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북한 방송이 말하는 광주사태이다.
저 의견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게 좌경화로 세뇌당한자들이고
또 방송에 나오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길래 광주에 왔었다고 하는것일까?
경악! 북한군 광주사태시 남파 사실로 밝혀져! 광주시민의 피해와 희생의 원인과 북한의 대남공작 실체 규명의 단초 백승목 컬럼리스트 (hugepine@hanmail.net) 2012.09.27 23:43:13
사진설명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 위치한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 구굴지도에서도 위치확인 가능
경악! 북한군 광주남파 사실로 밝혀져
북한인권운동가 김주호 박사(북한난민보호협회 대변인 57)씨는 27일 오후 원로종교인과 애국단체의 성원아래 서울 정동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남파 개입됐다는 증거의 일부를 공개 했다. 이들은 자료 공개에 앞서서 발표한 성명에서,“북한군 개입 증거발표로 우리의 공적(公敵)이 북한군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해“우리 내부에 새로운 갈등 대립, 불화와 반목의 불씨가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광주시민에게 2중 3중의 고통과 억울한 희생을 강요한 가해자의 정체를 가려내자”고 주장 했다.
▲ 사진설명
홍성표 리진혁 등 (158명) 외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기록 된 4m 높이의 추모비
성명은 진실의 발견을 위한 이번 발표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게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국민대화합과 국민대통합을 위한 것이며, 북한이 펼친 대남공작의 진실을 밝혀 다시는 광주사태와 같은 불행이 북한의 대남공작에 의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였다.
김 박사는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정찰국 특수부대가 대거 침투했다가 많은 요원이 남한에서 사망, 북으로 귀한하지 못하여 시신 없는 가묘(假墓)인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이하 열사묘)’에 “홍성표,리진혁 등 (이름이 기록된 158명)동무 외에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새겨져 있는 묘비 사진을 공개하였다.
남한에서 5.18사태가 끝난 1980년 8월경에 조성한 함경북도 청진시 락양동 소련군해방탑 인근에 위치한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는 일반인도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며, 묘지 전면 중앙에 세워 진 추모비는 1998년 2월 8일 묘지를 새로 단장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묘지의 위치는 구글지도에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추모비에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영웅들의렬사”라는 기록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며, 158명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사망자의 ‘죽은 날’이 1980년 6월 19일로 기록돼 있어 이날의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종결일로 남파 됐다가 사망한 자들의 사망일을 일률적으로 6월 19일로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법적 증거능력을 충분히 갖춘 자료를 다수확보하고 있다며, 앞으로 몇 가지 자료를 보완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2차 발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한 방청객이 “사망자가 몇 십 명도 아니고 몇 백 명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니냐?”고 의문을 표시하자, 김 박사는“확실한 자료와 근거에 입각하여 나온 숫자이기 때문에 많다 적다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면서 지금까지 북한 군 600명 개입설과 광주인근산간에 시신 수백 구의 암매장설이 꾸준히 나돈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사망자 명단이 늘어 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참가자는 1960년대 이래 북한의 도발양상과 규모의 변천에 대하여, 1965년 이전에는 1~2인조로 아군 전방에 침투, 정찰을 위주로 했으나, 1965년 이후 3인조 5인조 무장간첩으로 규모와 양상이 변천 해 오다가 1967년 에는 7인조 9인조로 규모가 늘고 군산 벌교 등 우리의 후방까지 침투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1968년 1월 21일에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왔을 때 그 규모와 대담성에 놀랐고 10개월 뒤 11월에는 울진삼척 산간 오지에 무장공비를 120여명이나 침투시켜 우리를 아연 실색케 했다며 그때로 부터 만 22년이 지난 1980년 광주사태에 600명만 침투 시켰다면 많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이름이 확인 된 사망자가 300여명에 이른다면, 이는 누구라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숫자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러나 북한 내부에서 작성한 문건에 기재 된 명단이 추모비에 새겨진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한 것으로 보아 설사 숫자가 예상(상식수준) 이상으로 많다고 할지라도 이를 정면으로 부정할 근거나 논리는 없을 것이다.
