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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하19;40-20;13. 다시 주어지는 은혜 앞에서!!! 2024. 5. 12.
길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인 의사가 스페인 산디아고로 가는 길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달려가 아들을 화장하고 재를 뿌리고, 아들이 걷던 길을 걸으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가는 영화입니다. 내용은 죽은 아들과 살아있는 아버지의 화해를 다루는데, 아픈 가슴을 울려 줍니다. 여러분, 때로는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잃고 나서야 예수님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앙 안에서 지켜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는 다시 돌아 올수도 없고 혹시 찾는다고 해도 그 상처가 너무 크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입니다. 지금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복귀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관계된 사람에 대한 다윗의 사랑과 배려로 모든 것이 평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올 은혜를 허락했습니다. 아픔가운데서도 약속한 것을 이루셨습니다. 민23;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행하시는 이런 은혜로 다윗이 왕의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분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분열과 정통성의 문제에 직면 합니다.
1. 주어지는 은혜 앞에서 분열입니다.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이긴 한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43절 끝 부분에.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니라. 지금은 하나 될 때인데 더 강경합니다. 하나는 하나인데 하나가 아니고 둘입니다. 한 쪽에서 말하면 한쪽에서 듣지 않고 반박합니다. 반박의 정도를 넘어서 더 강경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끊임없이 다툼을 합니다. 그런데 다툼이 회복과 은혜 앞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40절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위 하니라.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게 되었을 때 왕을 호위하여 함께 건넌 사람들은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개개인이 아니라 지도자 위치에 있는 백성입니다. 유다 백성은 전부가 다윗과 함께한 반면 이스라엘은 절반만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귀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환하는 모든 행사를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주변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함께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이 다툼을 합니다. 41절.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넜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위의 부당함을 말합니다. 이에 유다 사람들은 42절.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오히려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윗 왕을 모신 것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지친인 까닭이며 다윗으로부터 그 어떤 특혜를 받은 일도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분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43절.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신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채 왕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합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1. 기득권의 문제입니다. 왕에 대하여 십 분을 가졌다는 말은, 혈통적 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반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수적인 우월성을 강조합니다. 유다 사람들보다 더 다윗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더 관계가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내세우면서 누가 더 가까운가를 따지며 주도권을 놓고 싸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들 모두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다윗에게서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입니다. 이 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다윗이 광야의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누가 더 가까운가를 다툽니다. 이들은 다윗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입니다. 반역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혀 반역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인 것처럼 서로의 위치를 두고 다툽니다. 눅9;48.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는 문제로 변론이 일어 난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제자들이 따지는 것은 누가 더 공이 많으냐? 여러분, 어린아이는 자신의 공로가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작은 자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런 사람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현실은 누가 크냐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주도권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움으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묵상과 신앙까지도 경쟁을 합니다.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경쟁과 다툼이 없는 곳입니다. 주도권의 싸움이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경쟁을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다윗이 세 번째의 광야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의 문제가 다윗의 회복 앞에 있습니다. 기득권의 문제가 다시 받게 되는 은혜 앞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소중한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다윗은 귀중함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영역과 자리를 광야로 내 몰리지 않도록 지키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내재 되어 있던 잠복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납니다. 내재되어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지금 은혜 가운데 다시 왕궁으로 들어가는 때에 이런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회복이 되고 은혜가 주어지면 다 하나가 되어야지요? 기쁘고 좋은 일이잖아요!!! 다 같이 기뻐하고 힘을 합쳐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 무너지면 100퍼센트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잘 압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잘 압니다. 어떻게 통일 왕국을 이끌고 어떻게 백성들을 섬기고 어떻게 나라를 바로 세웠는가를 잘 압니다.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광야 인생이 되면 회복이 되어도 잠복했던 일들이 고개를 듭니다. 조그만 일로도 서로 잘났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집중해야 합니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서두르지 말고 더 차분해야 합니다. 아직은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영역 안에서 더 집중해야 합니다.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여러분, 간증이 무엇입니까?
