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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재학시절 정치신학에 대하여 배운적이 있다.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란 정치, 사회, 경제학과 관련된 사상에 대하여 신학적 개념과 방법을 연구하는 신학이다. 주로 기독교와 정치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논쟁을 다루는 정치신학은 20세기 이후에 학술적으로 정립되었는데, 히틀러의 친-나치파인 카를 슈미트(독일의 정치철학자)에 의해 "정치신학"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교회는 나치와 타협하였다. 당시 독일 신학계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구약을 신약보다 열등히 여기고, 반(反)셈족주의를 조장하면서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런 독일 교회의 만행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히틀러의 정치적 메시아니즘을 비판한 신학자도 있었다. 그는 바로 1934년 「바르멘 선언」을 공표하고 나치에 저항한 고백교회의 '디트리히 본 회퍼'이다. 그는 나치정권의 하수인이 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온몸으로 저항했으며 더 나아가 히틀러 암살을 위한 계획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동조하는 모습으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였고, 다른 한쪽에서 고백교회의 속한 소수의 신학자들은 그러한 나치의 횡포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는 모습으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신학'을 정립한 사람이 바로 '위르겐 몰트만'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신학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며, '정치를 변혁'하는 것이야 말로 신학의 중요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을 이야기하는 <희망의 신학>을 주창했고, 교회가 현실 비판에 참여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현실 참여란, 하나님의 희망을 가진 자들이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희망에 대한 믿음 속에서 약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뜻한다.
20세기 나치의 집권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통해 독일 교회가 지나온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 정치신학은 결국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신앙인으로써, 우리가 속한 이 사회와 구조와 정치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앞서 20세기 정치신학의 논의와 배경을 다루면서 살펴보았듯이, 교회와 신앙인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결코 정치와 사회의 문제로 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적인 사안에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예컨데 나치가 신학적인 근거를 내세우며 유대인을 학살할 때, 이같은 폭력에 대하여 어떠한 윤리적, 신앙적 판단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폭력을 눈감아 주는 것이고, 폭력을 방조하는 것이며, 결국 그러한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든 이 사회의 정치적인 갈등 혹은 이슈가 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여러 복잡한 사안들에 관하여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고 인간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종말론적 희망과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정치적인(현실적인, 현실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응답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교회에게 주어진 '예언자적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속한, 특히 큰 교회를 목회하는 유명한 목사들은 한국사회의 명운을 가리는 중차대한 정치적 갈등과 문제 앞에서 그저 침묵하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혹은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을 유보하자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찬수 목사, "누가 옳은지 판단 유보하고 같이 기도할 때"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19일 주일예배 설교를 통해 나라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목사는 "요즘은 나라를 위해서 헤세드의 사랑을 구해야 한다"며 "제가 홈페이지에 이 나라를 위한 기도제목들을 올려 드렸다. 원래는 프린트해서 다 드리려고 했다. 여러분, 홈페이지를 보시고 스스로 프린트해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란다"고 했는데요. 관련 소식입니다.
veritas.kr
한국 개신교에 불문률처럼 뿌리내린 '정교분리(政敎分離)' 즉, 정치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이 뿌리내린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개신교 목사들이 믿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진리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하나의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교회사를 들여다보면, 한국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은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19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인이 16명이나 있다는 점도 한국개신교가 초기에는 얼마나 한민족이 처한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정치적 문제를 접근하는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춘생문 사건'이었다.
명성황후(민비)가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고종은 자신이 언제 일본에게 암살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일본의 독살을 염려해 서양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통조림'으로 연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일들로 인해 “선교사들이 임금의 생명을 구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때 친일세력의 반대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서 구출하여 미국대사관으로 피신시키고, 조선을 친미/친러 내각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이 작전에 개신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조선예수교장로회), 에비슨(세브란스병원), 헐버트(감리교)도 직접 가담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려는 계획이 알려지며, 궁궐 위병들의 저항에 막혀 경복궁을 탈출하지 못하고 춘생문의 담을 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바로, 춘생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은 일본의 강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고종 구출작전에 개입된 언더우드 선교사로 인해서 미국장로교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일본은 자국 내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의 주모자는 언더우드이며, 알렌을 비롯한 다른 선교사들이 이 일을 부추겼다며 압박의 수위를 높혀갔고, 일본은 조선 땅에서 모든 미국 선교사들의 본국 귀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조선의 선교활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장로교는 일본의 압박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앞으로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내 정치적 사안에 대한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정교분리 정책'을 표명하게 된다. (이 결정에는 당시 미국 외교부의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1901년 정동에서 열린 장로회공의회로부터 였다. 여기에 모인 선교사들은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이라는 결의문을 작성했는데 그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외국인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표명하며 정치적인 문제에 거리를 두게 되었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선교사들은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자 남강 이승훈 선생은 책상을 탁- 치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
남강 이승훈
여기까지 맥락을 유의깊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당시 선교사들이 주장한 '정교분리 원칙'은 조선 땅에서 포교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선택이었을 뿐이다. 나의 입장에서는 물론,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끝까지 일제의 압박에 저항해 우리 민족의 역사에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는 개신교의 가치를 잘 보여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당시 선교사의 입장에서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좋게 보면 전략적 선택, 나쁘게 보자면 현실타협)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교분리'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주어진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야한다는 점이다. '정교분리의 원칙' 그것은 개신교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도 아니고, 한국교회를 정의하는 정체성도 아니며, 훌륭한 교훈과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는 전통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고자 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낡은 관습과 태도에 불과하다.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이후 정교분리를 외치면서 점차 사회의 문제, 구조의 문제, 정치적인 문제에 눈을 감고 침묵하였으며,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과 불의에 눈을 감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편에서서 그들을 축복하고 그 권력을 정당화해주는 불의한 일을 저질러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66년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이다. 당시 설교를 맡은 CCC 김준곤 목사는 "하나님이 군사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말했다. 이렇게 이어진 조찬기도회는 1980년에도 당시 전두환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함께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로 계속되었고,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이를 생중계하기도 하였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당시에도 길자연 목사와 소강석 목사가 각각 국가조찬기도회를 주도하였다.
이를 보면 한국 개신교의 우경화, 보수화, 극우화가 지금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교회는 겉으로는 정치적인 사안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해방이후 지금까지 늘 권력의 편에 서왔다. 우리 사회의 약자, 힘이 없고 가난한 자들이 권력에 의해 고통당할 때 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 구조적 문제에 침묵하며 방관했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목사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은 지극히 편협하고 무책임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이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불트만이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먼저 모든 교회와 신앙인이 정치적인 문제, 삶의 문제, 현실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자기 나름의 신앙적 판단'이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할 목사라면 더 더욱, 복합한 현대사회의 여러가지 갈등과 질문들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이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이 단 하나의 '정답'일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자세와 관용의 태도가 더불어 요구된다.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 지식을 쌓아야 한다. 역사를 모르면 오늘날 발생하는 여러가지 논쟁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출수 없다. 과학을 모르면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영민한 '판단능력'은 단지 성경만 붙들고, 기도만 죽어라 한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공적인 영역에서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과 시민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갈등이 첨예한 문제, 양쪽의 의견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운 일일 수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면, 더욱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조차 목사에게 주어진 책임이고 역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목양이란, 말하자면 어디로 갈지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다. 갈등이 큰 문제일수록, 목사로써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으며, 신앙인이라면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춰해야 할지 방향을 잘 제시해줘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하며 신앙인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혹은 여러가지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고 공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동안, 그 두려움과 게으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에 실망하며 신앙을 버리고 있다. 만약, 선교사들이 일제의 위협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