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통계

 
방문
20240722
74
20240723
38
20240724
44
20240725
42
20240726
28
가입
20240722
0
20240723
1
20240724
0
20240725
0
20240726
0
게시글
20240722
2
20240723
0
20240724
0
20240725
1
20240726
1
댓글
20240722
0
20240723
0
20240724
0
20240725
0
20240726
0
 
카페 게시글
좋은 글 스크랩 `개구리 리더십` 광종.정관정요(貞觀政要) [포커스리더學]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35 14.11.25 10:2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포커스리더學]

움츠렸다 뛰는 '개구리 리더십' 광종

 

역사속 리더십 키워드-광종

과거제 실시로 지지세력 넓히고

후엔 황제 자처하며 숙청 단행

 

 

 

 

 

광년(光年) 춘정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왕이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을 물으니, 사천대(司天臺)에서 이르기를 "덕을 닦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했다. 이로부터 항상 정관정요를 읽었다.(동사강목 中)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에게 있어 큰 바람에 나무가 뽑혔다는 사건은 말 그대로 재앙을 뜻했다. 고려 초기, 이는 곧 허약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태조가 건국 과정에서 각 지방 호족의 딸들과 정략결혼정책을 펼친 까닭에, 태조 사후 고려는 호족 간 치열한 왕위 계승전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가운데 두 형의 요절로 인해 왕의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던 태조의 셋째아들이 고려 4대왕으로 오른다. 지방 호족중심이었던 고려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만들고, 정치 및 경제 개혁을 통해 500년 고려의 기틀을 잡은 광종이다.

태조가 재위 26년만인 943년 사망했을 때, 광종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이후 2대왕인 혜종이 즉위 2년 만에 사망하고 3대왕인 정종까지 4년 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자, 949년 그가 왕위에 올랐다. 오늘날 개혁가라는 측면에서 조선시대 정조와 비견되기도 하는 광종은 949년부터 975년까지 무려 26년 재위하며 고려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세력을 쌓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성장했을 때 비로소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그의 치세는 즉위년∼7년, 7년∼11년, 11년∼26년 등 세 시기로 크게 나눠진다.

첫 7년간 몸을 움츠렸고, 다음 4년여간 제도적 조치를 만들었다. 이어 말기에는 과감한 숙청까지 단행하며 왕권강화에 집중했다.

광종은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덕을 닦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었다고 한다. 당태종과 군신 사이의 정치적 논의를 묶은 정관정요는 군주들에게 있어 제왕학(帝王學)을 배우기 위한 '치도(治道)의 서(書)'로 꼽힌 책이다. 재위 초기, 세력을 만들어가는 동안 광종은 이 책을 즐겨 읽으며 개혁의 방안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은 즉위와 더불어 공역자들을 포상하며 쌀을 차등 있게 지급했다. 이는 호족에 대한 회유책인 동시에 왕권이 호족의 세력을 등급화한 것이기도 하다. 가능한 호족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향후 세력 약화를 위한 선행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또한 광종은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으며 새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갔다. 성종(成宗) 대 최승로는 오조치적평을 통해 "광종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 중국의 하ㆍ은ㆍ주 3대)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했다.

재위 7년 이후부터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제도적 조치가 먼저였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과거제, 공복 제정 등 광종대의 굵직굵직한 업적이 이때 나왔다. 일부 호족세력의 반발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광종은 주저함 없이 강행해나갔다.

광종 7년(956년) 시행한 노비안검법은 본래 양인이었던 이들 등 불법적 노비들을 조사해 해방시킨 것으로, 호족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중앙정부의 재정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종 9년(958) 실시된 과거제는 왕권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체계 설정의 기초 작업을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후주(後周)의 귀화인인 쌍기에 의해 건의된 과거제는 학문적 소양에 의한 관료제적 질서를 확립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거쳐 등용된 관리들은 이후 광종이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든든한 지지세력이 됐다.

이밖에도 광종은 백관의 공복을 제정해 관리의 공복을 네 가지 색깔로 구분해 차이를 나타냈고, 왕권강화와 직결되는 관제(官制)와 군제(軍制)도 개편했다. 아울러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부르고, 수도 개경(開經)을 황도(皇都), 사경(四京)을 사도(四都)라고 명칭을 바꿨다.

