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올겨울 사상 가장 혹한의
날씨였다.
게으름이 보장된 일요일의 아랫목, 따끈한
밥상, 내 멋대로 해도 따스하게는 보낼 수 있었을 완전한 하루.
그것 다 마다하고 나는 무얼 찾아 산으로
갔던 걸까.

전북 장수 장안산(1,237m)은 내가 산을
다닌 이후 가장 서러운 산이었다.
아니 가장 서러운 날이었다.
그 날씨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싸릿대 같은 매운 손끝에 하루종일 뺨을
맞았다? 그것도 오른뺨만 원없이 맞았다?
내가 맞은 그날 바람
이야기다.
궁금한 것은, 인간은 그런 바람 앞에 왼뺨을 내밀며
뒷걸음을 쳐야 하나,
그저 속수무책 왼뺨이 몰라야 한다며 성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 이다
맞아도 맞아도 살아서 내려가야 하는 아득한
비애.
그 속에 어찌 눈산의 적요함, 겨울바람의
상쾌함, 말 달리는 호쾌한 산줄기들이 눈에 들 수 있겠나.
그럼에도 산은 선물이 많았다. 매운
바람이 끝나는 자리에는 내리막 빙판의 아찔함까지 덤으로
주어
인간의 태초, 즉 네 발로 걷다가 서서히
일어섰던 직립의 진화까지 경험하게 해 주었다.
백두대간 옆구리를 관통해야 했던 서러운
산행, 아니 고행이란 것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산.
이에 걸었으되 어찌 걸었으며, 돌아왔으되
아득해져버린 그날 하루를 이 따스한 방에 앉아서는
도무지 되찾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지금도 선연한 건, 뿌루퉁하게 산길
터덜터덜 걸었던 내 온갖 후회의 기억 뿐...

스쳐가는 차창 밖 풍경이 맵다 맵다
말하였으나,
최근의 무료해진 날씨 탓에 옷차림이
반쯤 헐거워진 분들도
많았다.
산그늘로 접어드니 음습해오는 불길한 날씨
얘기.
같은 말도 방 안에서 들을 때와 산그늘
현장에서 들을 때가 또한 다르니,
비로소 센 공기 앞에 섰음을
실감하겠다.
산행 시간이 너무 일러 근처의 논개 생가를
보자고 차에서 부려진다.
차안에서 내리자마자 훅, 달려오는
얼음바람.
얼음장 얼굴에 실금을 그리는 바람이 오소소
뼛속까지 파고든다.
바람은 원래 지나가야 하건만, 심각하게
파고드는 질문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바람이다.
청자의 낯빛에 그려진 잔금이 내 얼굴에서
쩍쩍 갈라지고 있음을 덜덜 떨며 깨닫는다.

겨우 9시를
갓 넘겼을까.
논개 생가지에 내리니 지방마다 내로라하는
대표 인물들의 복원 현장이 나타난다.
어딜 가나 비슷한 구조물들이라 특별한 안목을
발견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옛사람을 대신하는 지금 사람이 결국
오늘의 그곳 역사를 말함이런가.
요청하지도 않았건만, 이 추운 날 이른
아침에 해설사 선생님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자그마한 체구에 이 추위에도 장갑을 끼지
않으신 것이 몹시 신경에 쓰였지만, 같은 입장이라 선생님을 따른다.
우리가 의령이니, 이곳의 논개와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조우하는 기분이다.
기념관 건물로 들어서서 이야기를 듣자니
추위는 물렸으나 시간이 짧아진다.
간추려 이야기를 끝내려 할 때 선생님이
의령에 잘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신다.
그것도 나 또한 잘 아는 분. 그 분 입에서
우리 문협의 소설가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시간은 짧아졌으나 공간이 좁혀지는 것을 새삼
느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꼭 연락하자며 사무실에
들러 명함을 찾으시는데,
방금 전까지 두었던 명함이 발이 달린
것인지, 한참을 찾으신다.
같은 특징을 가진 여자들끼리 잘 아는
공통점이라 바깥의 버스가 나 하나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서둘지는 않았다.
드디어 찾은 명함에서 혼불의 작가 최명희와
이름이 같은 분임을 알고 호주머니에 명함을 넣었다.
지갑을 갖고 오지 않았기에 배낭 속에
함부로 던져 넣기엔 안전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발이 달린 명함에게 호주머니
또한 안전한 곳이 아니었으니, 산행 중 장갑낀 손을 빼다가
백두대간 고을에 온몸을 실어 나르는 된바람
속으로 명함은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그때의 명함은 발이 아니라 날개를
달았으리라.
다행인 건, 핸드폰 속에 내 명함 하나를
건넸다는 것이다. 한번도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건넨 적 없는 내 명함.
* 며칠이 지난 어느날, 그분이 내
카카오스토리에 친구 신청을 보내 왔고,
나 또한 의령의 소설가 박래녀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 드렸다.
'두 분 어쩐지
닮으셨다.'

