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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81)
회하에 흐르는 건 강물만이 아니었다(1)
회하에 흐르는 건 강물만이 아니었다.
어떤 것을 숨기기에는 어둠 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비까지 내리고
있다면 금상첨화의 조건일 터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과 어둠은, 핏빛으로 변한 수면은 물론이고 둥
둥 떠오른 시체들조차 분간할 수 없게 하였다. 적룡호에 타고 있는 사
람들은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아니,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 때
문에 수면의 상황을 주시할 겨를이 없다는 게 옳았다.
밤새도록 갑판을 오가며 주하연이 잡아낸 화살은 헤아릴 수조차 없
이 많았다. 족히 수백 개는 될 듯, 그녀 곁에는 화살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한번 나와보기나 할 일이진……."
연신 뱃전을 흘끔거리는 주하연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역력했다.
전날 저녁나절에 물 속으로 들어간 백산이 지금까지 한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이지 않자 공연히 애가 닳았다.
주하연이 애타게 백산을 찾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사위가
희부옇게 밝아왔다.
"뭐야 저것들은……."
어스름한 새벽녘, 점차 시야가 확보되자 일행의 눈에 엄청난 광경이
목격되었다. 핏빛으로 변한 강물 곳곳에 무수한 덩어리들이 떠올라 있
었다.
물결을 따라 아래쪽으로 흘러가는 그것들은 검은 수어피를 입고 있
는 시체였다.
형태도 다양했다. 목이 없는 시체, 팔과 다리가 잘려나간 시체, 가
슴이 뻥 뚫린 시체. 적룡호 주변은 온통 시체들로 가득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에 구역질을 해대는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은 비단 적룡호에 있던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적룡호에서 30장 떨어진 강변에 있던 회하채 수적들도 마찬가지였
다. 밤새도록 퍼붓던 화살공격이 뚝 그쳤다. 그들 또한 핏빛으로 변한
강물과 강변으로 떠밀려온 시체를 발견했다.
동료들의 시체를.
"채주님께 알려라! 수룡단이 전멸했다고."
막 물 속에서 걸어나온 수룡단 한 명이 말을 끝내자마자 풀썩 쓰러
졌다. 쓰러진 그의 등에는 투명한 얼음 창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회하채 무리들이 빠른 움직임을 보였고, 반 시진 후 덕삼은 잔뜩 굳
은 얼굴로 강변에 나타났다.
"이럴 수가……."
핏빛 가득한 강물을 넋없이 바라보던 덕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2백 명에 달했던 수룡단 중 살아서 물 밖으로 나온 부하는
50명에 불과했다. 하룻밤만에 막사손을 비롯한 150명의 수룡단이 몰살
당한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의 수룡단이, 뭍도 아니고 물 속에서
몰살을 당하다니. 설령 상대가 수공을 익힌 고수라 할지라도 이럴 수
는 없는 일이다.
"철(鐵)이는 어떻게 됐느냐?"
하나뿐인 아들. 친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차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거라 여겼고, 녀석을 키우는데 전심 전력을 다했다.
그런데 그 녀석마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은 보았느냐?"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사람의 가슴은 더욱 차갑게 변한다고 했는데 지
금 덕삼의 심정이 그랬다. 덕철에 대해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자 덕삼
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변했다.
파르르 끓어올라야 당연한데도 심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몸은 싸늘하
게 식어갔다. 오히려 머릿속은 여느 때보다 훨씬 맑아진 것 같았다.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만 보았을 뿐입니다."
부하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수많은 동료의 가슴을 관통
했던 물건의 정체는 이곳에 나와서야 알았다.
백색으로 빛났던 그것은 다름 아닌 얼음이었다.
"좋다, 배를…… 띄운다."
고개를 끄덕인 덕삼은 한참 동안 적룡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돌
렸다. 더 이상 만씨세가에서 청부받았던 일은 할 수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150명 부하를 잃었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건
그들에 대한 복수는 해 주어야한다.
아울러 아들의 복수도.
"니미럴, 밤새 많이도 죽였네."
선미를 타고 적룡호로 올라온 백산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더니
낮게 투덜거렸다.
"오빠!"
뒤에서 들려오는 백산의 목소리에 금세 얼굴이 환해진 주하연은 선
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왜 이제 나와, 걱정돼 죽을 뻔했구만."
백산의 품안으로 펄쩍 뛰어들며 울먹였다.
