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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식문화 비교
식생활을 결정하는 자연적 풍토
문화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성립된다. 음식문화 역시 자연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양국의 식문화를 비교하려면 국토환경의 차이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의 국토는 일본열도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지질 시대의 침강과 융기가 심하여, 호수가 많고 해안선의 출입이 잦다. 이러한 환경은 항만과 어항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고, 복잡한 해저의 지형과 지질은 다양한 플랑크톤과 해조를 자랄 수 있어 수자원을 풍부하게 하였다. 또한, 북상하는 쓰시마 해류와 남하하는 리만 해류가 동해부근에서 마주치기에 세계3대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열도가 남북 간으로 길게 늘어져 있어, 다양한 식자원이 있다.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는 쌀 재배에 적합하며, 삼림도 무성하다. 한편, 비가 많이 내리는 관계로, 목축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쉽게 고기를 구할 수 없어 菜食과 魚食을 주로 하는 식생활이 형성되었다. 물론 일본인들이 채식을 하게 된 이유 중에는 불교의 영향도 크지만, 기후의 영향이 사뭇 크다.
문화적 조건을 보자면, 일본열도는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사이에 위치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태평양쪽에서는 아무런 외래적 문명 파동이 없었다. 새로운 외래 문명은 주로 동해 쪽(한국. 중국 등)에서 왔다. 해류와 계절풍의 영향으로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은 아주 순탄했다. 덕분에 일본은 한국․중국의 문화는 물론 중국 문화에 유입된 중앙 아시아, 동유럽의 문화 요소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한국․일본의 주식?
대부분의 아시아국가가 그렇듯, 양국의 주식은 죽․밥․면․떡으로 일치한다. 그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면, 지금은 밥이 주식으로 생각되고, 죽이나 떡은 별미․부식 등으로 생각되지만, 고대에는 죽․밥․면․떡은 다같이 주식이었다. 아니, 오히려 고대에는 밥보다 죽․떡․면 등이 밥보다 앞서는 주식이었고, 밥 또한 솥이 발명되어 지금의 밥의 형태(낟알 상태 그대로 쪄서 내는)가 되기 전에는 찐 밥(떡밥)의 형태에 가까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곡물 요리 발달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쑨 죽 → 찐 밥․찐 떡 → 지진 떡․지진 밥 → 솥을 이용한 밥짓기, 엿, 국수와 만두] 로 추정할 수 있다
죽․밥
미곡으로 된 주식의 최초의 형태는 ‘죽’이었고, 시루가 발명되면서 찐 밥이나 떡의 형태의 주식이 나타났으며, 솥이 발명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밥이 완성된 것은 삼국시대 후기로 추정되는데 확실하진 않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밥이 완성되고, 곡물(쌀)수확량의 증가 등에 요인에 의해 쌀밥이 상용주식이 된 이후, 초기 농경시대에 최초의 음식으로 상용되어온 죽은 代用主食․別味喰․保養食․救恤食 등의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떡
떡이 의례적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양국은 일치한다. 예를 들자면 설날에 조상에게 떡을 바치고, 한국에서는 떡국, 일본에서는 雑煮를 먹었다. 떡은 농경을 주로 하던 동아시아의 고대사회에서 밥보다 앞서는 주식이었다. 그런데 솥이 발명되어 잡곡을 낟알 상태 그대로 쪄서 내는 밥짓는 기술이 생기면서 떡이 주식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명예퇴진한 떡은 신격(神格)을 가지는 음식으로 변했다. 그래서 종교의례나 세시명절 때 가장 핵심이 놓이는 제물로 떡이 자리를 잡았다. 고대 제의에서 제물로는 동물이나 가축이 으뜸이었을지 모르나 농경에서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 따위를 제물로 바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다음으로 중요한 먹을거리인 곡물을 동물과 똑같은 상태로 여기면서 떡을 만들어 제물로 올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한국의 종교의례에서 떡은 신령을 상징하는 제물이다. 유교식의 제삿상에는 집안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정사각형의 편 틀에 맞추어 네모 반듯하게 한 장 썰기를 하여 순서에 따라 똑바로 편틀에 고여 담고, 위에 웃기를 얻는다. 무(巫)의 굿상차림에도 증편,계면떡,백설기,거피팥떡,화전,주악,싱검초편,시루편,군뱅이떡 따위가 상에 오른다. 이들 떡은 제의가 끝나면 사람들에게 나누어져 신령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데 매개물 구실을 한다.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데도 떡이 사용된다. 요사이는 보기가 드물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새로 이사를 하면 시루떡을 마련하여 이웃에 돌리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떡을 통해 한 식구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보다 이전에는 시집갔던 딸이 친정에 올 때나 시가로 갈 때 양가에서는 절편이나 인절미를 큼직하게 만들어 동고리에 가득히 채워 들려 보낸다. 제사나 잔치를 하면 떡을 싸서 이웃이나 손님께 드렸다. 그만큼 떡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람들 사이에서 교환되었다.