마지막 시기에 들어서자 광종은 강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호족세력에 대한 과감한 숙청을 단행했다. 발단은 960년이다.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과 역모를 꾀한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광종은 이들을 즉시 귀양 보냈다. 즉위 초기 온건한 정책을 펼친 광종은 크게 성장한 자신의 지지세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권한을 드러냈다. 과거제를 거친 유학자들은 물론, 불교세력, 시위군세력 등도 그의 개혁에 힘을 보탰다. 그의 개혁은 숙청대상이 정치적 경쟁자인 호족인 반면, 수혜대상은 일반백성이었다는 점에서 백성들로부터도 일부 지지를 받았다.

광종은 겉보기에 태조 왕건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닮은 인물로 기록돼있다. 사교성과 협상력이 뛰어난 반면, 냉혹한 면도 있었다는 평가다. 호족 숙청과정에서 그는 사적인 정을 배제한 채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숙청됐다. 이같은 점은 이후 그가 자신의 부인, 후계자 왕주까지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고려시대 최고의 개혁가로 만들었다.

광종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구세력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 입장에서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갔다는 점에서 극단적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부분적인 실패는 있을 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그의 개혁이 성공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고려시대 정치, 사회적 기틀이 이 시기에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가 이루고자 했던 부분들이 광종 이후에 더욱 발전해나갔기 때문이다. 광종이 없었다면 그 이후의 개혁도 없었다. 최승로는 5대왕의 평가를 담은 오조치적평에서 광종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으나, 그가 주장한 고려의 정치는 광종의 개혁이 있었기에 비로소 이뤄질 수 있었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 아시아경제

 

 

 

 

정관정요 - 지도자와 국민이 함께 읽는 '토론 정치'의 경전 [ 貞觀政要 ]

 

오긍(吳兢)

 

해설자 / 김원중(건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군신지도와 치세술의 경전 『정관정요』『정관정요』는 618년에 세워진 당나라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정치 철학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군주의 도리와 인재 등용 등의 지침을 적어 놓아 치세술(治世術)의 명저로 손꼽힌다.

『정관정요』는 모두 10권 4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1) 태종이 그 당시 역사가였던 위징(魏徵)2), 방현령(房玄齡)3), 두여회(杜如晦)4), 왕규(王珪)5) 등과 담소를 나눈 내용을 책문(策問), 쟁간(爭諫), 의론(議論), 주소(奏疏)로 분류하여 편찬했다. 각 권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권,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관한 논의.

제2권, 어진 관리의 임명과 간언의 중요성.

제3권, 군주와 신하가 거울로 삼아야 할 계율, 관리 선발, 봉건제.

제4권, 태자와 여러 왕들을 경계시키는 내용.

제5권, 유가에서 강조하는 인(仁), 충(忠), 효(孝), 신(信) 및 공평함에 대한 문답.

제6권, 절약과 사치, 겸양.

제7권, 유학, 문학, 역사.

제8권,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 형법, 부역, 세금 등을 논의.

제9권, 국외적인 문제인 정벌과 변방 안정책.

제10권, 군주의 순행이나 사냥 등에 있어 신중해야 됨을 강조.

 

『정관정요』는 요순(堯舜)시대부터 당나라 태종에 이르는 시대적 변화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즉, 과거와 현재의 변화상을 서로 비교하고 관찰함으로써 밝은 미래로 내달릴 수 있는 발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요 내용에 있어서는 통치자의 인재 등용을 통한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하고, 통치자와 백성들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로서의 관리의 의무, 민의를 반영한 정치 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목표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역사적 사건은 대부분 그것이 일어난 연도는 물론이고 달과 날짜까지, 또한 태종과 신하들이 논의한 연도까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대부분 문답 형식의 평이한 표현으로 이루어졌으나, 상소문의 경우는 경전의 어구를 종횡으로 인용하고 미사여구의 사용으로 난해한 부분 또한 적지 않다. 그 서술 방식은 『구당서(舊唐書)』6), 『신당서(新唐書)』7), 『자치통감(資治通鑑)』8), 『당회요(唐會要)』9) 등에 기록된 것과 비교할 때, 보다 깊이가 있고 상세하며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

 

 

유학을 중시하고 밝은 정치를 이끈 당 태종 이세민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본래 산서 지방의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남북으로 분열된 중국을 통일시키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일으켜 화려한 궁전이나 누각 등을 마구 지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혼란 속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이세민은 수나라 타도의 야망을 품고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이연(李淵)을 설득하여 병사를 일으켰다. 그는 먼저 설거(薛擧)ㆍ설인고(薛仁?) 부자, 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 이어서 강적 왕세충(王世充)ㆍ두건덕(竇建德)을 소멸시켜 617년에 장안을 점령했다.

