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사업 찬반 논란 중심에 함안지역이 자주 언급된다. 함안 칠서와 창녕 길곡 사이에 흐르는 낙동강 본류에다 설치하는 보의 높이 문제로 정부 당국과 환경단체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얼마 전 환경운동가가 보 공사현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조이게 한 적도 있었다. 보에 물을 가두면 수자원은 확보되나 저지대 강변 농지는 습지화가 우려된다.
70년대 준공된 남강댐은 독특한 다목적댐이다. 넉넉한 수자원이 확보되어 서부경남은 물론 통영과 거제까지 생활용수는 물론이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로 쓴다. 물의 낙차를 이용해 돌린 터빈으로 전기까지 생산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홍수조절이다. 지리산자락에 많은 비가 내려 남강 하류가 범람할 우려가 있으면 곤양 쪽 사천만 수문을 열어 육수를 바다로 바로 내보낸다.
남강댐이 건설되고부터 의령과 함안의 강변습지는 옥토로 바뀌었다. 강변경작지는 상류에서 흘러온 모래흙 퇴적층으로 기름진 땅이었다. 물 빠짐이 좋은 그곳 비닐하우스는 수박농사가 잘 되기로 전국에 알려져 있다. 고향 초등학교 친구는 당도가 높은 명품 수박을 생산해 서울로 올려 보내면 인기 좋단다. 함안의 법수와 대산과 칠서는 남강과 낙동강 분류가 합류하는 강변 저지대다.
조선중기 함주부사를 지낸 한강 정구가 있다. 함주는 함안의 예전 지명이다. 그가 보기에 함안 지세가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음이 유감이었다. 북쪽은 궁궐이 있고 나라님이 계신 곳인데 높이 솟아 우러러 보아야한다는 논리였다. 뒤가 허전한 지세는 어쩐지 불경스럽고 배반의 기운이 감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함안의 남쪽 우뚝한 산을 여항산(艅航山)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여(艅)와 항(航)은 둘 다 배라는 뜻이다. 배가 한 척도 아닌 쌍으로 있는 바다라는 뜻을 담았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간다. 그러니 함안 북쪽을 휘감아 흐르는 남강과 낙동강은 여항산보다 높다는 논리였다. 해발고도는 여항산이 무학산보다 조금 더 높다. 나는 개천절 아침 평소 출근보다 이른 시각 댓거리로 나갔다. 나는 창원 방면에서 여항산 지세를 한 번 살펴보고 싶어 나섰다.
이제 통합창원시가 된 삼진이다. 삼진은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으로 여항산 산세가 흘러내려 바다에 닿았다. 드물게 있는 시내버스로 진전 상평마을 종점까지 갔더니만 여항산을 넘는 등산로가 없어 되돌아 나왔다. 나는 폐교를 새롭게 꾸민 여항청소년수련원부터 걸었다. 그사이 골마다 개울에는 갓 핀 갈대꽃이 너울거렸다. 물봉선 무더기도 아름다웠다. 여뀌꽃도 앙증맞게 피었다.
삼거리 의신보건지소에서 둔덕마을까지는 십 리는 족히 되었다. 이끼 낀 정려각과 효열비 몇몇이 눈에 띄었다. 한 시간 가까이 걸었더니 둔덕마을 들머리였다. 마침 진동에서 둔덕종점까지 다니는 시내버스가 들어와 내린 손님으로 할머니 한 분 뿐이었다. 할머니한테 여항산을 넘으려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마을회관 쪽으로 가질 말고 임도 따라 계속 올라가라고 했다.
비탈을 제법 오르니 새로운 자동찻길이 뚫리고 있었다. 군북 방향에서 차를 몰아 넘어온 중년부부는 송이버섯을 찾을 셈인지 소나무그루터기로 들었다. 나는 초행길이라 머뭇거릴 수 없었다. 가야 파수 방향으로 짐작되는 임도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걸었다.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쑥부쟁이가 화사하고 구절초가 선명했다. 취와 자주꿩의다리도 야윈 꽃잎을 펼쳐 목을 빼고 있었다.
산길을 혼자 걸어간 보람은 충분했다. 아무도 지나지 않는 산길에 내라도 찾아주지 않았다면 저 꽃들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보라색으로 예쁘게 피어난 꽃며느리밥풀과 꽃향유를 보았다. 노란 마타리와 흰 마타리도 여러 무더기였다. 미신령을 경계로 창원과 함안으로 나뉘었다. 고개를 내려서니 곶감마을로 유명한 함안 파수였다.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한 감은 볼이 노랗게 물들어 갔다. 10.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