발표 현장에서 묘지 및 묘비 사진 외에 별도로 제시한 몇 가지 자료를 살펴 본 서석구 변호사는 이정 도면, 법적 증거력을 갖는 데에는 하자가 없는 자료라고 평가 하면서, 문제는 일반국민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증거와 자료가 보강되어 누구도 부정하거나 반론을 펴지 못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파 됐다는 데에 회의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면서 올해대선에 온갖 공갈협박을 다하고 있는 북한이 이 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도발 해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정부와 군은 물론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젊고 강한 신문-독립신문/independent.co.kr]
북한특수군 5.18광주에서 무더기로 죽어 매장됐다!
새로 밝혀지는 기막힌 사실
9월 27일 오후 2-3시, 정동 경향신문 옆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에서 조촐한 발표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발표자는 북한인권운동가, 그는 오랜 동안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반드시 왔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실자료를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자산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수집하여 정리중이라는 매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당분간은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세한 것은 발표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어제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내려와서 400명 가까이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400명 가까이 죽었다면 이들은 어디서 죽었을까?
1) 도청 앞은 아니었을 것이다
5월 21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61명이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도청 앞 사망자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수대에 맞아 죽고 찔려죽는 일이 발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북한 특수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한마디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이다. 북한특수군 소행이었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가한 대상은 연거푸 세 차례 씩이나 달려드는 장갑차였다.
반면 도청 앞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은 정광철 중사 한 사람뿐이었다. 정중사는 지그재그의 전 속력으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깔려 전사했다.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북한 특수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다면 전신이 아스팔트 위에 노출됐던 공수부대원들이 많이 전사했어야 했다.
또한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서 8톤트럭 분의 TNT, 도화선, 뇌관을 탈취하여 도청 지하실에 갖다 놓고 이를 폭탄으로 조립한 집단 즉 북한이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으로 표현한 그 600명은 5월 21일 아침 8시에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한 후 곧바로 아시아자동차에 집결하여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무기고를 향해 팀들을 출발시켰고, 자신들도 함께 출발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그 무기들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44개 무기고 탈취가 완료된 21일 오후 4시까지 이들 600명은 대부분 건재했다.
도청 앞 사건은 13시에 발생했다. 도청 앞 사건에서 북한군이 대량으로 죽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2) 교도소 공격 과정에서 거의가 다 죽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은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지령문을 수신했다. 교도소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계엄당국은 교도소 방어가 참으로 급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5월 21일 오전에 31사 병력을 빼내 교도소를 방어하도록 지시했고, 오후 4시부터는 10개 공수대대를 광주에서 빼내 교도소를 방어하도록 배치했다. 북한 지령을 받은 북한 특수군은 장갑차 등을 몰고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교도소를 감제할 수 있는 교도소 뒷산인 설탕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6.25전쟁 때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던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특수군은 설탕고지를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고, 공수대원들은 미리 배치되어 참호를 파고 방어전을 폈다. 공격자인 특수군은 총구에 노출이 됐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땅속에 몸을 숨기고 사격을 가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첫 번째 수기를 쓴 전 북한 여교사의 내연남인 안창식도 교도소 공격 시에 다리를 다쳤고, 부하 대원들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6회나 치르면서 여기에서 사망한 광주사람은 불과 28명이었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더구나 광주시민들은 교도소를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경로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광주시민들은 북한특수군이 탈취한 무기를 나누어주어도 받지 않으려 했고,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특수군이 앞장섰을 것이다. 결국 교도소를 탈취하기 위한 전투는 북한 특수군과 우리 특수군과의 전투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북한은 힘들여 양성한 특수군을 참으로 아깝게 소진시켜 버린 것이다.
5월 23일부터는 전투행위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북한은 광주교도소를 점령하여 2,700명의 수감자와 좌익수 180명을 해방시켜 폭동의 모멘텀을 살려보려다가 그 아까운 특수군을 다 죽여 버린 것이다. 아마 6월 15일 김일성과 김대중이 참석하여 북한의 광주작전에 대해 총 결산을 하면서 한탄을 많이 했을 것이다.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직접 왔던 가명 김명국은 5.18 작전 총화(총결산)를 6월 15일에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에서는 제삿날이 1980년 6월 19일로 정해진 북한특수군이 4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북한이 주도한 광주작전에 대한 총결산이 6월 15일, 죽은 날짜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이들 400명 정도의 ‘광주작전 전사자’들의 제삿날이 1980년 6월 19일인 것이다.