 

이세민은 "군주는 배에 비유되고, 백성은 물에 비유된다. 물은 배를 떠가게 할 수도 있고, 물 속으로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말의 이치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후 군웅을 평정하고 통일을 실현시켰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 안팎에 불과했다.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초상

 

드디어 618년 당나라가 탄생했고, 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이것은 형제간의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건성은 세민의 공적과 덕망이 나날이 융성해지는 것을 보고 강한 질투심이 일어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를 하게 된다. 세민은 이 사실을 알고 건성과 원길이 입조(入朝)하는 것을 현무문에서 공격하여 죽였다. 세민은 626년에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그 당시 그는 29세였다.

 

태종의 정치철학은 유가의 민본이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유가에서 내세우는 예악(禮樂), 인의(仁義), 충서(忠恕),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실천하는 가운데 충분히 발휘되어 밝은 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유학을 숭상하여 공자에 대한 남다른 존경을 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자들의 학문적 여건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홍문관(弘文館)10)을 설치하였으며, 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백여 간(間)이나 증설하고 국자(國子)11)ㆍ태학(太學)12)ㆍ사문(四門)13)ㆍ광문(廣文)14)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을 증원했다. 그 가운데 서학(書學)과 산학(算學)에는 박사(博士)와 학생을 두었고, 여러 학과도 갖추었다. 태종은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여 열린 사고를 강화시켰다. 또한 노자의 성이 자기와 같은 이씨(李氏)라는 점에 따라 도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후에 불교의 역할을 중시하여 삼교정립(三敎鼎立)의 형세를 이룬다.

 

태종은 천하가 평정된 후, 수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위징(魏徵)과 같은 현명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문치(文治)를 하기에 힘썼다. 그는 특히 지식과 인재를 중시하였으며 스스로 독서에 힘썼는데, 독서를 하면 사람의 시야가 확 트여 스스로를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국가 경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한나라 유방의 학자 경시 태도에 큰 반감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공영달(孔穎達)15), 안사고(顔師古)16) 등과 함께 위상이 현저히 떨어져 가고 있던 유가 경전에 대한 재해석 작업의 일환으로 교정 및 주해 작업을 착수하여 오류를 바로잡는 공을 세웠으며, 사서(史書)의 일부는 스스로 집필하기도 했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특히 사랑하였고, 그 자신도 유려한 필적을 남겼다.

 

『정관정요』에 의하면, 그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어진 군주가 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으려 했고,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아꼈으며 형법을 신중하고 가볍게 사용하여 법제를 보존시켰다. 또한 문화를 중시하여 풍속을 좋게 바꾸고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이 그 농사철을 놓치지 않도록 했으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거울이 되어 시종여일 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고 근면한데다 검소했다.

 

특히 태종은,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지적한다. 먹줄이 있으면 굽은 나무가 바르게 되고, 기술이 정교한 장인이 있으면 보옥을 얻을 수 있듯이 시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은 신임하지 않는 자가 간언하면 비방한다고 생각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으면 봉록만을 훔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로 인해 성격이 유약한 사람은 속마음은 충직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신임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그가 제위에 오른 627년부터 649년에 이르는 24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치세를 '정관(貞觀)의 치세'라고 칭송했다. 『정관정요』의 「정체」에는 당시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관리들은 대부분 스스로 청렴한 생활을 하고 근신했다. 왕공이나 후비, 공주의 집안, 세력 있는 가문이나 간사한 무리를 통제했다. 이들은 모두 국법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행적을 가리고 감히 일반 백성들을 침범하거나 억누르지 못했다. 상인이나 여행객이 벽지에서 투숙하더라도 강도를 만나지 않았고 천하가 다스려졌기 때문에 항상 감옥은 텅텅 비었다. 말과 소는 산과 들에서 방목했고 외출할 때는 몇 개월씩 문을 걸어 닫지 않았다. 해를 거듭하여 농업이 풍작이었으므로 쌀 한 말이 3, 4전에 불과했고 나그네는 장안에서 영남까지, 산동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닐 필요 없이 길에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산동 마을로 들어서면 나그네는 후한 대우를 받았으며, 나그네가 떠나갈 때는 길에서 필요한 것들을 주었다. 이러한 다스림은 모두 옛날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관지치'는 당나라 통치의 견실한 초석을 만들었으며, 태종을 중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게 했다.