고대 일본에서는 떡을 ‘모찌이이(餠飯)'라 불렀다. 고대 일본인들이 떡을 밥으로 먹었음을 이 말에서 알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일본의 떡은 헤이안(平安)시대에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떡에 복(福)이 담겨 있다고 여겨서 의식이나 신령제사 때 주로 제물로 사용했다. 오늘날 양력 1월 1일 일본인들은 ‘鏡餠(かがみもち)'라는 떡을 만들어 집을 지켜 주는 수호신령에게 바친다. 모양이 거울처럼 둥글기 때문에 ‘거울떡'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떡은 쌀가루로 만든다. 나무로 만든 제기 위에 흰 종이를 깔고 각기 크기가 다른 두세 개의 鏡餠를 포개어 얹어 놓고 그 사이나 맨 위에 곶감·다시마·귤·새우 등으로 장식해 놓는다. 鏡餠는 1월 1일 신령에게 바쳐진 후 집안마다 4일에서 7일, 혹은 11일에서 30일까지 그대로 둔다. 가장 길게 두는 집은 같은 해 6월 1일에 치우기도 한다. 30일 안에 젯 상에서 치운 鏡餠는 불에 구워 부드럽게 한 다음, ‘조니(雑煮)'라는 장국에 넣어 먹는다.
만두
일단은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곡류음식인 만두는 원래 그 명칭이 餃子(Zhao Zi)인데, 이상하게도 중국에서 전래될 때 명칭이 와전되었는지, 餃子는 찐빵을 의미하는 饅頭(Man Tou)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만두를 餃子(ギョーザ)라고 부르는데, 이는 어휘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의 남방에서 직접 만두가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食文化史
역사적 과정에 따라 일본의 식문화를 짚어 보자면,
[자연물 잡식시대(~기원 전후)→주식․부식 분리기=主穀副肉(기원전후~7세기)→당나라 음식 모방시대(那良:귀족식과 서민식 분리기→平安:식생활의 패턴화, 귀족 편식 시대)→일본음식 발달 시대(鎌倉:간소한 식생활→南北朝․室町:禪食보급)→남만․중국식품 유입, 和食완성기(安土․桃山)→일본요리 완성기(江戶)]
와 같은 흐름으로 발달해 왔다.