"사모래 저 놈 또 난리 친다. 제발 그만 좀 해라."
당혹스럽다는 듯이 백산은 흘낏 선수 쪽을 건너다보며 주하연의 등
을 토닥거렸다.
실은 시간이 이만큼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수룡단을 찾아 물 속을
헤매고 다녔고, 더 이상 적이 보이지 않자 밖으로 나왔는데 벌써 아침
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백산의 우려와는 달리 천괄이나 갈영상은 주하연의 행동을
살필 경황이 없었다. 붉게 변해버린 강물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린 탓
이었다.
아울러 백산이란 인물에 대한 두려움으로 저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
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떠오른 시체만 해도
족히 백여 구 정도는 될 듯 싶었다.
물 속으로 가라앉은 자들까지 합치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물 밖으로 나온 첫마디라니.
"화살은 무지하게 모아두었구나."
갑판으로 올라온 백산은 한편에 수북히 쌓인 화살을 보며 만족스럽
다는 듯이 웃었다.
적룡호에 있던 화살까지 합치면 족히 수천 대는 될 듯 싶었다.
"이제 화살 그만 모아도 되겠어. 사모래, 안에 들어가서 괜찮은 활
있으면 하나 가져와 봐."
"귀광두 너?"
올라오자마자 다시 활을 찾는 백산을 천괄은 놀란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느꼈던 탓이었다.
그 냄새는 코로 맡는 냄새가 아니다. 머리로 감각으로 느끼는 냄새
다. 일명 광기(狂氣)라 부르는 냄새.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자들, 수 십 년 동안 전쟁터를 굴러먹은
백전 노장의 병사들이 풍기는 냄새와 동일했다.
그들은 전쟁터가 아니면 살아가지 못한다. 전쟁터는 그들의 집이고,
죽음은 그들의 친구다. 코를 자극하는 시체 썩는 냄새를 그들은 향기
라 부른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가 사막의 이름 모를 사구나 또는 숲에서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과 같은 광기를 지닌 자들에 의해.
그 냄새가 백산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막 나온 녀석이 왜 이래 이거."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천괄은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란
사실을 백산이 일깨워 준 것이다.
"유몽! 몸은 어떠냐?"
"미치겠습니다!"
유몽은 미치겠다는 말로 몸 상태를 설명했다. 더 이상 거칠게 없었
다. 온 몸에 끓는 내공은 금방이라도 혈도를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
다. 최상의 조건. 지난 10년 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에 미
칠 지경이었다.
"좋아! 그럼 적룡호 주변 물 속은 너희 여섯이 맡고. 선실 나무를
뜯어다 노를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주공!"
백산의 명령에 따라 적룡호 인물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선실을 만들었던 나무를 뜯어내어 방향타 모양으로 잘라내고 일부는
노를 만들었다. 준비된 노는 6개였다.
선실 상층부가 사라진 적룡호는 흉물스럽게 변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노를 저어 회하 물길을 가르기 시작하였다.
"앉아봐!"
일부에 불과했지만 간단하게나마 식사를 마친 일행은 백산의 지시에
따라 1층 선실에 둘러앉았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움직이기 시작한 배를 뭍으로 대서 육
로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강을 따라 내려 갈 건가 하는 거다.
각자의 생각을 말해봐라."
"이대로 강을 따라 가는 게 나을 것 같소이다."
백산의 물음에 맨 먼저 대답한 사람은 갈영상이었다.
"왜?"
"그게……?"
"말하세요, 아버지를 견제하는 자가 많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요. 오빠, 영상 할아버지 말처럼 강을 타고 내려가야 해요. 뭍으로 가
면 더 위험해저요."
"군주님 말씀이 맞소. 뭍으로 가면 더 편할지는 모르지만 우린 암중
에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럼 우리 존재는 묻혀 버리오. 일단 안휘성
까지만 가면 남궁세가의 영향권에 들어가니까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거요."
"관에 알리면?"
관보다 남궁세가를 먼저 언급하는 갈영상의 말에 백산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물론 남경왕의 정적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건 내부사정일 뿐
드러나게 적의를 보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군을 동원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
하오. 북경에 장계를 보내고 받을 시간이면 이곳 일은 끝나 있을 거
요."
"그렇겠군. 일을 먼저 처리하고 장계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에서 처리하는 일의 가장 큰 맹점은 바
로 절차다. 아무리 잘한 일이라 할지라도 절차에 하자가 있으면 문제
가 생기는데, 하물며 정적이 많다는 남경왕이다.