그러나 정관 후기의 정치 상황은 이전 시기만 못했고, 태종 본인 또한 사치와 방만함을 면하지 못했다. 게다가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만년의 고구려 원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되었으며, 마침내 측천무후(則天武后)17)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의 찬란한 치적은 서서히 빛을 바래고 만다.

 

『정관정요』 집필의 배경중국인들의 역사 중시 경향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 당나라 때의 정사 편찬은 그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게다가 역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역사적 기록 역시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정관정요』는 현종 개원(開元) 후기에 완성되었다.

 

오긍(吳兢)이 『정관정요』를 편찬하게 된 동기는 측천무후의 전횡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고종이 즉위한 지 수년 후, 측천무후는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직접 정무를 맡아 보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고,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 관리를 등용하여 세력을 구축한 다음 구 귀족층을 배척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아들 중종과 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그에게 반항하여 난을 일으킨 이경업(李敬業)과 황족들을 무력으로 탄압했다. 뿐만 아니라 어사(御史)와 밀사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불경을 위조하고 부서(符瑞)18)를 날조하여 무씨(武氏)의 천하를 합리화시켰다.

 

 

 

 

측천무후(則天武后)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여,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지배했다. 주나라의 전통에 따라 역법(曆法), 관명(官名)을 새로 정하는 한편, 북문학사(北門學士)19)들에게 명하여 『신궤(臣軌)』, 『백료신계(百寮新誡)』 등을 편찬하도록 했고,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여 인재를 모았다. 또 인심을 얻기 위하여 관작(官爵)을 마구 뿌렸으며 명당(明堂), 천당(天堂), 천추(天樞), 대불(大佛)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워 국위 선양에 힘썼다. 그러나 말기에는 장역지(張易之) 형제 등 총신들이 정사를 그르쳤고, 705년 장간지(張諫之)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 왕조가 부흥하였으며 얼마 후, 측천무후는 병사하였다. 그녀는 정적들에게 악랄한 책략을 구사하고 잔인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요승(妖僧) 회의(懷義) 및 장역지 형제와의 추문을 남기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한 오긍은 역사의 운명을 주재하는 최고 통치자 집단의 잘못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반 백성은 물론 국가의 사직에 막대한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통감하였다. 오긍은 태종의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을 가슴에 새기고 '정관지치'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사관으로서 자신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은 중종에게 당나라 재건에 필요한 정치철학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후의 명작 『정관정요』를 집필하여 중종에게 바치게 된다.

 

그러나 지도자적 역량이 부족했던 중종은 오긍의 충정을 저버리고 황후 위씨(韋氏) 일족에 의해 시해된다. 오긍은 『정관정요』를 다시 현종에게 바쳤다. 그래서 『정관정요』는 중종에게 바친 초진본(初進本)과 현종에게 바친 재진본(再進本) 두 가지가 있다는 추론도 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오긍은 『정관정요』를 집필하면서 중국인의 역사 서술 원칙인 춘추필법(春秋筆法)20)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역사가에게는 어떤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선행과 악행, 명예와 치욕 등에 관한 평가와 역사적 위치 등을 정할 수 있는 재량권이 부여돼 있었다. 사관으로서의 오긍의 이러한 권한은 『정관정요』의 내용 속에 십분 발휘되어 태종의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까지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신하들의 간언을 통해 나타난다.

 

나오는 말

 

인간의 몸이 두뇌와 사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듯이, 군주는 반드시 신하의 보좌를 받아야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목적에 이를 수 있다. 한배를 타고 있는 군주와 신하는 선을 행하고 업적과 인덕을 쌓는 일에 함께 참여해야만 장기간 나라를 지속시킬 수 있다. 군주는 천하가 안정된 후에도 창업 초기처럼 성실하고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며,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여 기초를 공고히 해야 한다. 나랏일을 처리할 때는 신하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처리하도록 해야 되는데 이것이 곧 적재적소에 관리를 배치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군주를 보좌하는 신하는 군주의 뜻에 영합하여 아첨하는 것을 피하고 충언을 해야 한다.