기원전후에서 7세기경에 이르기 까지의 주․부식 분리기에는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곡물이 주식이 되고 동물성 식품은 종적 지위로 바뀌었다. 당시의 주식은 곡류를 쪄서 먹는 것이었고, 부식으로는채소․어패류 등을 열가공하여 먹었다. 당나라를 모델로 하는 율령국가 체제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귀족 계급의 양식이 唐風으로 변화하며, 식생활에 영향을 미쳤는데, 금속식기, 도기, 칠기 등이 늘고, 기름을 사용한 요리도 등장했다. 那良시대(710~784)에는 젓가락이 일반화되고 건조식품이 보급되었다. 버터․설탕․연유 등이 전해져 약용으로 잠시 생산되기도 하였다. 平安(794~1192)시대에는 불교가 보급되면서, 식품에 대한 금기가 뚜렷해졌다. 불교의 영향으로 동물성 식품(특히 포유동물. 어패류는 제한적으로 가능했던 듯 하다)이 추방되었다. 荘園을 배경으로 귀족 계급이 확립하면서 그들의 식사 횟수․조리․식품․식사법 등이 형식화되고, 때로는 의식화되어, 藤原시대(10~12세기)에는 宮庭食을 대표로 하는 귀족 음식이 생겨났다. 한편, 여러 가지 금기로 인한 편식 및 틀에 박힌 식생활로 인하여, 영양실조 상태 등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이는 귀족계급에 한한 이야기로, 일반 서민들은 불교의 계율 등에 관계없이 자유로이 식품을 선택하여 비교적 건강한 식생활을 하였고, 이로 인해 이 시기에는 귀족식과 서민식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귀족이 지배하던 平安시대가 끝나고 원래는 서민생활을 하였던 무사가 지배계급이 되자, 고대 이래의 主穀副肉의 시대가 재현되어, 무사들은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무사들은 귀족 생활에 대한 동경도 가지고 있었기에, 당나라를 모방한 음식문화와 主穀副肉시대의 문화를 혼합시켜, 후대 근세 음식문화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무사들이 주로 선호했던 禅宗에서는 딱히 육식을 금하지 않았으며, 선종의 영향으로 懐石(かいせき)풍의 요리법과 식사법이 생겨났다. 밥도 이때부터 쌀을 찐 형태가 아닌 죽의 형태를 거쳐 현재와 같은 밥으로 발전하였다. 室町(1392~1573)시대에는 차가 유행하여, 차를 중심으로 하는 음식문화가 일상화되었다. 安土․桃山시대(1572~1600)에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서구의 식품, 설탕, 설탕을 넣어 만든 과자류가 수입되었다. 대륙에서는 만두(餃子)와 두부가 수입되었고, 조미료로써 된장과 간장이 나왔다. 이러한 무사 계급의 등장으로 식문화는 영양적 조화를 되찾았고, 이로 인해 평균수명도 늘어났다. 또한 육식에 의한 치료법도 등장했다. 한편, 江戸(17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지배계급이 된 무사가 스스로 귀족화 되고, 화폐경제의 대두에 의해 생활면에서 지배계급의 지위에서 전락하기 시작했다. 반면, 상인들은 생활이 급격히 향상되었는데, 이들은 종래의 음식문화를 집대성하고, 중국과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현재와 같은 일식을 완성시켰다. 일식이 완성된 시기는 元祿~化政간인데, 이 사이에 음식 문화의 중심이 교토에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에도에서 다시 교토로 옮겨졌다. 간장․된장․청주․설탕의 보급, 南蛮요리의 수입, 각종 절임(漬物)의 완성, 会席요리의 발달, 단 과자, 메밀국수․우동등의 분식의 발달, 가쓰오부시의 유행, 경음식점(軽飲食店)과 요릿집 출현 등이 이 시대의 음식문화를 특색짓는 것이다. 교통의 발달과 조리법의 진보는 일반 서민들까지 요리에 심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시기에는 獣肉이 부정한 것으로 기피되고 精進요리가 인기를 모았다. 또한 담배와 차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明治유신에 의해 봉건제가 무너지고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풍조가 생겨, 일본에는 많은 양식(肉食 및 洋菜, 조리법 등)이 유입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에 이르렀다.
肉食文化 VS 魚食文化?