이들 400명 가까이 되는 전사자들은 광주의 어느 산에 묻혔을 것이고, 이들을 파묻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구덩이 파는 작업에 인부로 동원됐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파묻게 하고는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광주시민 출신 작업자들을 다 사살해 버렸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구덩이들을 파 혜칠 날이 올 것이다.
이게 공식화되면?
가장 먼저 당시 전두환이 관장했던 정보기관들과 군이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여러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깡패부대를 지휘하여 금남로로 집결시키던 깡패두목의 모습도 그가 잠시 가면을 벗는 순간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에 포착되었
방북한 한상렬의 작태
당국의 허가없이 방북한 한상렬 목사가 지난 5일 평양 모란봉제1중학교를 방문,
한 교실에 놓여있는 효순.미선의 사진을 보고 울고 있다.
한상렬 사이비 목사가 평양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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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방북 한상렬 목사 행보, 北매체 잇따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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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을 방문중인 한상렬 목사가 13일 판문점을 방문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연합뉴스
이게 국가인가요? 빨갱이들은 인간도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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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가을이 머무는 풍경 |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nolboo54/5817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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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은
그놈들만의 '해방구'였다
3일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 강정마을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노란색 깃발과 현수막으로 넘쳐났다.
해군기지 반대측 주민들과 외부에서 온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그들만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춰댔다.
'강정마을 지키자'는 요지의 벽화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경찰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단횡단을 하는가 하면,
담배를 피우고는 그 자리에 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노란색' 깃발을 매단 트럭 뒤엔 5~6명의 대학생들이
탑승해 있다가 거리낌 없이 내렸다.
도로엔 누군가 먹다 버린 물병과 종이컵이 나뒹굴기도 했다.
문정현이 주관한 평화미사는
'평화'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색하게 거친 말들이 나왔다.
문은 미사에서 해군기지 사업추진 당시 주민 동의 절차의 부당함을
토로하면서 "해군의 입을 쫙 찢고 싶었다"고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평화미사가 진행된 코사마트 사거리 인근엔 쇠사슬로 묶여 있는
흰색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무더위에 지친 듯 긴 혀를 내민 채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모르지만,
개의 눈 주위엔 빨간색 매직으로 안경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전날 전격적인 공권력 투입으로,
간만에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줬던 경찰도
이날은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300명의 추가병력을 포함, 이날 1300명의 병력이 투입됐지만,
경찰은 참가자들이 해군기지 부지내로 진입하는 것을
봉쇄하는 데 급급했다.
일반 주민들에게 '원칙'적 모습을 보이다
정동영 일행이 중덕삼거리 농성장으로 가는 길을 터주자
한 여성으로부터 "힘있는 국회의원에게만 길을 터주느냐"는
항의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강정포구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던 경찰은
이날 오후 해군기지 건설 반대측에서 주최하는
'평화 문화제'에 참석한 10여 명과 실랑이를 벌이다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경찰을 폭행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폭행' 혐의로 연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정천 운동장에서 열린 평화콘서트에 참석하던
반대측 인사들이 깃발을 매단 대나무를 행사장에 소지하고
입장하려다 저지하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였다.
경찰이 경찰관직무집행법을 근거로
"위해방지"를 위해 불가 입장을 보여서다.
주최측으로 보이는 한 관계자가
"평화집회니, 싸우지 말자. 잠깐 기다려달라"고
참가자들에게 호소했지만, 참지 못한 일부 참가자들은
경찰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몸싸움을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라색 폴로티를 입은 한 여대생은
경찰을 향해 "XX, 염병을 하고 있네"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제주도민으로 보이는 한 40대 남성은
이 여대생과 같은 색의 티를 입고 있던 또 다른 여대생에게
"XX여대"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참가자는
'대나무 소지 불가'가 경찰의 "자의적 해석"이라며
경찰측 입장을 설명하던 여경에게 거칠게 따지기도 했다.