실패 원인과 광야의 인생이었던 삶에서, 창피하고 쪽 팔리지만 확실하게 쪽 팔리자. 그러나 끝까지 갔다는 것 입니다. 광야의 삶이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와 우스갯거리가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re think 하고, 자신을 re design 하고, 자신을 re built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이 쉽지가 않지요? 왜 그럴까요?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있고, 비웃음과 수군 수군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손을 놓기가 쉽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것을 게의치 않았습니다. 다시 회복시키실 은혜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환궁시키시는 하나님의 복을 주목했습니다. 리 씽크하고, 리 디자인하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축복이, 다시 주어지기를 먼저 축복합니다. 잠복성의 문제들이 드러나더라도 자신을 re think 하고, re design 하고, re built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직접적인 문제인제 정통성입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항상 정통성이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정통성을 선점하려 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현재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이전의 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돌아왔을 때의 상황은 예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권력을 향한 사람들이 다윗의 권력이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면 무너지지 않아야 되는데 다윗이 자기 아들에게도 왕위를 내어줄 정도로 허약한 왕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 자리가 아니고, 백성들의 인기만 얻으면, 넘볼 수 있는 권력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왕 될 만큼의 역사적인 바탕이 있는 쪽에서 욕심을 냅니다. 예전에 왕족이었다는 이유로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세력입니다. 그 세력이 바로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 입니다. 베냐민지파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됩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처음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세바 라는 사람이 나도 왕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아무나 왕이 되나? 여러분, 세상은 나도 할 수 있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 붙습니다. 정상적으로 잘 가고 있다가도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한마디 하면 이전의 견고한 신뢰와 신앙과 믿음이 무너집니다. 이전의 신뢰는 온데간데없습니다. 언제 보았느냐? 이말 입니다. 찬성하던 사람이 반대가 됩니다. 유다 지파 사람 빼놓고 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니라. 여러분, 이 무슨 황당한 비극이고 황당한 이야기 입니까? 다시 회복된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다시 복권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건과 반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한번 실패하면 그렇습니다. 한번 쓰러지면 그 다음에 다시 세워져도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쫓겨난 다윗에게서 틈새를 찾습니다. 광야의 인생이 된 다윗에게서 기회를 엿봅니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 왔어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빈 공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부르짖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다윗은 역시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라는 신뢰가 아니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다윗을 그냥 다시 추대한 것입니다. 압살롬한테 걸었던 소망이 무너지고 압살롬이 죽고 없으니까 그 다음 정답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러한 허점을 가지고, 왕족과 족보가 걸쳤다는 이유로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론을 살펴보니까, 이 백성들의 마음이 온전하게 다윗에게 넘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안인 유다지파와 나머지 11지파 사람들을 내 쪽으로 세우면 이 세력으로 나도 왕 될 수 있다는 틈새를 노렸습니다. 그만큼 신앙적인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권좌와 권력은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그런 관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왜 성경에 왜 나옵니까? 왜 이런 이야기가 왜 등장하느냐?
