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金東洙)(의병) (1879 ~ 1910) 】 "광주일대 군수물자 등을 모집하는 의병활동”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경양면(景陽面) 병문동(屛門洞)에 거주하면서 포목상을 운영하고 농업에도 종사하였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으나 1910년 판결문에 32세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87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곧이어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의해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이에 서울의 시위대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전남 광주군에서 이원오(李元五)·조경환(曺京煥)·양상기(梁相基)·김현길(金玄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1908년에 양진여(梁辰如, 振汝)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양진여 의병부대 소속으로 군수물자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친일 성향의 면장, 이장, 동장을 찾아가 군수물자를 요구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징벌하였다.
주로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1909년 1월 16일(음, 1908년 12월 25일) 양진여 의병장 및 동료 의병 5~6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남 광주군 갑마보면(甲馬保面) 본촌(本村)에 거주하는 성명 미상의 면장 집으로 들어가 군자금으로 현금 60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해당 면장은 금전이 없다고 하며 지급을 거부하였다. 이에 즉시 그를 묶고 2~3차 구타하였다. 마침내 군수물자로 짚신 50켤레를 내놓았고 이를 접수하여 받았다.
일제 문서에 기록된 김동수(1909.6.2) [판형3] |
1909년 2월 2일(음, 1월 12일)에는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리(伏龍里)에 거주하는 성명 미상의 이장 집에 총기로 무장한 상태로 들어가 군자금으로 현금 20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해당 이장은 현금이 없다며 백목(白木)으로 바칠 것을 청하였다. 이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목으로 군수물자를 납입할 것을 명하고 떠났다가 16일 후인 동월 28일 오전에 다시 찾아와서 백목 2필을 받았다.
1909년 4월 하순(음, 윤2월 하순)에는 광주군 오치면(梧峙面) 방축내동(防築內洞)에 거주하는 성명 미상의 동장 집에 들어가 현금 20원과 백목 10필을 군자금으로 요구하였다. 하지만 해당 동장이 납입을 거부하였기에 체포하였다. 해당 동장을 의병부대로 연행하던 중 동민들이 백목 3필을 대신 납입하여 풀어주었다. 또한 4월 25일에는 일본헌병분소의 예정 가옥인 광주군 천곡면 히야시장의 정영환(鄭永煥) 집에 부하 40여 명을 이끌고 가서 방화하였다. 이어 1909년 5월 4일(음, 3월 15일)에는 광주군 삼취지동(三取旨洞)에 거주하는 성명 미상의 동장 집에 총기를 휴대하고 들어가 이전에 납입하도록 하였던 백목 4필을 군수물자로 취득하였다.
1909년 5월 19일(음, 4월 1일)에는 창평군(昌平郡)으로 이동하여 지곡면(芝谷面)에 거주하는 성명 미상의 동장 집에 총기를 휴대하고 들어가 군수물자로 현금 40원과 짚신 50켤레를 요구하였다. 식사를 위해 잠시 그곳을 떠났을 때 해당 동장이 도주하였으나 다음 날 동장의 행동에 대해 동민들이 사죄하고 현금 2원과 백목 1필을 군수물자로 상납하기에 취득하였다. 5월 19일 김재민(金在珉) 등 의병 20여 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덕산면 면장 집에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고자 갔으나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의병 3명이 전사하였다. 5월 24일 다시 의병을 인솔하고 광주군 덕산면에 들어가 면장 백계수와 덕산리의 이장 정현구를 붙잡아 이장에게 총상을 입히고 면장을 총살하였다. 이들이 일본 헌병대에 의병대를 밀고했다는 이유였다.
이처럼 군수물자 확보를 위한 활동을 하다가 양진여 의병부대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남 화순군(和順郡)에 근거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광주 일대에서 계속해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 5월 광주군 덕산면(德山面) 덕산에서 일본군 광주분견소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같은 달 31일에도 광주군 갑마보면 본촌에서 광주경찰서 일본인 경찰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때 부상을 당하였지만 광주·담양(潭陽)·장성(長城)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 사창(社倉)전투에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 광주수비대에 붙잡혔다.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 헌병군조에게 심문과 오노 도쿠지로小野篤次郞 검사의 심문을 받은 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1월 26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진행된 1심 재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지만 1910년 2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