어휘적 고찰
일본에는 가축류(육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에는 이름이 아주 적지만, 물고기에 대해서는 이름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스시 집에 가면 다양한 생선이름에 사뭇 적응이 쉽지 않다. 鰊은 청어를 의미하는데 한자로는 鯡라고도 쓰고, 읽는 방법에 있어서는 にしん이라고도 읽고 かど라고도 읽는다. 또 이 청어의 알은 원래 鰊(かど)の子라고 쓰다가 바뀐 듯한데, 현재는 数の子라고 부르게 되었다. 数の子는 그 의미와 모습에서 ‘자손번영’의 의미를 가지며, 정월의 お節料理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메뉴이다. 또한 鮭(연어)는
라고도 쓰며, 읽을 때는 さけ라하며, 그 알을 내장에서 꺼내어 염장한 것을 筋子(すじこ 혹은 すずこ)라고 부르며, 그 알이 뭉친 것을 한알 한알 떨어뜨려 놓으면 イクラ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한국의 숭어에 해당하는 鰡(ぼら)라고 하는 생선은 더욱 재밌다. 이 녀석은 커가면서 이름이 바뀌는데, 막 태어났을 때는 洲走(すばしり)라고 부르고, 어릴 때는 おぼこ, 조금 크면 鯔(いな), 거기서 조금 더 크면 ぼら(鰡), 마침내 성장이 끝난 다 자란 숭어는 とど(鯔)라고 불리게 된다. 이 외에도 우리가 다랑어(혹은 참치)라고 불리는 생선은 그 종류, 부위에 따른 이름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이처럼 일본어는 생선과 관련한 어휘가 풍부하며, 이로 비추어 보건 데, 일본은 생선에 관해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어는 가축에 대한 어휘가 풍부한 데, 특히 소고기에 관한 어휘는 세계적으로도 으뜸일 만큼 풍부하다. 그에 따라 재료(고기)의 활용 범위가 넓어서 머리에서 발, 가죽까지 활용하며 혀, 간, 허파, 곱창, 양, 천엽, 등골, 우신, 우랑. 유통.........등 소의 모든 부분이 조리에 이용되고 있다.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일본에서 소고기 부위의 호칭은 상당부분 한국어에서 유래한다. 처음에는 도축용어로써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일본어화 되었다. 예를 들자면, 소는 위장이 네 개 있는데 그중 첫 번째 위를 일본어로 みの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는 이 위를 잘라 펼친 모양이 갓과 닮았다 하여 회갓(膾笠)이라고 하는데, 일본어 みの는 갓이라는 의미이다. 또, 千枚(せんまい)라고 부르는 세 번째 위장은 우리나라의 千葉이 넘어가 변한 것이며, 대장부분은 テッチャン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일본어가 아니고, 우리나라의 ‘대장’이 그대로 넘어간 말이다. 한술 더 떠 소의 가슴 갈비부분을 일본어로는 カルビ라고 부르는 데, 이는 한국어의 갈비에서 넘어간 말이라는 것을 아무도 부정 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내장종류가 1945년 이후에야 식탁에 오르게 되었고, 내장에 대한 도축용어는 기존의 일본어에 없었으므로, 대부분 (아마도 재일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가 그대로 넘어가 사용되게 된 것 같다. 또한, 일본의 ユッケー라는 요리는 발음만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육회」가 그대로 넘어간 것이다. 단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소고기의 로스부분을 칼로 다져 먹는 것을 「육회」라고 하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말고기의 로스부분을 육회로 먹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역사적 고찰
일본에서 육식이 금기시 된 것은 7세기 후부터이다. 백제로부터 율령과 불교가 들어온 것은 6세기 경인데, 7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간 천황들에 의하여 동물의 살생이 금지되어졌다. 676년에는 전국적으로 “지금부터 이후 모든 수렵 어로자를 통제하니, 함정을 파거나 밟으면 창으로 찔리도록 되어 있는 장치 등을 설치하지 말 것. 4월1일부터 9월 30일 이전에 어량(魚梁)등을 설치하지 말 것. 또, 소․말․개․원숭이․닭의 고기를 먹지 말 것. 그 밖에는 금하지 않음. 만일 어기는 일이 있으면 처벌할 것임”이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칙령이 전면적으로 육식을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정 포획 방법을 금하고 수렵 어로 기간을 규제할 뿐이다. 그리고 육식을 금하는 동물은 거의 민가에서 사육되는 농경생활과 관련 있는 가축뿐이었다. 단, 원숭이는 가축은 아니지만 모습이 인간을 닮아 살생을 금하였다. 