' 질문에 짧은 대답이 아닌 과정의 설명이 필수'라고 이탈리아인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팅 시 이러한 이탈리아인의 성향을 충분히 고려해 필요한 답을 천천히 이끌어내도록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성격이 급해 보이는 한국 비즈니스맨들에게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할 것이다.
모든 일은 식사자리에서 이뤄진다
앞서 이탈리아인들의 토론문화를 다뤄 보았다. 이번에는 토론문화 중에서도 비즈니스 식사 시 토론의 중요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한국 분들은 이탈리아의 2시간 이상 이어지는 식사시간을 매우 힘들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즈니스 차 이탈리아를 방문하신 분들에게 전채(Antipasto)로 시작해 디저트(Dessert)로 마감하는 식사는 체력적으로 힘들 뿐 아니라 매번 음식마다 바뀌는 포도주와 식후 독한 술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일반적인 접대의 개념으로 여겨져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탈리아 토론문화의 정점은 바로 이 식사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는 각 지방의 문화가 독특하게 발달했기에 밀라노 사람들이 남부 시칠리아 섬에 방문한 경우에도 거의 다른 나라의 말과 음식을 접하게 된다고 보면 될 정도이다. 이렇게 커다란 지역 차때문에 각 지방에서는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지역에 방문한 손님에게 특산물을 대접하는 문화는 지극히 당연시되고 긴 식사시간 동안 끊임없이 주제를 바꾸며 대화를 유도한다.
바로 여기에 포인트가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곳곳에서 당일 미팅 시 진행했던 내용을 상기하거나 내일의 미팅주제를 정하는 등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서 의미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온 전통이다. " 이탈리아인들의 식사시간에 이뤄지는 대화는 로마시대부터 중요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긴 식사시간이 곤욕의 시간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시간으로 여겨져,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식사시간을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기업의 이해 ①: 신뢰를 쌓아라
이탈리아 기업의 99.9%는 중소기업이며 그 중 고용인이 10인 미만인 마이크로 기업의 비중은 95%정도의 비율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이탈리아 기업의 대다수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기업이라는 뜻이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모여 사업을 하며 가족끼리만 터놓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래 초기에는 비록 표면상으로는 친절하고 흥미 있는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자기 소속 구성원, 즉 가족이 아닌 타인을 대할 때는 의혹을 갖고 대하는 경우도 많다.
이탈리아인들은 모르는 사람과의 거래 시에는 소개 또는 추천을 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인간관계를 중요시해 예측가능한 만남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사업 초기에 거래를 트기 위해서는 비즈니스적 신뢰관계 구축만으로는 부족하며 진정한 인간관계로 쌓인 교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공과 사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보니 ' 신뢰를 쌓기 위한 시간 투자는 필수'이다. 제품이나 거래조건 등에 관심을 보이지만 바로 거래로 넘어가지 않는 경우, 좀 더 인간적인 접근을 통해 신뢰관계를 쌓는다면 어느 순간 계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기업의 이해 ②: 보이지 않는 실세를 파악하라
이제 신뢰관계가 쌓여 계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먼저 95%정도가 가족기업 형태로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등장한 가족의 반대로 의사결정이 번복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사업 파트너사의 사장과 계속 교류를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회장으로 등장해 미팅 자리가 마련되며 이제까지 진행돼왔던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자고 한다. 당연히 계약이 미뤄지며 지난한 프로젝트 설명 과정이 다시 시작된다.
이것이 한국에서 말하는 이탈리아인들 특유의 상술이라 봐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먼저 다뤘던 이탈리아의 토론문화를 상기했으면 한다. 마지막까지 토론하며 가족모두의 의견을 조정해 의견 통일을 이루는 관례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모두의 동의를 얻어낼 때까지 계속 대화를 하는 이탈리아인의 습성때문에 계약 체결 최종 단계에서 가족 구성원 중 누구의 핑계를 대며 조건의 이행이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경우 지속적인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숨은 실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계약이 거의 최종 단계까지 도달했더라도, 내일 구성원 일인의 동의가 없어 계약 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이탈리아이기에, 의사결정 권한이 가장 큰 사람을 파악해야 한다. 이탈리아는 아직까지 가부장적인 문화가 다소 남아있어 대부분 연장자의 의사결정 권한이 높다. 이탈리아는 '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의가 중요하며 특히 최고 연장자의 권한이 강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업진행 초기부터 회사 내 연장자가 의사결정 자리에 참석하도록 해 차근차근 사업을 진행한다면 비즈니스가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경제는 지금 본격적인 회복세에 접어들고 있다. 비록 한국보다는 느리고 답답하지만 그리고 지방색이 강해 매번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 업체의 전반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그들만의 비즈니스 문화에 맞춰 접근한다면 바이어와의 신뢰 구축으로 보다 성공적인 현지 시장진출이 가능할 것이다.
※ 이 원고는 외부 글로벌 지역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의 공식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