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烙 / 최운숙
인두가 춤을 춘다. 불덩이를 안고 종이 위를 징검징검 걷는다. 날이 힘차게 오르내리고 몸통을 뉜 인두가 비탈진 면에 평평하게 낙을 놓는다.
장인이 손풀무를 돌린다.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화로 속 숯이 인두를 달구고, 인두는 불과 함께 종이 위에서 낙화한다. 흰 여백이 산이 솟고, 바위를 품고, 떨어지는 폭포수를 안는다. 낙을 놓는 빠른 손놀림에 눈을 뗄 수 없는 숨 막히는 찰나, 장인이 휘두르는 불의 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진다.
여덟아홉 살쯤 엄마를 따라간 장터에서 낙화를 처음 보았다. 농기구 가게 옆 모퉁이에서 할아버지가 문패를 새겼다. 진열판 위에 한자로 새겨진 패와 빈 판이 주인을 기다리듯 줄지어 섰다. 긴 수염을 한 할아버지는 달군 인두로 사각 나무판을 후벼 팠다. 나무는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깊숙이 패었다. 밝은 나무에 검게 찍힌 이름이 또렷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글자지만 문패가 근사해 보였다. 엄마는 집도 사람처럼 이름이 있어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알린다고 했다. 때로 대문에서 사람을 기다린다고도 했다. ‘아, 그래서 우리 마을 최부잣집 이름표를 보러오는 사람이 많은 거구나. 나도 커서 대문에 아버지의 장구를 달아줘야지’ 생각했다.
수학여행에서 다양한 낙화를 보았다. 타원형의 나무에 물레방아가 찍혔고, 커다란 나무판에 예수 그림과 풍경화, 초상화, 하트모양 나무판에 새긴 그림이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그림이 그려진 주걱과 책갈피로 쓸 수 있는 작은 소품을 샀다. 마음을 담은 선물로 제격이었다.
낙화 장인의 전시실을 찾았다. 입구에 그림 그리는 곳이 있고, 안쪽으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생동감 있는 선과 풍부한 질감으로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낙화가 놀랍다. 천천히 둘러보다 활 등 모양의 굽은 선으로 그린 산수화에 눈길이 멈췄다. ‘하산도’라는 이 그림은 한지에 그린 낙화다. 냇물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풍경화로 산 능선마다 옅은 운무가 내려앉았다. 짧은 선의 우모준이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어 시선을 끈다. 멀찍이 바라보다 아득한 그 정취에 빠져 정신이 몽롱하다.
장인이 따뜻한 차를 내민다. 투박하고 거친 손이 낙화와 걸어온 길이 담겼다.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안는다. 주인의 외길 인생이 전해온다. 장인이 낙화를 선보인다. 육면체 나무속에 하트모양이 파닥거린다. 나도 장인을 따라 인두 촉을 세운다.
인두 속으로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친구는 오른쪽 팔에 붉은 장미를 새기고 나는 왼쪽 어깨와 눈썹 위에 검은 달을 새겼다. 장미와 달이 우리를 아름답게 보이며 어떤 상황에서 방어해 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은 빤히 쳐다보거나 흘깃흘깃 보며 쏙닥거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없애려 했지만, 낙형처럼 찍힌 그림은 지워지지 않는다. 숙명처럼 매달린 낙화장인 앞에서 나는 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만지고, 그리고, 빚는 체험을 통해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내 안의 꿈을 두드린다.
먹과 붓을 대신한 태움이 신비롭다. 태우며 번지는 빛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색으로 오직 태워야만 나타나는 색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어디쯤의 색일까. 옅어지다 짙어진다. 불의 그림을 통해 태곳적의 주술사가 그랬듯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치르는 것인지 인두를 잡은 손이 종이 위에 경계의 세상을 올려놓는다.
나뭇결이 촘촘하고 단단한 오리나무가 낙질을 기다린다. 장인의 손에 들린 인두가 다가온다. 나무도 사람을 알아보는 법, 비우고 가벼워져 결만 남긴 나무는 주인의 불길을 받아들인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 속에 한 필치 두 필치 이어진다. 관음보살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는 타는 고통을 참으며 뜨거움을 끌어안는데, 그것은 자기 삶이 구현하지 못한 세계이다. 자신을 온전히 버린 후 다시 태어나는 생명으로 불멸의 기도가 담겼다.
모든 예술가는 작품과 함께 진화한다. 해바라기, 붓꽃, 목련, 반 고흐가 그의 손에서 재탄생할 때 작가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다. 사라져가는 전통 회화인 낙화를 잇는 장인의 손길도 진화한다. 어제보다 빠르고 거침없는 손놀림은 전설이 되지 않기 위한 절박함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붓을 든다. 매끄러운 글자가 자르르 펼쳐질 것 같은 마음과는 다르게 손은 얼어붙었다. 붓으로 나를 다스리거나 누구를 감싸준 적이 없으니 점 하나를 찍는 일이 고된 훈련이다. 사람마다 가슴 저 밑바닥에 불씨 하나 안고 산다. 불씨를 깨워 명작을 만드는가 하면 세대를 잇는 길을 놓기도 한다. 느리기 그지없는 나도 어느 한때 솟구치듯 타오르는 열정이 있었을 터, 그날을 휘잡아 불씨로 써 볼 날이 언제일까.
자판을 눌러 낙烙이라 쓴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종이 속 세상이 한 번쯤 자신을 불살라라, 새로운 세계를 그려보라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