2-1. 믿음과 신앙으로 신뢰를 하지만, 결국에는 어떤 조직의 힘에 부딪히면 사람들은 떠나고 버린다는 것을 잊으면 아니 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은연중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들어 닥치면 고개를 쳐들고 기회로 생각하기 때문에. 떠나고 버리고 차지하려는 그런 것들이 은연중에 있습니다. 떠나고 버리고 차지하려는 것이 신앙과 믿음으로 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시편에 어린 젖먹이 아이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젖먹이 아이,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 아이의 입으로 영광을 얻는다는 이 말은 제발 세상의 어른들처럼 행세 하지마라.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떨어뜨린다는 말입니다. 젖먹이 시절로 돌아가라 이 말이죠.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그냥 젖먹이 아이 입장에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 것이 신앙에 가깝지. 이제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 이미 탈선이라는 것입니다. 레일 위에서 그대로 있으면 저절로 종착역에 이르고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데 바퀴가 빠지면 종착역에 이르지 못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주님 가신 그 길에서 바퀴가 빠진 거예요. 예비하신 축복과 은혜에서 빠진 것입니다. 젖먹이의 입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데, 젖먹이 입장에서 자꾸 탈피하여 성숙한 어른이 되려고 합니다. 이만하면 많이 아는데, 무엇을 알아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살아가는 젖먹이 입장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입장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가장 가까운 것 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내용이 담겨져야 합니다. 다윗이 젖먹이처럼 살아가니까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다 무시합니다.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이 다 무시합니다. 시편 3편에 다윗이 압살롬에게 피했을 때,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아들마저 떠나고 아버지를 버리고 뒤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아들 편에 섰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이 되어도 믿음으로 신앙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이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사람마다 항상 내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는 이것을 잘 몰라요.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세상적인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내심 나도 큰 소리 한번 쳐 볼까? 나도 한번 어른 돼 볼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라 하지만, 막상 본인의 마음속에 나를 알아주면 좋겠다는 사태가 벌어지면 거기에 편을 들고 손을 듭니다. 무시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오기 같은 것이 발동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내부의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연약하게 다루십니다. 예수님을 연약하게 다루어요. 연악한 분을 믿을 사람이 누구냐? 연약하게 살다가 연약하게 맥없이 돌아가신 분을, 그 분이 생명의 길이라고 알 자가 누구냐? 그 분의 길을 따라가라. 연약한 길을 따라가라. 여러분, 성경해석에서 제일 어렵고 난해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이 어떻게 인격화 되느냐 입니다. 이 것이 문제인데, 말씀이 문자잖아요. 문자가 어떻게 인격화 되고 사람이 되느냐? 여러분, 우선 말씀이 인격화되기 전에 말씀이 먼저 사건을 일으킵니다.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반응이 항상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반응은 항상 소수입니다.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대다수가 하나님께 평소에 눌린 감정과 평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감정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 대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씀은 하나인데, 갑자기 말씀이 사태를 만나 사건을 일으키면 거기서 둘로 갈라집니다. 두 노선으로 갈라지면서 한쪽은 소수의 사람들은 회개를 하게 되고,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그동안 본인이 믿었던 복음에 대해서 본인이 삶과 행동으로 모든 것을 합니다. 자기 몸이 우선 가치가 있고, 그 뒤에 예수님의 몸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은 자기보다 더 뒤떨어진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물병도 반이 차면 흔들립니다. 반병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가득한 물은 조용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은 출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대세는 가치를 모르는 반 병 된 물병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세바가 그렇습니다. 말씀이 인격화 되는데 필연적 코스입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런 사건 일으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것 드러내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세바가 됩니다. 저 사람은 내 노선으로 포함시키고, 저 사람은 내편 될 수 있겠다. 그런 것을 늘∼∼ 구상합니다. 겉으로는 안 드러냅니다만 사건이 벌어지면, 저 사람은 이 사람 편이고, 저 사람은 내편이고, 사람으로 일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내 주변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없을 때 어떻게 하느냐? 사람의 노선들을 다 드러내면 됩니다. 다윗이 사용한 몇 가지 방법입니다.
