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상태 / 황유원

[정대구]

백지 상태 /  황유원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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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에 강을 건너온 사람. 머리도 하얗고, 앞도 하얗고, 지나온 곳도 하얗다. 그리고 그 백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인간의 황혼에 대한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국민일보 [시가 있는 휴일] 2023.11.16

[정대구]

황혼의 설경을 잘 묘사했네요 추천합니다.

[심송]

머리숱이 적은 저는 아름다운 작품이 어려울것 같아요

[정대구]

엏, 별 걱정을.
실제 머리숱이 많건 적건 그게 무슨 상관
아름다운 시는 상상력으로 창작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