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정세형의 무전무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 이상의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고등학교나 대학교 같은 학교 동창회를 들 수 있고, 그 외에도 취미 생활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만든 친목회나 동호회도 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어떤 단체를 만드는 경우 단체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자금 관리라고 할 수 있다.
단체가 정식으로 법인으로 등록이 되어 있으면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관리하면 되지만, 비법인 단체는 대표자나 총무 등 개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단순히 대표자 개인 명의로 계좌가 개설되어 있으면 외부에서 봤을 때 그것이 단체의 재산인지 개인의 재산인지 알기 어렵다. 만약 대표자에게 채무가 있어 다른 사람이 대표자 명의로 된 계좌가 대표자 개인의 재산인 것으로 오인돼 압류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상사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금융기관과 금융거래를 할 때 실지명의, 즉 실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법률이 바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인데, 실명 거래의 확인 방법과 절차 등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있다. 대통령령인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살펴보면 개인, 법인, 그리고 비법인 단체 등으로 구분해 실명과 그 확인 방법을 정하고 있다.
우선, 개인의 경우 주민등록표에 기재된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실명으로 하고, 주민등록증 등의 증표 서류로 실명을 확인한다. 비법인 단체는 단체를 대표하는 자의 실명을 단체의 실명으로 하고 대표자의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주민등록증 등과 같은 증표 서류로 실명을 확인한다. 부가가치세법에 따른 고유번호나 소득세법에 따른 납세번호를 부여받은 단체의 경우 그 문서에 기재된 단체명과 고유번호 또는 납세번호를 단체의 실명으로 하고 고유번호 또는 납세번호를 부여받은 문서나 그 사본으로 실명을 확인한다.
비법인 단체라 하더라도 부가가치세법에 따른 고유번호나 소득세법에 따른 납세번호를 부여받은 경우 단체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대표자 개인의 명의로 계좌를 개설할 수밖에 없어 대표자 개인 재산과의 구분이 문제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해 2020년 대법원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이 선고됐다. 부가가치세법에 따른 고유번호나 소득세법에 따른 납세번호를 부여받지 않은 비법인 단체의 경우, 그 대표자가 단체를 계약의 당사자로 할 의사를 밝히면서 대표자인 자신의 실명으로 예금계약 등 금융거래계약을 체결하고, 금융기관이 그 사람이 비법인 단체의 대표자인 것과 그의 실명을 확인했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당사자 사이에 단체를 계약의 당사자로 하는 의사가 일치되었다고 할 수 있어 금융거래계약의 당사자는 비법인 단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결의 의미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안에 대한 것이었는지 좀 더 들여다보자. 어떤 비법인 단체의 대표자가 신용협동조합에서 예금계좌를 개설했다. 조합거래신청서에 자신의 성명,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와 조합원 번호를 기재하고 실명확인증표로 복지카드를 제출했다. 또 금융거래목적확인서에 금융거래 목적을 ‘동문회 통장’이라고 기재했고, 조합거래신청서 등 서류에 단체의 인감을 날인했다. 개설된 예금통장에는 예금주로 대표자와 함께 단체의 명칭이 부기돼 있다. 신용협동조합은 이 예금계좌에 관한 상세정보에 조합 원명을 대표자, 통상부 기명을 단체로 입력해 관리했다.
그런데 대표자의 채권자가 예금채권에 대해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을 했다. 그러자 대표자가 속한 단체에서 예금계약의 당사자는 대표자가 아닌 단체라고 주장하면서 예금채권에 대한 강제집행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하급심 법원에서는 예금계좌가 대표자에 대한 실명 확인을 거쳐 개설되었고, 대표자가 신용협동조합에 단체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 거래자가 단체임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상부 기명이나 통장 사용 목적은 통장 관리를 위한 편의사항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볼 때 단체와 그 대표자, 신용협동조합 사이에 단체를 예금계약의 당사자로 하는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보아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하급심 법원에 돌려보냈다.
비록 대법원에서 파기되긴 했지만, 분쟁 발생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한다는 측면에서는 하급심 법원의 판단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급심 법원에서는 대표자가 신용협동조합에 단체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였는지를 중요하게 봤다.
2015년 금융감독원에서도 동창회와 같은 임의단체의 경우 대표자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고 단체명을 부기하더라도 ①단체의 정관 또는 조직과 운영에 관한 규정, ②대표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등록증, 회의록, 의사록 등), ③조직구성원 명부 등 단체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단체가 아닌 개인 계좌로 취급돼 대표자 개인채무 불이행 시 압류, 상계 조치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한 적이 있다.
결국 계좌를 개설할 때 단체의 존재와 대표자가 그 단체의 대표자로서 계좌를 개설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를 함께 제출한다면 불필요한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분쟁은 돈 때문에 생긴다. 특히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단체의 경우 돈을 잘 관리하는 것은 단체의 존립과도 직결될 수 있어 더욱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비법인 단체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한 계좌를 개설할 때 대표자 개인이 아닌 단체의 계좌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은 올바른 자금 관리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