당시 많이 식용되던 사슴과 멧돼지는 금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725년에는 殺生禁断令이 내려졌는데, “정월 3일부터 12월 그믐에 이르기까지 천하의 살생을 금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유인 즉슨, 그해는 당시 수도 那良의 東大寺의 大仏開眼式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자주 육식 금단령이 내려져 귀족이나 상층계급사이에서는 점차 육식이 기피되었다. 불교 외에도 神道에서의 三不浄사상이 육식기피 기조를 부추겼다. 三不浄이란 죽음․출산․피와 관련된 부정을 말한다. 귀족 들 사이에 육식이 금지되면서 유제품이 상당기간 보급되었다. 불교는 우유나 유제품까지 금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살생금단 사상이 더욱 보편화되어 어패류나 유제품 외의 동물성 식품은 귀족들의 식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무사계급이 등장하면서 육식문화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육류보다는 어류나 새고기가 더 존중되었다. 室町시대 중기에 쓰여진 요리서 「四条流庖丁書」에는「魚物의 상하는 바다에서 上이오, 강의 것이 中이오, 산의 것이 下..」라 하였고, 또한「물고기가 먼저이고, 새가 다음...」이라 하여, 이로 미뤄 보아 물고기가 요리의 주역임을 알 수 있다. 安土시대에 이르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인이 들어 왔는데,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은 소고기․돼지고기․양고기를 우리들(남유럽인)이 말고기를 기피하듯 기피한다”고 하였다. 또, “말과 소는 많으나 소는 농사용으로, 말은 싸움터를 달리는 용으로만 쓰일 뿐 음식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다”고도 하였다. 한편, “우리들이 개를 멀리하고 소고기를 먹는데 비해, 일본인들은 소를 피하고 개고기를 약이라 하여 깨끗이 해치운다”라는 언급으로 미뤄 보아, 일본인들이 이 시대까지는 개고기를 먹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유럽인에 의한 육식문화가 부분적으로 수용되지만, 기독교의 탄압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들에 대한 국외 추방령을 내리면서 11개조의 조치가 취해졌는데, 마지막 조항으로 “소․말을 매매하고 먹는 일, 이 또한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라 되어있다. 당시에 몸을 補하기 위한 건강식으로는 고기를 먹었으나, 그 이외의 육식은 기피되어 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육식이 행해졌고, 부정한 것으로 배척되어진 獣肉을, 멧돼지고기는 산고래(혹은 모란꽃), 사슴고기는 단풍, 말고기는 벚꽃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이러한 역사로 미루어 보건 데, 일본은 유목이 힘든 자연적 환경 및 육류를 기피하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보다는 주로 어패류 및 야채류가 부식으로 자리잡아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국은 원래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에서 지금의 한국으로 넘어온 유목민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육식이 발달되었다. 이 유목민들이 우리 민족의 주류를 이루는 貊族(맥족)이다. 「삼국지 위지 東夷伝」에 의하면, 부여의 벼슬이름이 馬加, 牛加, 豬加, 狗加, 犬使였다고 하는데, 이들 정부가 온통 가축 이름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축의 사육을 잘했다는 점에서, 가축요리에도 능란했었을 것임을 쉽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의 晋시대의 책 「捜神記」에, “貊炙은 다른 민족의 음식인데도 중국의 귀족층에서 즐겨 먹고 있으니 이 것은 그들 다른 민족(貊族)이 이 땅을 침범할 증조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중국고전들에 의하면 貊은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고, 炙은 “고기를 불 위에 직접 쬐어 굽는 것으로 貊에서 온 것”이라 하며, 또한 “모든 炙은 무장(無醤)이다. 이는 炙은 미리 조미해 둔 것이니, 일부러 醤에 묻혀 먹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중국 전통의 고기요리는 대부분 조미하지 않은 채로,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에 묻혀 먹는 것에 비해, 貊炙은 조미를 한 다음, 구워서 그대로 먹는 다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건국신화에 보면, 마늘과 쑥이 나온다. 이로써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貊炙은 아마도 고기에 부추․마늘 등을 풍성히 넣고, 醤으로 간을 한 直火구이일 것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식문화학자들은 당시의 貊炙이 아마도 「너비아니」의 형태에 가까웠을 것이며, 이 貊炙이 오늘날 불고기의 원조라고 한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봄, 가을에 왕이 참가하는 수렵대회가 열렸으며 이 때 처음으로 잡은 산돼지나 노루로 제사를 지냈고, 신라에서는 양전(羊典)과 육전(肉典)을 두었다. 