 

이러한 군신간의 신의를 전제로 한 격의 없는 토론을 주로 기록하여 통치술의 전형을 제시한 『정관정요』는 과거에는 한 왕조를 짊어졌던 제왕들의 통치 철학이었고, 오늘날에는 한 국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의 올바른 정치관을 이끌어 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현대에 특히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이후 여러 왕조에서 꾸준히 간행되어 애독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제왕의 통치 철학으로써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당나라의 선종(宣宗)은 이 책의 내용을 병풍에 써서 널리 읽도록 했으며, 금나라의 세종(世宗)은 각본으로 펴내어 권장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는 이 책을 애독하여 「독정관정요(讀貞觀政要)」라는 시와 「정관정요서(貞觀政要序)」라는 글을 지었고, 또 『당태종론(唐太宗論)』이라는 책을 썼다. 또한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정권을 잡은 시대적 상황이 태종이 정권을 잡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분열에서 통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므로, 『정관정요』를 애독하여 일본 통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참고하였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당나라는 봉건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신과 제왕 사이에 허물없는 토론 문화가 이루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려는 지도자의 모습, 그리고 관리들이 오로지 백성들과 국가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진지한 자세를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2. 정치의 근본이란 무엇이며, 만인의 모범으로서 지도자가 보여 주어야 할 진정한 상은 무엇인가?

정치의 근본은 민본(民本)이다. 제아무리 제왕이라도 해도 그 역시 백성 없이 혹은 신하들 없이 독불장군으로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도자의 자질은 우선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데 있으며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의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아량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용기도 갖추어야 한다.

 

3. 성실과 신의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덕목 중 하나가 되는 이유는?

성실한 자는 불가능한 일이 없고 신의가 있는 자는 고독하지 않기에 성실과 신의를 모두 겸비하고 있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기에 그러하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정관정요』, 오긍 지음, 김원중 옮김, 현암사, 2003.

 

 

각주

 

1) 『정관정요』 원본의 전체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군도(君道) : 군주의 도리, 제2장 정체(政體) : 정치의 근본, 제3장 임현(任賢) : 태종의 명신, 제4장 구간(求諫) : 간언의 장려, 제5장 납간(納諫) : 간언의 수용, 제6장 군신감계(君臣鑒戒) : 군주와 신하의 계율, 제7장 택관(擇官) : 관리 선발, 제8장 봉건(封建) : 봉건제, 제9장 태자제왕정분(太子諸王定分) : 적자와 서자의 구분, 제10장 존경사부(尊敬師傅) : 존경받는 스승, 제11장 교계태자제왕(敎誡太子諸王) : 태자와 왕자 교육의 중요성, 제12장 논규간태자(論規諫太子) ; 태자 바로잡기, 제13장 논인의(論仁義) : 인의 도덕, 14장 논충의(論忠義) : 충성과 도의, 제15장 논효우(論孝友) : 효도와 우애, 제16장 논공평(論公平) : 공평함, 제17장 논성신(論誠信) : 성실과 신의, 제18장 검약(儉約) : 검소함, 제19장 겸양(謙讓) : 겸손과 사양, 제21장 신소호(愼所好) : 천자의 기호, 제22장 신언어(愼言語) : 말조심, 제23장 두참사(杜讒邪) : 아첨과 무고의 단절, 제24장 회과(悔過) : 뉘우침, 제25장 사종(奢縱) : 사치와 방종, 제26장 탐비(貪鄙) : 탐욕, 제27장 숭유학(崇儒學) : 유학의 숭상, 제28장 문사(文史) : 사관의 임무, 제29장 예악(禮樂) : 예악 제도, 제30장 무농(務農) : 농업 장려, 제31장 형법(刑法) : 법률, 제32장 사령(赦令) : 사면령, 제33장 공부(貢賦) : 공물과 조세, 제34장 변흥망(辯興亡) : 흥망의 갈림, 제35장 정벌(征伐) : 정벌에 관한 사항, 제36장 안변(安邊) : 변방의 안정, 제37장 행행(行幸) : 지방 순시, 제38장 전렵(?獵) : 사냥, 제39장 멸상(滅祥) : 미신의 금지, 제40장 신종(愼終) : 신중한 끝맺음.

2) 위징(580년~643년)은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정치가였다. 『정관정요』의 「임현」편에 자세한 사적이 실려 있다.

3) 방현령(579년~648년)은 당나라 초기의 대신으로 방언겸(房彦謙)의 아들이며 자는 교(喬)이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박학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멸망이 머지 않았음을 예견하기도 했다. 『정관정요』의 「임현」편에 자세한 사적이 실려 있다.

