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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이 언제부터 한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고증하기 어렵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문자를 사용하였고,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지만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1백권이 전해 왔으며, 영양왕 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왕명에 의해 이를 간추려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라는 백제의 역사책을 지었다. 신라에서는 백제를 통해 한자를 배워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居漆夫) 등이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에 한문과 더불어 전래된 유교는 주로 한대(漢代)에 성립된 경학사상이었으며, 따라서 삼국의 유교는 공자(孔子)·맹자(孟子) 사상과 함께 한대의 경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
유교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수용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당시 한문의 전래는 곧 한학漢學을 습득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한학의 내용은 경학經學, 곧 유교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삼국의 유교가 형성된 시기와 그 발전의 순서 역시 한문의 전래 순서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한문과 유교가 각각 전래, 수용되었다.
▪ 고구려
고구려의 태학은 중국에서 한나라 무제武帝때 오경박사를 두고 태학을 세운 것을 본받아 설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교과 내용은 오경五經과 삼사三史,『문선文選』등이 중심이었다. 고구려의 태학 설립은 국가 체제와 전장제도의 확립, 유교사상에 입각한 통치, 유교 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일반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는 경당(堂)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 역사서, 그리고 문학 서적과 무예를 교과목으로 삼았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풍속에 서적을 사랑하여 고기를 파는 백정이나 마구간에서 말 먹이는 천한 일을 하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놓고 이를 경당이라 했다. 자제들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글읽기와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그 서적에는 오경(五經)·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옥편(玉篇)·자림(字林)이 있으며, 또한 문선(文選)이 있었는데 이를 특히 중시하였다"고 한다. 정치 원리에서 유교사상을 수용한 흔적은 동명왕이 도(道)로써 다스리라고 후왕(後王)에게 명한 형식과 내용이 유교적인 격식과 내용이라 할 수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대왕의 업적을 찬양하여 "대왕의 은택이 하늘에까지 사무치고 위무(威武)의 정신은 사해까지 뒤덮어서 나쁜 무리를 쓸어버리고 백성은 그 직업에 안정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경(書經)』『요전(堯典)』 에 보이는 "요임금의 공훈이 넓게 퍼졌으니 공경하고 밝으시며 환하고 깊은 생각에 안정되어 진실로 공손하며, 사양하여 빛을 사방에 비치시며 상하에 다다랐다"라는 표현과 흡사하다. |
생활 속에서 유교가 수용된 예를 살펴보면 혼례婚禮·상례喪禮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부모와 남편의 초상에 3년 동안 상복을 입게 되었다던가, 묘제墓制의 침향枕向이 동쪽에서 중국의 습속인 북쪽으로 바뀐 것은 유교사상의 예법에 영향을 받아 사생관과 습속이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유교 윤리로서 강조된 것은 효라고 할 수 있다.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 숭배를 더욱 성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른 국사國社와 종묘宗廟를 새로이 세우고 중요시하였다.
▪ 백제
백제의 중국으로부터의 유교사상은 고구려 다음 순서로 전래되었으나,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한 국가 질서의 수립이나 중국 문화의 수용에서는 고구려보다도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서서 일본 문화의 개창자적인 역할을 하였다.『구당서舊唐書』에서는 "혼인하는 예법은 대략 중국과 비슷하고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삼년간 복(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상례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법식이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교가 백제의 사회·국가적 교화나 제도에 윤리적인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음은 "반역을 일으킨 사람이나, 전쟁에서 퇴군(退軍)한 사람, 그리고 사람을 죽인 자는 목을 베며, 도둑질을 한 자는 귀양 보내고 훔친 물건의 갑절을 받아들인다. 부인으로서 간음을 범한 자는 가족을 몰수해 남편의 집 종으로 삼는다."라고 한 백제의 형법에 그 사례가 보인다. 이는 유교적 예의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정부 조직이나 행정관서 및 행정 구역 제정에서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 고이왕 때에는 중앙 관제를 육좌평(六佐平) 십육관계(十六官階)로 제정하였는데, 이는 『주례(周禮)』의 육관제(六官制)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사나 묘제 등에서도 유교적인 의식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하기 시작하였다. 학술면에서 백제의 유교적인 영향은 『구당서』에 "그 서적에는 오경자사(五經子史)가 있으며, 표(表)·소문(疏文)은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였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에서는 박사의 칭호가 일찍부터 보인다.『서기(書記)』를 기록한 고흥과 일본에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한 왕인(王仁)이 역사 기록에 보이는 박사였다. 중국 한무제 때 성립된 오경박사 제도가 그대로 무령왕과 성왕 때에 있었으며, 이외에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 등의 칭호가 있었다. |
백제의 유교사상에서 특징적인 사실은 일본에 대한 문화의 전파이다. 백제는 한자와 유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여 토착화하고 일본에까지 문자와 학술을 전파해 일본 고대문화를 개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오경박사·천문박사·의박사 등이 일본에 많은 왕래를 하였음은『일본서기日本書記』와『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왕인과 아직기阿直岐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고, 지금 일본 동경 우에노 공원에는 박사 왕인비가 있으며, 일본 학자들은 박사 왕인을 일본문화의 시조로 손꼽는다.