이와 같은 육류 이용의 풍습이 통일신라와 고려조에 이르면서 육식을 금하는 崇佛사조로 인하여 쇠퇴한 때가 있었다.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중국에서 온 사신이, 대접받은 고기요리의 조리방법에 대한 서투름을 손가락질 한 내용이 있다. 고기의 조리방법이 서투를 정도로 육류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고려 말에 이르러 遊牧族인 元과의 1세기 간에 이르는 문화적 접촉으로 다시 육류문화가 복원되어, 조선시대에 와서는 전생서(典牲暑; 궁중의 제사에 쓸 양. 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를 두어 祭享이나 賓客을 위한 가축 기르기를 소사관직(所司官職)이 담당하기까지 한다. 육류문화 만을 두고 보자면 元의 침입은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반면, 元이 神風를 만나지 않고, 일본 상륙에 성공했더라면, 일본의 육식 문화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식기의 역사
한국에서는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일본에서는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숟가락의 역사가 없었을까? 젓가락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젓가락
일본에서 문헌상으로는 箸(젓가락)가 등장한 것은 平安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平城宮(나라시대 平城京내의 궁성) 터에서는 젓가락이 출토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奈良시대에는 젓가락을 사용했다 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한편 弥生시대 및 古墳시대 유적에서는 젓가락이 출토되지 않았다. 이러한 출토품 등의 자료로 추측해보자면 飛鳥시대에 들어와 식기와 공기와 접시가 늘어났고, 그것이 나라시대까지 이어졌다라고 볼 수 있겠다. 奈良시대의 출토품 중에 佐波理(さはり)라고 하는 한국의 밥공기를 닮은 금속제 식기가 있는데, 이는 아마도 渡來人에 의해 사바리(사발)가 전해 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모양 또한 현재 한국에서 쓰여지는 금속사발그릇과 굉장히 유사하며, 아마도 7세기쯤에 대륙에서 식기셋트가 건너가 일본에 자리잡은 걸로 추측된다.
숟가락
숟가락은 현재의 일본식기에서는 빠져있다. 그러나 奈良의 正倉院(しょうそういん)에서 나온 보물 중에 신라에서 건너온 금속제 식기와 숟가락이 있다. 서민들이 이런 금속제 도구를 사용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상류계급 사이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일본식생활사 그림 100-101 첨부) 이러한 고대 출토품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에는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으로 식사를 했으며, 이 숟가락은 젓가락과 비슷한 경로로 대륙에서부터 도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平安시대 말기부터 식생활에서 숟가락이 빠지게 된 것 같다. 아마도 平安시대에 和風化(平安 후반 9세기 말에 遣唐使가 폐지되어, 중국과의 국교가 끊어지게 되자, 藤原씨 주재 하에 독자적 일본풍의 문화가 번창하게 된 것)가 진행되면서 점차 식기에서 숟가락이 탈락되게 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숟가락문화?
국은 갱(羹),확(
),탕(湯)이라고도 하며, 고기류, 생선, 조개류, 채소류 등의 재료로 국물을 많게 끓인 음식으로 한국 밥상 차림에서는 기본음식이다. 한국에서 세계에서 드물게 숟가락 문화가 발달한 것은 이 국 요리 발달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説,1723)」에서 ‘조석으로 밥과 갱, 고기 하나, 채소 하나를 먹는다(凡朝夕供用飯羹之外一肉一菜)"라는 구절이 있어, 국이 상용음식임을 알 수 있다. 국과 탕은 그다지 의식하여 구별되어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굳이 구분해 보자면, 중국의 시집「초사(楚辞)」에서 ‘갱은 채소가 섞인 국이고 확은 고기국’이라고 하며, 원(元)대의 조리서인「거가필용(居家必用)」을 보면 국은 대부분 갱이고 탕은 오직 음료용, 약용에만 쓰인다고 하였다. 1827년경 서유구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誌)」의 정조지 음청지류(飲清之類)에는 탕이란 향기 나는 약용식품을 뜨거운 물에 달여서 마시는 음료라 하였으며,「동의보감(東医宝鑑)」에는 약이성 재료를 뜨거운 물에 달여서 질병치료제 또는 보강제로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사료와 함께 미루어 보건 데, 갱과 탕의 재료를 검토해보면 일반적으로 갱에는 식물성식품이 섞여있고, 탕은 거의 동물성식품만의 국이 많다. 