관의 도움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럼 우리끼리 해나가야지 다른 방법이 없구먼. 일단 빠르게 가보
도록 하자고. 활 줘봐!"
자리에서 일어나던 백산은 여태 활을 들고 있는 천괄에게 손을 내밀
었다.
"강궁(强弓)이네?
검은 색 광채를 뿌리는 간(幹)을 받아든 백산은 싱긋 미소를 지었
다. 활의 몸체인 간은 강철로 되어 있고, 현(絃)이라 부르는 활줄은
천잠사였다. 더구나 간은 만곡 형태가 아닌 직선이다.
일반 병사가 쏠 수 있는 활이 아니었다. 활을 만든 재질이나 천잠사
로 볼 때 과거 어느 무인이 사용했던 활임에 분명했다.
"이게 궁(弓)이었어?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신기한 듯 주하연은 백산이 쥐고 있는 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적룡
호에 마련된 아버지 침실에 걸려 있던 물건이었는데, 지금껏 자(尺)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궁이란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가운
데 자잘하게 글이 새겨져 있었다.
"엄청 오래된 궁인걸? 이 글은 저번에 봤지? 갑골문자라 했던 거.
맥궁묵월(貊弓墨月)라 쓰여있어."
"갑골문자?"
"에휴, 또 다 까먹었어? 전서체 이전에 쓰였던 글이라고. 일명 고어
(古語)라 불리는 글이라 했잖아. 춘추전국시대 이전이나 아니면 그 당
시 만들어 졌을 거야. 근데 혈월하고 이름이 너무 비슷하다. 예도혈
월, 맥궁묵월……. 혹시 같은 집안 물건 아닐까?"
"몰라 임마, 좌우간 써먹을 수나 있었으면 좋겠다."
쓸데없는 데 관심 같지 말라는 듯 소리를 지른 백산은 물끄러미 천
괄을 쳐다보았다. 괜찮은 활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골동품을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물론 겉모양은 깔끔하니 이상 없어 보였지만 현을 걸다보면 부러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야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이 본 궁중에 최고라 하더라. 그래서 들
고 나온 거다."
"그래? 일단 현을 걸어보면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잠사를 미라고 부
르는 궁 한쪽 끝에 걸고 천천히 당겼다.
"이놈 봐라?"
제법 내공을 가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간을 보며 백산은 조금 황당
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했다. 방금 응용한 내공은 3할이었다.
놀란 눈으로 활을 바라보던 백산은 서서히 내공을 증가시켰다. 그의
몸에 붉은 광채가 일렁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궁은 조금씩 휘어졌고, 8
할의 내공을 일으키고서야 한쪽 끝에 현을 걸 수 있었다.
팅!
"예술이다, 이거."
맑게 울리는 현 소리에 백산의 얼굴은 환해졌다. 아직 사냥꾼 습성
을 버리지 못했을까. 명궁을 보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활을 쏠 수 있겠어요?"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백산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주하연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부터 과거의 감각을 찾아봐야지. 기억하고 있는 실력이 어딜
가겠어? 활도 검이나 도와 마찬가지야. 궁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
하지 못하면 아무리 명궁이라 하더라도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연신 활의 현을 당겨보며 백산은 밖으로 나왔다. 과거의 기억을 되
살려 활 쏘는 연습을 할 참이었다.
"정말 현을 걸어버렸군."
백산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천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왕야로부터 명궁이란 말을 듣고, 현을 걸어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
다. 하지만 변황사신으로 불렸던 자신의 전 내공을 동원했음에도 불구
하고 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현을, 백산은 장난하듯 걸어버린 것이었다.
"이거 질투 나려고 하네."
천괄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이제 약관의 젊은
이가 저런 무공을 지녔는지, 불공평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형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저 친구 때문에 마음 든든하
지 않습니까."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있는 백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갈영상은 말했
다. 지금까지 백산을 겪고 느낀 점은 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다.
그와 같이 있으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별 것 아니게
느껴진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앞에 얼마나 많은 적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임에도 불
구하고 자신들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게 백산 때문인 것이다.
강한 무공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
다.
"그건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지금 우린 어디쯤 와 있는 건가?"
"아마 삼하첨(三河尖)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강이 사하(史河)입니다. 이제 안휘성이군요."
갈영상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 줄기의 강이
모인다하여 삼하첨이라 불리는 이곳은 하남성의 끝자락이었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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