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딱 붙은 상의, 얼룩무늬 바지. 한 번도 얼굴을 대한 적 없이 미용실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그의 제안에 기다리기를 10분여.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 한 눈에 선뜻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미용지부 정석철 지부장님이시죠?"
'한가위' 선생님, 정석철 지부장(29)
"첫 월급 16만5천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운 좋게도 취사병과 이발병으로 배치돼 남들보다 조금 편하게(?) 군 생활을 했다는 그는 22살에 제대하자마자 한 식당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낮에는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저녁엔 홀써빙을 하면서, 밤에는 주방장 아저씨와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식당주인이 기숙사 격으로 마련해 준 여관에서 잠을 자면서 생활을 했다.
한 달에 2번밖에 쉬지 못하는 힘든 조건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꽤나 묵직했던 월급 110만원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언제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미용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즈음. 당시 식당에 자주 오던 손님 중에 머리 색깔도 이상한, 또래 남자가 있었다. 궁금하기도 하여 어느 날은 콜라 하나를 서비스로 주면서 "뭐하는 사람이냐"고 말문을 텄고, 알고 보니 동향인데다 동갑내기인 미용보조원을 하는 친구였다. 돈도 많이 벌고 재밌다고 하길래 "내가 해서 안 될 것 없다"는 오기도 발동했고, 3개월여 다람쥐 쳇바퀴 돌던 식당 일도 이젠 접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식당을 나와 월세방을 구하고 무작정 생활정보지를 뒤져 일 할 만한 미용실을 찾았다. 홍익대 앞 A미용실. 첫 손님은 아나운서 황인용씨였다. 별다른 미용기술이 없던 터라 겨우 샴푸하는 것에 그쳤지만 연예인도 보고 뭔가 색다른 재미난 일을 한다는 데 대한 기쁨도 컸다.
그러나 첫 월급을 받던 날,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떨리는 마음에 화장실에서 봉투를 꺼내 돈을 세어보니 16만5천원 외에 더 이상 셀 수 있는 돈이 없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잘못해서 변기 안에 수표를 빠뜨린 줄 알고 원장에게 가서 얘기했더니 "원래 15만원인데, 일을 열심히 해서 1만5천원 더 얹어서 준 것"이란다.
2년여만에 헤어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자격증도 없는 그에게 선심을 썼다는 얘기였지만, 16만원 하던 월세 내기도 빠듯한 실정에 그 월급 받으면서 계속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 길로 달려나와 모아둔 돈을 학원비로 충당하며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미용학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우고, 오후 6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6개월을 버텼다.
드라이를 하는 사람은 스텝이고, 머리를 자르는 사람이 헤어디자이너이다.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계 없음)
23살 되던 95년에 드디어 미용사 자격증을 따고 보조미용사(스텝)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미용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헤어디자이너와 디자이너의 업무를 지원하는 스텝으로 분류가 되는데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평균 3~4년 스텝생활을 해야 한다.
이 기간동안 정 지부장은 하루 12시간 꼬박 일하고도 한 달 42만원밖에 받지 못했지만, 최고의 미용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단다.
퇴근 후에는 1주일에 3~4시간씩 아는 미용사 형으로부터 미용기술을 배웠고, 군에서 이발병 했던 경험도 살려 부지런히 일을 해 남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 2년여만에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불만이야 늘 있었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몰랐죠"
자신은 이제 디자이너가 되면서 미용실 내에서 발언권도 생기고 임금도 조금 올랐지만 후배들을 볼 때면 항상 불안했다.
자신도 그런 처지였지만, 미용기술을 '배운다'는 이유로 30~40만원 하는 저임금에 평균 12시간 가량 꼬박 일에 시달리는 '스텝 후배'들을 볼 때마다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정 지부장은 "보통 6개월여를 고생해서 미용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하지만 이 같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못 견디고 3~4개월만에 그만 두는 사람도 많다"며 하소연한다.
더군다나 미용사들이 파마나 염색을 하는 손님들에게 써야 하는 중화제나 염색제는 그 성분이 독하기 때문에 손이나 팔 등은 피부병에 걸리기 일쑤이고, 일을 하는 내내 서 있어야 하는 미용업무의 특성 때문에 관절염이나 허리디스크, 어깨 결림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게 '직업병'이라고 불리는 줄도 몰랐다.