그러므로 「초사」에서 말하는 갱과 확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여진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국을 높여서 말할 때 탕이 된다고 하였고, 「시의전서」에서는 제사에 쓰이는 국을 탕이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탕은 음료가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며 국이 되기도 한다. 알쏭달쏭 어렵지만, 가축의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가 보신 등의 목적의 약용으로 쓰였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면 옛날 사람들이 국과 탕을 어떤 잣대로 구분했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요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
한국요리의 특징은 가능한 다양한 조미료, 다채로운 재료를 써서 잘 섞어 조화로운 맛을 내는 것이다. 탕류나 비빔밥 등의 발달은 그런 면을 잘 보여준다. 반면, 일본 요리의 특징은 “요리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재료 자체의 맛에 커다란 변화를 가하지 않고, 단지 재료 고유의 맛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한국의 국이나 탕, 찌개는 건더기도 건더기지만 건더기 등에서 우러나온 그 국물 맛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구수하다” “얼큰하다”라는 표현은 건더기에서 우러난 맛이나 조미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맛을 의미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건더기보다도 국물이나 양념의 맛이 원재료의 맛과 굉장히 동떨어져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또한 건더기에는 국물 맛이 배어, 국물과 건더기 맛이 그리 차이를 내지 않고 비슷해지면서 조화를 내는 맛이다. 그에 비해 일본에는 우리의 찌개요리와 비슷한 것으로 나베(鍋)요리가 있는데, 이는 끓여서 국물의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주로 건더기를 골라내어 먹는 것에 중점을 둔다. 스끼야끼도 주로 건더기를 골라 먹으며, 국물은 그다지 마시지 않는다. 라면 등의 국물을 낼 때도 건더기로 국물을 내지 않고, 돼지뼈․닭뼈․생선뼈 등의 뼈에서 국물을 우려내고, 건더기는 마지막에 고명으로 첨가하듯 올리게 된다. 그런 연유에 건더기에는 그다지 국물 맛이 배지 않는다. 면과 국물, 건더기가 개성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고유한 맛을 내는 것이다. 또한 국이나 탕을 먹을 때, 한국인들은 국에 밥을 말거나, 밥을 입에 문 상태에서 국을 물리거나 하는데, 이는 밥과 국을 조화시켜 먹는 것이다. 물론 그 러한 행위는 숟가락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일본인들은 밥을 삼킨 후에 젓가락을 적시거나 입가심을 하는 용도로 국을 마신다. 절대 입에 밥이 있을 때 국을 마시거나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일본 친구는 내가 라면에 밥을 말아먹는 걸 보고는 기겁을 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국․탕 문화는 이제껏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개성적인 거 같다. 내가 아는 중국의 국․탕 문화도 한국의 문화와 매우 다른 것 같다.
지금은 일식의 대표적 명사로 불리는 사시미나 스시 등을 생각해본다. 刺身(さしみ)는 생선을 발라내 한입크기로 잘라낼 뿐, 어떠한 양념이나 조리를 가하지 않는다. 스시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握り寿司(にぎりすし)에서 생선과 밥 사이에 들어가는 와사비는, 단지 생선의 비린내를 살짝 가려주는 정도에 그치며, 오히려 생선의 맛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재료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일식집이 아닌, 횟집에서 생선회를 시키면, 초장과 상추, 마늘 등의 야채가 나온다. 초장이나 상추, 마늘 등은 맛이 매우 강렬한 식품이다. 이것을 생선회와 같이 먹게 되면, 솔직히 말해 생선 본연의 맛을 즐기는 것에는 역효과이다. 생선뿐인가. 고기 등을 구워 먹을 때도 쌈장,야채,마늘등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야채에 이것저것 잔뜩 집어넣고 한 입에 집어넣어 버린다. 