2-3. 아마사의 등장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세바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대응이 무엇인가? 누구를 군대 총사령관으로 해서 진압케 하느냐? 입니다. 반란은 진압해야 하는데 누구로 하느냐? 이것이 삶에 가장 큰 결정입니다. 다윗은 아마사란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킵니다. 아마사가 누굽니까? 아마사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입니다. 누구 밑에서 온갖 아부한 사람을 어떻게 대장을 시키느냐? 다윗이 눈 여겨 보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다윗에게 대들었던 적군의 총대장을 현재 다윗이 자기 사람인 세바의 난을 집압하는 총 사령관으로 아마사를 삼았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아마사 입장에서 정권을 유지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사건을 일으키는데, 숨어있던 것을 완전히 드러냅니다. 그 속에서 복음의 가치보다 내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평소에 속성을 드러내게 하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한쪽은 하나님만 있으면 되는 낮추는 심령의 노선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아마사가 등장합니다. 아마사 등장하니까,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따라잖아요? 막상 다윗이 아마사를 내세우니까, 다윗이고 아마사고 하나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다윗의 권력이 좋지, 다윗이 하는 모든 행위를 난 좋아하지 않는다. 다윗이 당신이 왕의 혈족이라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이득을 볼 때 그때 난 당신 때문에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지, 당신이 만약에 우리의 가치를 모독한다면, 나는 다윗을 모독할 거야!!! 여러분,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사건을 통해서 폭로 시킵니다. 싫어하는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우는 것으로 다윗이 최고, 다윗은 만만, 그러다가 다윗도 안 되겠어, 눈 돌리고 따라가지 않게 되는 사태를 의도적으로 일으킵니다. 일으켜놓고 그 다음 아마사의 명령이 유명무실하니까. 세바의 난을 진압할 수 없으니까, 무엇으로 바꾸느냐? 그래 너희가 원하는 대로 바꿀게 말을 하고 요압의 동생 아비새를 새 군대장관으로 삼으니, 유다 지파 쪽에서 좋다고 추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마사는 어떻게 됐는가. 요압이 몰래 만나서 칼로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요압 장군은 세 명을 죽입니다. 첫 번째는 귀족 아브넬을 죽이고, 두 번째는 압살롬을 죽이고, 세 번째는 아마사를 죽입니다. 다윗 밑에 있는 사람을, 용사를 다 죽여 버려요. 그래서 다윗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요압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면, 내가 벌을 받겠다. 그런데 요압은 지혜로운 여인의 말에 꺽 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을 드러내고 아마사를 드러내고 아비새를 드러내고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다 정리가 되어진 이후에 다윗을 견고한 위치로 세워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인생에서 하나님의 세밀하신 은혜가 주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2-4. 두 번째 방법인데 3절,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의 후궁이 열 명이었습니다. 그 열 명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다윗은 급하게 몸만 빠져 나왔습니다. 그때 압살롬이 다윗이 빠져나온 왕궁을 탈취함으로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표시가 필요해서 장관들에게 물었어요. 그런데 장관과 신하들이 간청하기를 확실한 표는 다윗이 동침했던 후궁 열 명과 함께 백주 대낮에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침대를 옥상에 마련해놓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열 명과 함께 동침을 하라고 합니다. 다윗의 권위를 다 무너뜨리려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그렇게 합니다. 아들과 동침했던 그 후궁들이 지금의 후궁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권이라는 것은 남 녀 구분 없이 동등합니다. 여성이 남자와 결혼 할 때 남자 하나보고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남자가 비겁하게 급하다고 먼저 앞장서서 여자는 챙기지도 못하고, 횡단보도 먼저 건너가고, 아내는 치어 죽든지 말든지 이런 경우입니다. 여러분, 여자는 남자 보호 받고 평생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실수로 후궁 열 명을 남겨 놓고, 적군은 쳐들어오는데, 그러면 잘못은 누가 저질렀어요? 다윗입니다. 잘못했으면, 다시 후궁을 만났으면 인간적으로 억울한 수모를 겪은 비련의 주인공들을 다시 거두고, 다시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한 맺힌 것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무엇입니까? 상황을 후궁들에게 떠넘깁니다. 문맥으로 보면 반란을 일으킨 원수와 함께 했기 때문에 밀실에 따로 구분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조치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이런 행동을 합니까? 여인의 입장에서 다윗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이 맺힌 사람은 자기를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한 맺힌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 앞에서 자기 한을 논합니까? 예수님 안에서 착한 양심이 어디 있습니까? 이 여인이 다윗과 결별해야 될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인들은 다윗으로 인하여 발생된 결과라는 것을 전시하는 것 입니다. 다윗 때문에 이렇게 한 맺힌 여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 효과입니다. 그러면 여인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한 맺힘을, 다윗 때문에 당하고 고생했던 한 맺힘을 다윗에게 호소할 것이 아니고 다윗이 개입한 것과 다윗의 회개와 다윗의 아픔이 내 인생에 같이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일어나는 현장 앞에서 문제가 들어 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드러나게 하시고 정리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회복과 은혜가 온전히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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