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東明聖王)
생몰 : 기원전 58년 음력 4월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재위 : 기원전 37년 음력 2월 ~ 기원전 19년 음력 9월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초대 태왕으로 추모왕으로 부른다. 삼국사기 등에 추모(鄒牟),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牟), 도모(都慕)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으며,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속된 이름으로 주몽(朱蒙)이 있다.
1. 동명성왕의 출생 비화
서기전 194년, 위만의 반란 이후 고조선은 북부여, 위만조선, 진국으로 지역이 분열한다.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에 한 4군이 설치되자 고조선 유민들의 반발이 시작된다.
서기전 72년에 북부여에서 해모수가 나타나 한나라를 공격하여 옛 고조선 땅을 일부 회복한다.
해모수는 "흩어진 고조선 부족들을 하나로 규합한 사람"을 의미한다.
72년 해모수는 북부여의 실권자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국제 관계가 급변한다.
한나라가 훙노에게 대승을 거두고, 평소 적대하던 오환등과도 외교적으로 친교를 맺으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빠르게 회복한 것이다.
이에 북부여 내부에서 한나라와 싸우자는 매파와 사이좋게 지내자는 비둘기파의 다툼이 시작된다.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쪽은 한나라와 싸우자는 매파였다.
비둘기파에 속했던 서기전 72년 해모수는 제거되고, 새로운 서기전 59년 해모수가 득세한다.
실각한 비둘기파는 서기전 72년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와 함께 동북쪽 가섭원으로 가서 동부여를 세운다.
비둘기파의 이탈로 북부여의 국력이 크게 약화된다.
서기전 59년 해모수는 국력 회복을 위해 각 지역을 순행하고, 그 과정에서 압록강 유역의 세력가 하백의 여식 유화를 납치해 강제로 범한다.
그런데 서기전 59년 해모수가 알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북부여가 와해된다.
그리고 모든 권력이 동부여의 해부루에게 넘어가게 된다.
해부루는 북부여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양자 금와에게 순행을 시키는데 이때 압록강 유역의 세력가 하백을 만나게 된다.
금와는 유폐되어 있는 유화를 보게 되고, 하백을 설득해 부인으로 삼게 된다.
그런데 이때 유화는 서기전 59년 해모수에게 겁탈을 당한 후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인한지 몇달 안되어 아이를 낳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해부루 집안이 발칵 뒤집히게 된다.
주몽은 붉은 대문을 속이다 라는 뜻이다.
붉은 대문은 값비싼 주사로 칠해진 귀신을 쫓는 붉은색 대문으로 권력과 부를 상징한다.
즉, 유화가 동부여 왕 해부루 집안을 속이고 다른 남자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속된 표현인 것이다.
그럼에도 유화는 지방 유력 가문의 출신으로 나라 안정에 필요한 정략 결혼을 하였기에 다행히 아이를 지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주몽이 성장할수록 능력이 남달라 금와 왕의 장남 대소 왕자와 비교 대상이 되었기에 질시와 박해를 받게 된다.
주몽이 성인이되자 살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고자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2. 동명성왕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의 의미
유화가 5되나 되는 커다란 알을 낳자, 이 소식을 들은 금와 왕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어 유화로부터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고 오히려 소중히 하였다. 그 뒤 와는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였는데, 소와 말들이 알을 피해가자, 이번에는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었다. 하지만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때문에 금와 왕은 도끼로 알을 내리쳐 보기도 했지만 알은 온전하였다. 금와 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는 의미는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다는 의미이다.
다만 어미 닭이 낳은 알에서 깨어나 닭이 되었다는 것으로 어미닭과 함께 존재하는 관계이다.
즉, 모국을 멸망시키거나 모국의 왕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동명성왕 외에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3명 더 있다.
천마 알에서 태어난 신라의 박혁거세는 마한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왕이 되었고,
가야의 김수로는 진한으로부터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다.
신라 4대왕 탈해 이사금은 차차웅의 사위였지만 3대 유리왕의 실각하자 모든 권력을 넘겨 받아 서실상 왕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유리왕이 죽자 왕위까지 오르지만 차기 왕권을 유리왕의 아들에게 넘겨주어 왕권의 찬탈이 일어나지 않는다.
3. 고구려 건국
고구려(高句麗)의 의미는 구려(句麗) 지역의 윗쪽이란 뜻이다.
구(句)는 강의 형태를 말하고, 려(麗)는 무역, 운송, 상업을 뜻한다.
구려(句麗) 지역은 아래 그림과 같다.
그림의 푸른색 지역이 구려의 북쪽이다.
고구려가 '구려의 윗쪽'이라고 풀이가 가능한 이유는 유리명왕이 도읍을 국내성을 옮긴 이후 중국 신나라 왕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비하한 일이 있는데 국내성의 위치가 구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위치를 구려의 북부라고 정의할 수 있는 또하나의 근거는 고구려의 주식이었던 기장의 생산지와 관련이 있다. 기장은 한반도 북부 산악지역에서는 재배할 수 없는 벼과 작물이다. 생장 기온이 연평균 10도 이상이어야 하는데 한반도 북부 산악지역은 연평균 6도에 불과한 추운 곳이다. 고대부터 기장 재배지는 요하 상류 지역이다.
4. 동명성왕의 영토 확장
동명성왕은 서기전 37년에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다.
서기전 36년에 비류국(송양국)의 항복을 받아 다물(多勿)로 개칭한다.
多에 해당하는 지역이 비류국이 있었다.
서기전전 32년에 부분노 오이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정복한다.
행인국은 후대의 국내성이 있는 곳이다.
서기전 28년에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고, 정복한 땅을 표현하여 추모왕이라 불렀다.
5. 동명성왕의 의문의 죽음과 왕위 계승과 관련된 설화
동명성왕은 부여에서 결혼한 예씨부인이 첫번째 부인이고, 졸본에서 결혼한 소서노가 두번째 부인이다.
동명성왕이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가장 큰 공적을 가진 사람은 소서너이다.
그런데 동명성왕이 차기 왕위를 장자 예씨부인의 소생 유리로 정하면서 한바탕 정치적 혼란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동명성왕이 사냥 중에 갑자기 실종되어 사망하면서 소서노 진영이 암살 의혹에 휩싸이게 되어 이에 두 아들 비류와 온조와 함께 마한의 북쪽 땅으로 가서 백제를 건국한다.
백제의 시조로 알려진 도모왕(都慕王)은 동명성왕이다.
그래서 도모왕의 일본 기록에 하백의 딸 유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하는데, 주몽 역시 해부루의 양자 금와의 아들이므로 해부루의 서손이다.
우태는 가면 쓴 사람이란 뜻으로 동명성왕의 배신을 나타낸 것이다.
소서노가 온갖 수발을 다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줬는데, 그녀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 대신 유리를 후계자로 삼았으니 가면 쓴 사람이란 표현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