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자야 노~올자
7.수덥뿌리 선생님
나보다 세살 더 먹은 형님은 면 내에서 알아주는 신동이다.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와 우리 엄마 아버지 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형님 칭찬이 대단했다. 아이큔가 뭔가가 150이 넘는데 국내에서는 그 이상을 검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엄마는 그저 기분이 좋아 달걀을 있는 대로 삶아 내오고 막걸리도 몇 주전자를 사다 대접을 하신다. 이범찬 선생님이신데 무척 허풍 스럽고 항상 머릿결이 쑥대밭 같다 해서 별명이 수덥뿌리다. 몇 년후에 백마강인가 어느강을 건너다 익사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수덥뿌리 선생이 자랑하는 수재인 우리형을 아버지는 큰형도 못 보낸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버티시는게다. 그해 여름 동안 우리집 마당은 선생님들의 농성장으로 변했다. 수덥뿌리 선생은 올때마다 커다란 주전자에 막걸리를 쪼금 사서 들고 오신다. 아버지와 두어잔 마시면 곧 술이 떨어지고 엄니는 나에게 술 외상을 시킨다. 닷되 들이 주전자는 나에겐 조금 벅차게 무거워서 봉자랑 둘이 들고 오다 길바닥에 놓고 고개를 숙여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번갈아 한 모금씩 빨아 먹고 몇 발짝 가다. 또 빨아 먹고는 한다.
어떤 선생은
“내영이 아버지! 학비가 부족하면 우리가 송아지를 한 마리 사 드릴 테니 그걸 잘 길러 학비에 보태 쓰십시오”
하고 제안을 하니 우리 아버지는 그러신다.
“소 기르려면 외양간도 있어야 되고. 쇠죽은 누가 쑤어 준대유?”
말 꺼낸 선생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자기 가슴만 친다. 공부 꽤나 하신 아버지가 이러는 데야 이겨낼 장사가 없다. 그래도 수덥뿌리 선생님은 매일 오고 다른 선생들은 몇 명이 교대로 동행을 하여 우리집 마당에 진을 치면 아버지는 들에서 아예 들어오지도 않는다.
버티기 한달만에 아버지가 굴복을 하고 둔포중학교라도 보내겠다고 하니 수덥뿌리 선생은 그것도 안된단다. 평택중학교를 보내야 한단다. 결국 형님은 평택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날은 합격자 발표를 보고 우체국에 가서
<내영 수석 합격>
이라는 전보를 치고 집에 들어와 기분 좋다고 쇠 간에 술한잔 드시고 있는데 그제서 전보가 도착했다. 그런 자식을 중학교도 안 보내 겠다고 야단이셨으니...
8.사십년만의 사과
국민학교 4학년때 우리반에는 박제순이라는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아버지가 재만이네 철공소에서 일을 하시고 용남산 기슭에 있는집 세채중에 얼마전 처녀가 목매어 자살하고 흉가가 되어 비어 있는 집에 이사를 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가난해 보였는데 결석 일수는 많아도 공부는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었다. 집터가 흉가라 그런가 얼마 못가서 제순이 아버지도 병들어 들어 누웠고 바짝 말라 가더니 돌아 가셨다. 폐병이라고 했다.
그후 제순이의 결석 일수는 더 많아 졌고 학교를 오갈 때 동생을 업고 집을 보고 있는 제순이를 자주 볼 수있었다. 엄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신단다.
국민학교 6학년때 반에서 극빈자 7-8명은 강냉이 죽을 쑤어 주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순이는 그것도 받아 먹지를 못했다. 어느날인가 내곁에 오더니
“덕영아 오늘 점심 벤또좀 같이 먹을 수 있겠니?
하고 고개를 떨구고 모기 만한 소리로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어? 오늘 기호하고 나눠 먹기로 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리자 아무말 없이 돌아서 나가더니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와서 내 책상 위에 내려 놓으며
“이것좀 먹어봐”
하는 것이었다. 삶은 고구마 두개였다.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제순이 엄마는 시장 바닥에서 고구마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밥을 먹어 본지가 언제 인지 모른단다.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얼마나 밥이 먹고 싶었으면 그런 청을 했으며, 이 철부지는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거절을 하였단 말인가? 졸업을하고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오늘날 까지도 그때 그상황이 나를 괴롭게 했다. 제순이는 국민학교 졸업후 서울 문래동 어딘가 선반공으로 취직을 했다는 소릴 들었는데 IMF때 한 100억 부도를 맞아 망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해외 근무후 울산에서 20여년을 사느라고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번도 못나가다가 몇해전 우연히 한 친구의 연락을 받고 동창회를 참석했다. 제순이가 회장을 맡고 있었다. 졸업후 40년 만이 였다. 많이들 변해 있었고 제순이는 옛날의 제순이가 아니었다.부도후 곧 재기를 해서 인천 남동 공단에 큰 공장도 가지고 있는 회장님이 되어 있었다. 제순이를 보자 마자 나는 40년을 고민해온 괴로움을 털고 싶었다. 단둘이 소주잔을 부딪히며 옛날 얘기를 꺼냈다.
“제순아 너 혹시 6학년때 나에게 고구마 두개 준거 기억나니?”
제순이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너 아직 그걸 기억하고 있니?”
“그래 그땐 철이 없어 참 미안하다 용서해라”
“아냐. 그일이 오늘에 내가 있도록 해준 걸 거야 오히려 내가 고맙지.. 그리고 그때가 6학년이 아니고 5학년때야 난 6학년을 안다녔 잔니”
“어머님은?”
“아직 생존해 계시는데 가끔 네 얘기를 하셔 그 예쁘고 공부 잘하던 애는 안만나느냐고”
사십년 만에 마음에 짐 하나를 벗을수 있었다.
내달엔 그녀석 사위를 본단다. 축하 연주라도 한번 해줄까?
첫댓글 봉자는 어떻하라구.... ?
제순인 남자에요
몸살 다 낫으 셨네요! 그러게요 옛날 가난해서 그럴수밖에 없었던 시절 가끔 제 말투가 쌀쌀 맞아서그런지 자신도모르게 남의 맘을 상하게 만들죠 그래서 가끔 후회를 많이 해요 본의 아닌 그런 일 인게죠
술몇잔 사주시고 대금으로다 멋진 곡조 읆혀 주시면 뭐라하겠습니까? !! 3탄부턴 봉자씨가 설설 이야기에서 제외되는 느낌을 받는데... ^^ ; 지는유 봉자씨가 주연인 야그를 좋아라한다구요^^ ㅋㅋ
참으로 가슴아픈 시절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저도 서상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나이지만 저 어릴때만 해도 강냉이죽을 학교에서 얻어 먹었고 나중에는 옥수수빵을 구워서 지급해 주더군요. 그나마도 갯수가 모자라서 손검사. 손톱검사. 목아지때검사 등등해서 더러운아이는(저 포함해서) 맨날 남들이 먹는 빵 침흘리며 구경만 해야 햇으니 참 지금 생각해도 제순이란분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ㅡㅡ;
후후,,,,, 정말 어린시절 먹던 얘기 하자면 삼일밤은 새워야 할걸요,,,,,,
떽끼 !! 이사람아~~~
요새도 수덥뿌리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실까요? 참 훌륭한 선생님을 맞나 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