식사시간도 따로 없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늘 대기해야 하고, '한가한' 시간에 '눈치 봐서' 식사를 해야 한다. 아침에 9시에 출근해서도 밤 9시가 넘어서까지 손님이 있으면 퇴근시간은 자연 늦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에게 연장근로·야간근로수당을 요청할 자격이 있는 지, 40만원대에 불과한 임금이 최저임금보다 낮은 지는 별로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선배들도 이같은 고생을 해 왔었기 때문에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어서 경력을 쌓아서 버젓한 미용실(shop) 하나 차려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 말이다.
'디자이너'와 '노동자'의 경계를 허물고
하지만 미용실 손님으로 오던 임미령 위원장을 만나면서 정 지부장은 그 유일했던 희망 외에 더 큰 희망을 가지게 됐다. [관련기사] "정의로운 한가위 선생님 안 계시나요?"(2001-08-17)
자신들도 어엿한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하루 8시간 노동에 1시간의 휴게시간, 연월차 휴가 등을 당연히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법상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4대 사회보험에도 당연 가입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막연했던 자신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 그 방법을 찾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 내걸린 미용실 간판.
정 지부장은 노조와 함께 우선 체인점화 되어 있는 대형미용실(박준미장, 이철헤어커커, 이가자미용실, 박승철헤어스튜디오)을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4대 사회보험 미가입 등을 이유로 강남지방노동사무소에 고발한 데 이어, 알음알음으로 알고 있던 미용노동자들의 임금, 근로조건, 4대 보험 가입 실태 등을 알기 위해 짬을 내 틈틈이 실태조사에도 나섰다.
정 지부장은 "아직은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없지만 60만 미용인들의 정당한 노동권 확보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힘닿는 데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인다.
덧붙여 그는 "요즘 자크데샹쥬 같은 해외브랜드를 내 건 미용실이 속속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고 미용시장도 점점 국제화되어 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어서 빨리 우리나라 미용노동자들의 권익보호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국내 미용기술 자체가 도태되고 미용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더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노조활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한가위' 선생으로 더 유명한 프로 헤어디자이너 정 지부장에게 덥수룩한 컷트 머리인 기자는 묻는다. "제 머리스타일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최근에 미용실 가신 지가 오래되셨죠? 앞 라인을 시원하게 치고, 뒷 라인도 깔끔히 정리를 하셔야 겠네요. 밝은 색으로 염색도 하셔서 머리가 무겁지 않게 보이도록 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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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한가위 선생님 안 계시나요?"
[내가 만난 정석철] -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나 할까?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사진)은 자택이 있는 신대방동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 컷트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정석철 지부장을 만났다.
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
컷트를 하는 동안 '한가위 선생님'으로 통하는 정 지부장이 다른 동료들과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니까 성격도 괄괄하면서 밝고 정의롭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그래서 담에 만나면 꼭 얘기 한 번 해 봐야지 하고 미용실을 나섰는데, 가끔씩 찾은 미용실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허탕을 치다가 "정의로운 한가위 선생 어디 갔냐"고 동료 미용사들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공교롭게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일이거나 잠시 외출을 했다는 것이다.
정 지부장의 휴일이 아닌 어느 날 미용실에서 반갑게 해후하고 컷트를 맡긴 뒤 "커피 한 잔 하시겠냐"는 정 지부장의 제안에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차 한 잔 마시면서 임 위원장은 자신이 평등노조 위원장임을 소개하고 "노조를 알고 있느냐, 미용사들의 노동시간이 길다고 들었는데, 급여는 어떤가..."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언제든지 얘기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이후 간헐적인 만남이 지속됐다.
가끔은 임 위원장이 퇴근길에 전화해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면서 일주일에 2~3번씩 얼굴을 마주하다가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 매주 금요일 밤에 정 지부장은 물론 구로나 인천, 안산 등지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열악한 노동조건과 개선책에 대한 고민들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평등노조 미용지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해 보자는 다짐들을 받을 수 있었다.
임 위원장은 "당초 평등노조 내 미용지부 소속 조합원들이 있었지만,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계속되는 노동에 시달리는 열악한 조건 때문에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며 "그러나 정 지부장이 선뜻 지부를 맡겠다고 밝혀와 60만 미용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노조가 좀 더 활발히 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