한 남성 경찰이 말리자 이 참가자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며 자리를 떴다.
분이 안 풀린 듯한 이 참가자는 몇 걸음 걸어가다
"그러니 경찰이 노조도 못 만드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화콘서트에 출연한 한 뮤지컬 배우는 경찰을 조롱하듯
"어제 경찰관 나리 XX 들이 주민들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다행히 불법시위가 우려됐던 평화콘서트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주장하며
잔잔한 분위기의 노래를 위주로 불렀다.
주최측 추산 2000여 명(경찰 추산 1000명) 참가자들도
대체로 운동장에 앉아 노래를 감상하거나 함께 진행되고 있는
페이스페인팅 등의 행사를 즐겼다.
그러나 콘서트 뒷편에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화장실이 거리가 있었던 탓에 강정천 등지에
노상방뇨를 하는 남성들이 간간이 목격됐다.
콘서트의 사회자도 "남자들은 아무데나 싸십시요"라고 말했다.
술에 취한 참가자들도 보였다.
60대로 추정되는 한 남성은 막걸리병을 통째로 들고
술을 마시다 콘서트 막바지에 외국인 참가자 2명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기도 했다.
콘서트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대형 스피커를 사용한 탓에
인근에 있던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소음'을 제공했다.
운동장 근처에 있는 한 숙박시설의 투숙객들은 "시끄럽다"고
항의하며 방을 옮기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숙박시설의 직원은
"내가 들어도 시끄러운데 손님들은 안 시끄럽겠느냐"고 말했다.
평화콘서트 참가자들 일부가 행사장 맞은편에 있는
리조트 1층 로비 한쪽에서 컵라면을 먹어 냄새가 풍기자,
리조트에 입점해 있던 편의점 사장은 직원에게
"라면을 안 팔아도 좋으니 로비에서 못 먹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장은 "이 리조트가 규모는 작아도 고급호텔과 뭐가 다르냐.
나도 여기에 세 들어 장사하지만, 로비에서 저렇게 라면을
먹고 있으면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말했다.
콘서트장은 반대측 사람들끼리의 축제 분위기였지만,
밖에선 불편한 시선도 적지 않았다.
제주시에 산다는 최모 씨(48)는
"한 신부가 선동해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면서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만큼 장사도 잘 되는 등 여러모로 좋은데
왜 반대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강원도에서 제주로 온지 20년이 됐다는 한 여성은
"이미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중단하라고 해서야 되겠느냐.
그로 인한 손해는 반대측이 책임을 질 것이냐"면서
"사람들이 들어와야 제주도에 분양안 된 아파트도
팔리고 그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날 콘서트엔 초등학생과 중학생 등 어린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한 경찰 관계자는 "학생들이 많이 보여 놀랐다"고 전했다.
이 학생들은 대부분 해군기지 건설반대를 지지하는
부모님들과 함께 제주를 찾은 학생들이었다.
경찰이 왜 통제하는지, 왜 고공 농성을 하는지 등을
부모에게 묻는 학생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너무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강정마을의 한 주민은
"어린 학생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부모들이 데려오는지 모르겠다"며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치관을 심어주는 차원으로 이해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경찰과 나라에서 하는 일에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현애자 민주노동당 제주도당위원장이
야5당 강정마을 주민지원센터 개소식에서 어린 학생들을 향해
"우리 아이들, 해군기지는 아니죠?"라고 두 차례 물었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제주시 서형동에서 왔다는 한 남자 중학생은
"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구들 15명이 학원 선생님을 따라왔다"고 말했다.
이 남자 중학생은 "오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은 안 좋은 것 같다"며
"바다가 오염될 것 같다"고 말했다.
-TIP-
데모대에게 포위 억류 당했다가
7시간만에 '풀려난' 경찰이 있어서 화제다.
대체 어느 나라 경찰인고 하니 멕시코나 콜롬비아 경찰 이야기였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남쪽나라 제주도에 있는
서귀포 경찰이 그 주인공이다.