4) 두여회는 경조두릉(京兆杜陵) 사람으로 당나라 초기의 대신이며 자를 극명(克明)이라 했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 보부양위(補?陽尉)를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사임하였다. 그 후 당고조가 수도를 평정하고 진왕(秦王) 이세민이 문학관(文學館)을 세워 18학사를 두었을 때 두여회는 그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 전에 태자 건성(建成)과 원길(元吉)의 모함을 받아 방현령 등과 함께 쫓겨났다. 그러나 후에 다시 방현령 등과 계획을 세워 변을 평정하고 태자좌서자가 되었다. 또 병부상서로 승진하였으며 채국공(蔡國公)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정관 3년에는 상서좌우복야가 되어 방현령과 함께 조정을 관장했으며, 각종 전장 제도는 대부분 이 두 사람의 상의에서 나왔다. 역사책에서는 "현령은 지모에 뛰어나고, 여회는 결단력이 뛰어나 그 시대 사람들은 훌륭한 재상이라고 말하고, 언제나 방두(房杜)라고 칭했다"고 했다.

5) 왕규는 태종 때 간의대부가 되었으며, 방현령 등과 공동으로 정사를 보조하였다. 자는 숙개(叔?)이며 「임현」편에 자세한 사적이 보인다.

6)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로서 200권이며 당나라 고조 무덕 원년(618)에서 애제(哀帝) 천우(天祐) 4년(907)까지 290년간의 역사 기록물이다.

7)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로서 225권으로 기(紀), 지(志), 표(表), 열전(列傳)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북송의 106년에 완성되었으며 17년이 소요되었다.

8) 북송 사마광(司馬光)이 쓴 것으로 29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원전 403년부터 959년까지 1,362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사마광에 의해서 마무리된 것은 사실이지만 집단 저작의 일환으로 사마광 이외에 3인의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자치통감』은 편년체의 통사로서 그것의 내용은 정치와 군사의 역사적 사실 위주로 하고 있으며 역대 군신간의 치란, 성패, 안위 등의 자취를 보여 줌으로써 역사를 통해 후인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강하게 배어 있다.

9) 당나라 전장(典章) 제도를 기록한 전문 서적으로 100권이며 북송 때 왕부(王溥)가 지은 것이다.

10) 당나라 고조 무덕 4년에 문학성에 수문관(修文館)을 설치했는데, 9년에 태종이 즉위하여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이 곳에는 도서 20만여 권이 소장되어 있다. 상정학사(詳正學士), 강경박사(講經博士), 교서(校書)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도서 교정, 학생 교육을 관장하고 조정에서 예의를 제정할 때도 참석했다.

 

11) 국자학이다. 중국 봉건시대 중앙교육 관리기관이면서 최고 학부이다. 당나라 때, 국자학에서는 문무 3품 이상의 자손들에게 교육시켰다.

12) 국자학과 함께 최고 학부이지만, 교육 대상에 있어 차이가 있다. 태학에서는 5품 이상의 관원의 자손들을 교육시켰다.

13) 사학(四學)이다. 서주시대에는 왕성에 설치한 대학에 태학과 동ㆍ남ㆍ서ㆍ북 사학이 포괄되었다. 후대에도 이 제도를 이어 받았다. 당나라 때는 사문학에서 7품 이상의 자제와 보통 집안의 자제를 가르쳤다.

14) 광문관(廣文館)이다.

15) 자는 중달(仲達)이고 경학에 통달했으며, 셈에 뛰어났다. 국자박사(國子博士),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정관 초, 태자우서자가 되었다. 일찍이 위징(魏徵) 등과 『수사(隋史)』를 편찬했고, 태종의 명령을 받아 안사고(顔師古) 등과 함께 『오경정의(五經正義)』 180권을 편찬했다.

16) 당대의 저명한 학자로 이름은 주(?)이다. 안사고는 그 당시 유학에 학파가 많고, 장구를 해설한 저작 또한 번잡하다는 인식을 한 당 태종의 조서를 받아 국자좨주 공영달 등의 유학자들과 함께 『오경』의 소의(疏義)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모두 180권으로, 『오경정의(五經正義)』라고 이름했으며, 국학에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다.

17) 측천무후는 본래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녀는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간계를 써서 황후 왕(王)씨를 모함하여 쫓아내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다.

18) 상서로운 징조로서 부상(符祥)이라고도 한다.

19) 이들을 위해 문학관을 설치하였다. 이 문학관에서 경전과 역사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을 학사(學士)라고 불렀다.

20) 역사적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정확하게 직서(直書)하고 포폄(褒貶)하며 그것으로서 가치판단을 나타낸다는 것.

 

/ 네이버 지식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