▪ 신라
신라는 삼국 가운데 한문의 도입과 유교의 전래가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가장 뒤떨어졌지만,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적절하게 토착화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으로 삼았다. 정치이념과 사회질서 속에 유교 정신을 수용한 것이 신라유교의 특징이다.
마운령비(磨雲嶺碑)에는 "순수한 풍습이 베풀어지지 못하면 참된 도리가 어긋나게 되고, 훌륭한 교화가 퍼지지 못하면 사특한 것이 다투어 일어난다. 따라서 제왕이 통치이념을 세우는 것은 모두 자기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아니함이 없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절은『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유교 정치이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 때 승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安民歌)』에도 애민사상과 민본사상이 나타나 있다. 『안민가』 가운데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백성은 백성 구실 다할 양이면 나라는 태평에 멱 감으리라."고 한 것은『논어』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라는 정명(正名) 사상과 부합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귀산(貴山)과 추항(項)이라는 화랑에게 준 교훈으로 유학사상을 수용 섭취하여 개인·사회·국가 윤리로 실천해 나가는 실제적 과정을 보여준다.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하며,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며, 벗과 사귐에는 신의가 있어야 하며, 싸움에 임해서는 후퇴함이 없으며, 살생은 가려서 해야 한다"라고 하는 글에서 충효·신의·도의 등은 유교적인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갔다. |
▪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유교는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의 확립과 함께 유학자라고 부를 만한 인재를 배출해 낸 데에 특색이 있다. 신문왕 2년(682년)에 국학國學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교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교과 내용은 『예기禮記』·『논어』·『주역』·『효경孝經』·『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모시毛詩』·『산학算學』·『상서尙書』·『문선』 등이었다. 교수 방법은 박사, 또는 조교助敎가 있어서 세 등급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세 등급으로 나누어진 가운데서 모두 공통으로 배운 교과는 『논어』·『효경』이었다. 이는『논어』와『효경』을 인간 교육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생각한 것이다. 『논어』를 읽어 인仁 사상을 배워 참된 인간성을 함양하는 본원을 습득케 하였으며, 『효경』을 통해서는 부자父子를 위시한 인간관계에 친애하는 정서를 기르게 하였던 것이다.『논어』에서 말하는 충忠과『효경』에서 말하는 효孝, 곧 충효사상을 일관되게 강조하여 가정윤리와 사회국가의 윤리 근간으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을 들 수 있다. 강수는 스승에게서 『효경』·『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을 배웠다 한다. 그는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아 부부의 예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며, 실천적인 유학자의 진면목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설총은 자(字)가 총지(聰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였다. 방언으로써 구경(九經)을 풀어 설명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비록 실전되었으나 이는 우리나라 유교사상 최초의 경전해석서이며, 실질적으로 유교를 소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그의 『화왕계(花王戒)』한 편이 전해지는데, 비록 우화 형식의 글이지만, 유교사상의 체계를 지녔던 인물로서 현존하는 최초의 글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설총은 고려 현종 12년(1021)에 홍유후(弘儒候)라는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양된 동방 18현 가운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최치원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의 고유사상과 유·불·도 3교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글로는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여러 비문이 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추증되었다. 최치원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불교·도교와 더불어 상호 교류하며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외래사상 속에서 우리의 고유사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외래사상과의 조화를 꾀하려고 한 흔적을 보여준다는 데 커다란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
● 고려 이전의 도교사상
