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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없으신 하나님(히 6:13-2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그리고, SNS를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보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로 필요한 정보들도 있지만, 알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될 정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쉴새도 없이, 듣고, 읽고, 보고 있는 많은 정보들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무조건 믿으십니까? 아니면, “이것이 진짜일까?”라고, 한 번이라도 의심해 본 적은 있습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것도 없이,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아니면, 듣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진짜일거야. 아닌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그렇게 믿고 살아가다가, 나중에, 그것이 가짜로 판명되면, “그래, 진짜가 아니었어. 가짜였어.”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가짜와 진짜가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세상에, 믿음의 사람들은 가짜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접하는 있는 것들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우리를 유혹하는 가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건간에,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가짜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시자,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3-50)
지금껏,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간사한 것이 없다”, “간사하지 않다”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간사”는 “교활한 속임수”, “음흉한 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에게는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나다나엘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은 거짓된 삶을 살지 않았다”라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교활한 속임수나 음흉한 꾀를 사용하지 않고, 거짓되지 않는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짓말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았다는 것입닏.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보면, “양심에 화인 맞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았다”라는 말은 “양심은 있으나 그 기능이 죽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혹한 죄를 짓고도 태연하며, 마음에 조금도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자, 바로 그런 자가,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일 것입니다.
얼마나 그 양심이 오염되고 부패했기에, 최소한의 양심조차 없는 것일까요?
믿음에서 떠나면, 하나님에게서 떠나면,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거짓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라멕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들에게,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의이든, 실수이든간에, 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을 죽이고 나서, 누군가 자기에게 심판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칠십칠배의 벌이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황당한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을 죽인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에서야,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옛날부터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죄를 지어도 죄라고 여기지 않게 되고, 밥먹듯 거짓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그런 세상을 살다 보니, “하나님도 때로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 아주 단호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광야 40년 생활을 마칠 무렵,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신 32:4)라고 선포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거짓말로 인해, 파멸로 치닫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말과 살인을 함께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헛되고 진실하지 않는 말로, 거짓말로, 현실 속 무언가를 뒤집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시험합니다. 폭력을 사용합니다.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이 없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우리를 유혹하거나 시험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요 구원자이시지, 파괴자요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삼상 15:29)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간에,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처세술이라고 여기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행하십니다.
13-1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언제 들어도, 몇 번이나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하실 때에,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이 약속과 맹세를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6-18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보다 큰 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 맹세는 말한 것을 확정하여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약속된 것을 받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려고 ‘맹세’로 그것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약속’과 ‘맹세’는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희망을 붙들려고 피난처를 향해 가는 우리는 큰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속이란, 모든 것을 걸기에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에, 정말로, 전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실 정도라면, 이보다 더 확실하고, 이보다 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상상해도, 하나님의 단호한 맹세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 정도로 무한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니, 너희는 무한히 안심하라.”
“내가 너에게 복 주겠다고 한 약속을 절대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여러분! 성경을 보면서,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는 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자기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셨기에,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1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영혼의 닻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주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우주 비행사들이 모선 밖으로 나가, 우주 유영을 할 때,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밧줄로, 단단하게 묶어두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밧줄이 끊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 그들은 모선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우주 공간에, 그들을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주에서 임무 중인 그들은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 지지할 것도 없고, 안전하게 귀환할 도구도 없이, 광활한 우주공간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는 단단하게 연결된 밧줄이 있습니다. 그 밧줄 하나 덕분에, 그들은 우주 미아가 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한 후, 안전하게 복귀할 수가 있습니다. 그 밧줄이 없으면, 우주 공간으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리 인생에서, 우리 자신이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사라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안전합니다. 이 영혼의 닻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 줍니다.
코로나, 기후 변화, 금융 위기, 정치 혼란, 혹은, 경제 정책 실패 등, 이 세상의 그 어떤 변화와 위기도, 하나님과 연결된 우리 영혼의 닻을 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껏 소중히 여겨 왔던 관계가 깨졌습니까? 평판이 나빠졌습니까? 혹은, 하던 일이 더 나빠졌거나, 실패했습니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주 속 미아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소망은 우리를 항상 붙들고, 우리를 절대 놓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8-39)라고 말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튼튼한 닻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예비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복된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고,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둠에 다니지 않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기에, 이 모든 말씀들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다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믿고 따라갔던 믿음의 조상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들을 하신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기에, 우리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 중의 복이요, 하나님의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고 살아갈 때,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보아야 하고,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지 않는 날,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하여,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감으로, 머지 않는 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더욱더 주님만을 믿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자 하오니, 속히 그 약속들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