이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서장은 교체되었다.
해군 기지가 건설되는 강정 마을 현장에서 직업데모꾼, 종북좌익 단체,
몇 명의 마을 주민 등등이 모여들어 해군 기지 건설
방해 데모를 한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24일 일단의 무리들이 공사를 방해하고 나서자
서귀포 경찰은 이들을 연행하러 갔다가 오히려 이들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이 이들에게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뇌물'을 먹여서였다고 한다.
데모대의 주동범은 개인 승용차로 경찰서로 모셔갈 것,
연행자들은 이 날 안으로 풀어줄 것,
데모대의 범법행위를 수집한 기록은 없었던 걸로 할 것 등등의 뇌물을
경찰이 데모대에게 상납하고 7시간만에 풀려나왔다고 한다.
서귀포 강정 마을 공사현장은
공사 관계자도 출입이 어려운 좌익의 점령지,
일종의 해방구였다.
이런 곳으로 용감히 돌진했고 그래서 무사히 목숨을 보전하고
귀가할 수 있었던 서귀포 경찰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러나 다음에 그곳으로 진군할 기회가 있다면
만반의 채비를 하고 가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날 서귀포 경찰의 일진은 오지게도 재수 없는 날이었다.
데모대에게 '체포'당하여 7시간이나 '구금'되고,
데모대에게 멱살 잡히고, 경찰서장은 김밥으로 얻어맞고,
결국 서장 자리에서 �겨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진압하면 폭력 경찰이요, 진압하다 죽으면 '개값'이 되는 개죽음이요,
멍청이 이명박 시대의 불쌍한 경찰이여...
서귀포 경찰은 운수가 나빴지만 귀가하여
살아있는 모습으로 식구들을 볼 수 있었다.
운수가 대통했다.
동의대 사태를 상기해 보라.
얼마나 운수 좋은 경찰인가.
사고뭉치, 거지발싸개 같은 싸가지 없는 쓰레기 좀비들이나
아마추어 좌빨, 거지 근성의 깽이 같은 인간들은
말도 안되는 논리나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각색해서
이 폭력 집단을 미화하고 좌익 국회의원, 좌익단체들이
일치단결하여 이런 무자비한 데모대에 힘을 보태준다.
무능한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우리 경찰은 힘없는 경찰이 되고 말았다.
서귀포 경찰의 모습은
오늘날 빨갱이 시대를 살아가는 서러운 경찰의 애환상이다.
- 데모 현장엔 늘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을 앞장 세우는 빨갱이들의 잔인함...
평화를 가장한 폭력과 불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놈들에게는 부메랑의 법칙이 꼭 적용되리라.
그리하여 저 아이들에게 나중에는 손가락질 받고 폭력을 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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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상렬, 노수희 등과 이라크파병반대 삭발투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기사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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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상렬, 노수희와 함께 주먹을 쥐고 있다. ⓒ 민중의소리 기사 화면 캡처 |
| 2004년 7월 23일 당시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상렬, 노수희 등과 함께 ‘이라크파병 결사저지 각계 대표 10만 릴레이 단식농성’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수호는 한상렬 노수희와 함께 삭발을 하며 이라크파병에 반대 여론에 불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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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11월 29일 통일뉴스 창간 6주년 후원회 행사에 참가한 이수호와 한상렬이 환하게 웃고 있다. ⓒ 통일뉴스 기사 화면 캡처 |
2006년 11월 친북언론으로 알려진 통일뉴스의 창간 6주년을 맞아 통일뉴스 후원회 행사에 참여해 통일뉴스 후원회 공동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도 이 후보는 한상렬 당시 통일연대 상임대표의장과 자리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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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폐지연대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한상렬 ⓒ 민중의소리 기사 화면 캡처 |
또한 2004년 9월 6일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의 기자회견장에도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한상렬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섰다. 이수호와 한상렬은 함께한 자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를 외치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발언을 전폭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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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1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위한 60인 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이 행사에도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헌상렬과 함께 했다. ⓒ 오마이뉴스 기사 화면 캡처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