사람들은 평소 제 습관을 남 주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그 습관마저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현상 앞에서는 습관이란 역시 운명보다 사소했다.
산에서 사진을 많이 찍기로 가장 유명한 미소
님이 이번 산행에서 예의 그 높은 옥타브의 웃음꽃도 피우지 않은 채
사진기 앞에 줄 세우는 것마저 마다해가며,
열심히 산길만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즐길꺼리를 찾아내며 즐거이
도취했던 평소의 습관을 이 거대한 추위 앞에 제대로 버렸다는 뜻이 되며,
이는 우리 산행 역사에서 꼴찌 미소님의 산행
예상시간을 한 시간이나 단축시킨 반전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줄기차게 몰아치는 바람 앞에
사람의 즐거움은 겨울에서 가장 먼 봄 이야기나 다름없었고,
나로 말하자면 발음이 새어버려서 도무지
웃기조차 못할 형편이었으니,
이날은 오직 요란한 겨울에 꼼짝없이 으깨진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만 기억에 담았던 것 같다.

무령고개~괴목갈림길~1,2,3전망대~장안산(1,237m)~중봉~하봉~당동갈림길~덕천고개~906봉~범연동
입구
(산행거리 약
9km, 5시간)

구름은 언제나처럼 한가로이 하늘강을
흘러가지만, 갈길 바쁜 사람에겐 별 도움이 못되었다.

장안산 정상이 보여도 그 너머를 가야 완성될
산행의 고단함.
오른쪽 산자락이 허허로우니 이곳을 다시 뺨
맞으며 가야 할 것에 걱정이 태산 같다.
조금의 바위만 있더라도 그 작은 언덕에 기대어 몸이라도
숨기겠는데 흔한
바위조차 이곳에선 귀하다.
바람이 멀쩡했더라면
틀림없이 능선 바라보며 백두대간 줄기 어느 언저리를 찾기라도
했겠지만,
앞서 간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저 의연한 척
나아가야 할 불쌍하게 추운 영혼만이 저 길을
가늠한다.


나의 즐거웠던 놀이의 기억은 꽁꽁
얼어버렸다.
썰매도 싫고 웃기는 더
싫었다.
그럼에도 그 기분 꺼내어 미끄럼을 타는 분,
그들은 나에 비해
청춘이다.

거기서 뭐하시나요? 왜 집 놔두고 이글루
닮은 천막 집 하나 바람 속에 지어놓고
지나가는 사람 걱정하게 만드시나요?
정말로 궁금하여 노크라도 하고 싶은데, 친히
바람을 들이며 지퍼문을 열어주신다.
두 사람이 온실 같은 화색을 뿜으며
내다보는데....
그냥 걱정시키지 말고 일찍 하산하라
하고 싶지만 나는
오직 구경꾼 신분일
뿐.
표정까지 대단하단 반응을 보이는 것 외엔 할
게 없다.
아, 인생은 왜 온갖 삶이 다 멋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유나
행복이라는 다양한 견해까지 내려놓았는지 모르겠다.

생수를 가져 간 건 혹시 있을지 모를
목마름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배낭 속에서 주둥이부터 얼지도 모른다는 신기함을
위하여서다.
믿거나 말거나.

어떡하든 결국 산에 들었던
몸, 산에서 나왔다.
모두 꼴찌에게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는 듯
이렇게 일찍 하산하셨다고들 해주셨다.
가장 힘들었던 겨울이었다.
눈 앞에 흰 눈의 가루가 빛으로 떠다니고 있음에도
사진이나 그에 반한 기쁨 같은 것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혹한에 날아다니는 바람의 알갱이를
원망스레 바라본 기억밖에 없다.
내리막 빙판길에서 네 발로 기었기에 다음 몇 날 동안 온몸이
아팠으니 휴유증 또한
컸었다.
이후 봄 같은 날들이 제법
찾아들어
어느덧 그 하루의 기억도 옛이야기
같아졌다.
이제는 그런 추위 다시 만나지 않을 날만
남았기에 후련하게 보낼 수 있겠다.