회덮밥이나 회냉면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빔밥은 한국적 요리법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을 만한 요리이다. “궁정에서 식사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할 찬이 없어, 조금씩 남은 찬을 밥 위에 색색이 얹어 대접했다”라는 비빔밥의 유래를 생각해봐도 조리법을 생각해봐도 이는 [조화]로 귀결된다. 뜨거운 밥이던 찬밥이던 갖은 재료를 얹어 장을 넣고 비비면 일품 요리가 된다. 여기서 비비는 것은 고명이나 밥을 짓이기는 것이 아닌 뒤섞는 것이다. 고명은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고, 그냥 있는 걸 다 넣으면 된다. 일본에서 비빔밥과 비슷한 요리로 五目飯(ごもくめし)라는 것이 있지만, 이는 비벼 먹는 것이 아니라, 밥을 하는 시점에서 약간의 야채 등을 넣고 지은 밥일 뿐 더러, 비비거나 하지 않고 그냥 먹는다. 한국에서 비빔밥이 일본에 유입되었을 때, 비비는 방법을 모르는 일본인들은 밥을 비비지 않고 그냥 떠서 먹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요즈음은 대한항공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는데, 비빔밥 양념 위에는 밥을 비비는 방법이 세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나는 요리만화를 좋아해서, 국내에 나오는 요리만화는 거의 다 섭렵하고 있는데, 최근에 본 [맛 좀 봐라]라는 책에서의 도미요리대결이 인상깊었다. 돔 요리를 가지고 대결을 하는데, 대결자 둘 다 막상막하의 맛있는 요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승패는 결국 누가 더 도미 본연의 맛을 살렸느냐로 간단히 매듭지어 져 버렸다. (대결자․심판․관객이 모두 매우 오버하면서도 납득을 하는 장면이 매우 웃겼다) 그 장면을 보면서 “돔의 맛이 원래 이렇든 저렇든 맛만 좋으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했었다. 레포트를 쓰는 지금에 와서야 역시 나는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레포트를 마치면서..
개괄적으로 요리사를 다루고 한․일간을 비교하다보니, 세세한 것은 제대로 짚지 못하고 넘어갔다. 특히나 [懷石料理]라던지 [江戸시대의 경음식점과 관람문화와의 관계] 등은 개별적으로 다뤄볼 가치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 지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고사에 좇기다보니 손을 못 대고 만게 아쉽기 이를 바 없다. 懷石요리 등을 필두로 불교가 일본요리사에 미친 영향이라던지, 江戸시대의 관람문화․町人문화 등이 일본요리에 어떠한 바람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단지 식문화에 그치지 않고 일본 문화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재밌고 심오한 주제이기 때문에.. 수업을 듣는 다른 분들도 꼭 한번 공부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끝으로 이 곳에서의 비교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육식문화이고, 일본에서 어식문화라 해서, 일본에 고기요리 없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생선을 안 먹는 것도 아니다. 세계가 넓다 보니 “우리나라만의 고유의 요리!”라는 것이 있다고 우기는 것도 웃기고, 누가 원조냐 후발이냐를 따지는 것도 웃기다. 김치가 우리나라 요리라고 하지만, 사실 지금의 형태의 김치가 완성된 건 최근이고, 고대 중국에도 김치가 있었다 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자가 김치를 즐겼다라는 것은 문헌상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객관적 고찰에 의하면 김치의 원조는 오히려 중국이다. 중국의 자차이(중국집에서 흔히 “짜사이”라고 부르는 그것)나 일본의 漬物(즈케모노)는 김치의 친척 뻘이다. 일본의 김치를 두고 발효했나 안 했나의 차이로 김치가 아니라고 우기는 방송프로도 봤는데, 우리나라 고대의 김치는 발효 안된 상태의 것이 더 많았다고 한다. (정확히는 염장에 가까웠던 것 같다) 또, 참고한 어떤 책에서는 熟れ鮨를 한국이 원조고 한국에서 넘어간 食醯요리라는 글이 있는데. 비약이 너무 심하다 싶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레포트에서는 단지 그것이 주류인가 비주류인가 정도의 선의 문맥에서 뭉실뭉실 이해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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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일본식생활사 /와타나베 미노루 /신광출판사
일본문화론/ ?
食과 料理의 世界史 /Katie Stewart /東明社
음식으로 본 동양 문화 /김태정,손주영,김대성 /대한교과서
교양을 위한 음식과 식생활 문화 /김기숙,한경선 /대한교과서 등등..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