도교는 무속을 비롯한 민간신앙, 즉 체제 밖의 사상적 주변문화로써 한반도 문화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유교와 불교가 사회체제 확립과 고전문화로 자리 잡은 반면, 도교는 같은 처지의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민중의 삶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도사나 도교에 관계되는 물건이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구려 영류왕 때의 일이다. 당시 중국에서 “천사도”의 전신이었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고구려에 들어와 성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이미 들은, 당의 고조가 도사와 도교의 최고신인 天尊천존의상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백제와 신라에도 같은 시기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으나, 명확한 기록은 없 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사상적인 동향을 유심히 살펴보면, 도교적인 성격을 띄는 여러 가지 요소가 존재하는데,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 백제와 신라에도 도교가 존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 그 고유의 특징을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통일 전 김유신이 도교적으로 생각 되는 방술을 닦았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손자인 김암이라는 사람은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도교식 방술의 일종인 둔갑술을 배워 귀국해서는 병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통일 후 최치원이 중국 도교에 관여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는데, 그가 당에 있을 당시 도교식 제사인 재초를 지낼 때 신들에게 올리는 글을 직접 썼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청사靑詞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후에 고려의 도교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 글 몇 편이 그의 문집인 계원필경에 남아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도교에 대한 지식이 심상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죽어서 신선이 되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고려 말 혼란한 사회 속에서 도교적 요소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혼란한 사회를 도피하고자 하는 당시의 지식인들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 고구려
삼국시대 말기에 도교가 본격적으로 수용 되었는데, 특히 고구려에서 가장 활발하였다. 도교사상은 고구려 영류왕 때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구당서 등의 역사서에 의하면, 영류왕 7년에 당고조인 이연이 고구려인들 사이에서 오두미교를 신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사와 함께 도교의 최고신인 천존의 상을 고구려로 보내주었고, 도사들로 하여금 노자 도덕경을 강론케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중국에서는 2세기 후반 후한 말엽에 오두미교가 시작되었는데, 고구려에서도 말기에 오두미교가 크게 신봉되었다. 이것은 일찍부터 도교가 전파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5세기 중엽에 와서 신천사도로 발전해서 도교가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국가로부터 보호도 받았다. 영류왕 때 처음으로 당에서 도사와 천존을 받은 고구려는 20여년 후 보장왕 때 연개소문이 세력 확장을 위해 불교세력을 억압할 목적으로 도교를 중국으로부터 대량 수입한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도사를 시켜 도교의 의식에 따라 국가 진호를 위한 초제를 거행하게 된다.
▪ 백제
백제에 정식으로 도교가 전래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교 기록에 관한 것은 다른 나라의 기록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 7세기 초 백제 승려 한 사람이 일본에 천문학이나 달력, 혹은 도교식의 둔갑술이나 다른 방술에 관한 책을 전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적어도 그 이전에 백제에 도교가 들어와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외에도 3세기 후반 백제의 학자인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 황실에 건넨 여러 서적 중에 도교 서적이 있었다고 전해지고는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근거도 없을 뿐더러 당시에는 중국에서조차 도교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로 보여, 이 기록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를 유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신라
신라에서는 산악신앙이 일찍부터 발달하고 또한 신선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어, 이른바 도교적인 문화현상은 삼국 중 가장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몇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이 있는데, 통일 전 김유신이 방술을 닦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손자인 김암이 당나라 유학에서 둔갑술을 배워와 병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최승우, 김가기, 자혜라는 신라인이 9세기 중엽 당나라에 가서 수련법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조선조에 만들어진 도교서적에 보이고, 최치원이 중국 도교의 제초문을 썼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러나 신라에는 그 이전에도 신선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있었다. 박혁거세를 낳고 선녀가 되었다는 선도성모, 신라 최고의 화랑 네 명을 사선이라 부르며 신선처럼 대우한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