함양 읍내에서 얼큰한 순대국을
저녁으로 마련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너무 이르다는
거였다.
어디 한 곳 둘러보자는 말을 평소엔 자주
하였지만, 또 함양엔 내가 가보자고 소매 끌고 싶은 곳이 아주 많았지만,
무엇보다 나와 친분있는 분들이 그곳엔 유독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날씨
공포였으니, 선뜻 그분들에게 전화를 걸기가
망설여졌다.
추운 날 찾아오는 손님이 얼마나
난감할지 말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해설사 동기 회장인
양기영
해설사님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시간과
추위는 우리에게도 걱정이었기에.
개평 정여창 고택의 고택지기처럼
언제든 그곳에
가면 집의 내력과 한옥의 멋스러움을 설명해주는 그를 만날 수
있다.



예로부터 선비의 두 고을을 꼽을 때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였다.
일두 정여창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 김굉필,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성리학사의 '동방 5현'으로 추앙을 받는 학자이다.
개평마을로 접어들면 예사롭지 않은 솟을대문
한옥들이 마을의
품격을 더해주는데 일두 고택은 마을의 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있다.
고택의 솟을대문엔 다섯 명의 효자와 충신을
배출했다는 다섯 개의 '정려'패가 걸려
있으며,
고위 관직이나 성현들의
출생지에 세운다는
'하마비'에서부터 문턱에 깔린 바닥돌 모양까지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갖추고
있었다.
대하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소로
알려졌으며, 하동에
있는 최참판댁은 이 집을 모델로 하였다는 것을 덤으로 얻는다.


고택의 마당에 들어서면 우람한 사랑채가 그 위용을
과시하는데,
이번 발걸음에는
불조심 현수막이
흥선대원군이
쓴 '충효
절의'를 가리는
민망한 일이
연출되고 있었다.
문화재를 아껴야 한다는 취지야
이해하지만, 문화재를 커다랗게
가리며까지 전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 봄 일두고택에 왔을 때
대문간에서
사랑채의
모습을
담은 적 있어 위 두 사진을 대체한다.

자연을 집 안으로
모신다는 의미를 지닌
일두고택의 석가산으로
소나무 한 그루가 걸어 들어와 있다.


아름다운 곡선의 문지방을 넘어 오면 고요한
기품이 흐르는 안채 마루가 단정하다.
추운 날씨에 햇볕이란 그저 탐스러울 뿐, 언
몸을 어루만질 수는 없었다.

일두고택의 명당설을 말없이 알려주는 특이한
형태의 문필봉이 고택의 곳간 너머로 둥그름히 솟아 있다.
마치 해처럼 봉긋하고 사과처럼 어여쁘다.
저 산의 꼭대기 나무 몇 그루가 꼭지에
매달린 잎사귀처럼 푸릇하니 참 특이한 형태이다.
하루 얼었던 몸은 함양 중앙시장 내
병곡식당에서 혀가 데일 뻔한 순대국으로 풀 수 있었다.
입천장을 넘어가는 뜨거운 국물에 산에서의
기억도 연기처럼 허물어지는 기분.
장수와 함양 사이 고개 하나 넘었더니,
어느덧 겨울 가고 봄이 오는가.
그날 하루 병마와 싸우듯 지나고나니 봄이
꼬무락꼬무락 기지개를 켜는 요즘이다.
그날의 일이 꼭 아지랭이만
같다.
첫댓글 지난 2월의 기록을 3월에야 띄웁니다. 박래녀 샘 반가운 분 지면으로나마 만나셔요.
김명희 소설가를 잘 알지요. 장수의 산골에 가서 하룻밤을 유하고 오기도 했답니다. 우리집에도 다녀가셨어요. 장수질그릇 세트도 명희 샘이 선물한 건데. ㅎㅎ
사진 보니 여전해요. 명희 샘은 늙지도 않나.ㅎㅎ 고마워요. 인선 샘! 혹 명희 샘 여기 들어오면 내 홈으로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