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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해제
Ⅲ. 일본의 『일본서기』 연구사
1. 나량(奈良), 평안(平安)시대의 『일본서기』 강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직후인 양로(養老) 5년(721)부터 강보(康保) 2년(965)까지 일본 조정에서는 모두 일곱 차례 강서를 하였다. 그것은 13세기 후반에 복부겸방(卜部兼方)이 편찬한 『석일본기(釋日本紀)』 개제(開題)에 인용된 「강보(康保) 2년(965) 외기감신(外記勘申)」의 「일본기강례(日本紀講例)」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본기강례」에서는 강서의 연월일과 박사 이름, 강서 장소, 경연(竟宴) 연월일, 경연가(竟宴歌)의 서자(序者), 가인수(歌人數)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로 5년(721)의 강서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었던 듯, 양로 5년이라고만 적고 있을 뿐 월일이나 박사 이름은 적고 있지 않다. 『속일본기(續日本紀)』양로 5년조에도 『일본서기』 강서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석일본기』나 『일본서기』의 고사본에서 만엽가명(萬葉假名)을 이용하여 일본어로 읽으면서 「양로(養老)」 또는 「양로설(養老說)」이라고 주를 달고 있는 곳이 있는데, 만엽가명(萬葉假名)을 이용한 방법이 나량(奈良)시대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어서 양로년간(養老年間)에 강서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강의를 담당한 것은 『일본서기』 편찬에 참가한 사람이었을 것이지만 누가 강의를 담당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다음해에 일본조정에서 즉각 강서한 것은 『일본서기』가 완성된 것을 조정의 신하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일본서기』를 일본어로 읽었고, 이때 읽은 것을 필기한 것이 「양로」 또는 「양로설」로 남게 된 것이다.
양로 5년 이후 다시 『일본서기』를 강의한 것은 차아(嵯峨)천황 때이다. 「일본기강례」에서는 단지 홍인 3년(812)이라고만 적혀 있으나, 『일본후기(日本後紀)』 홍인 3년 6월 무자조에서는 이 날 참의(參議) 종4위하 기조신광빈(紀朝臣廣濱), 음양두(陰陽頭) 정5위하 아배조신진승(阿倍朝臣眞勝) 등 10여 인에게 「일본기(日本紀)」를 읽도록 하였는데, 산위 종5위하 다조신인장(多朝臣人長)이 강서를 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 홍인강서(弘仁講書)는 외기조사(外記曹司)에서 홍인4년까지 이어졌다. 이 홍인강서 때부터 훈점(訓点)을 기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훈독법은 상당히 자유로워 문맥에 따라 읽는 법이 바뀌었다.
승화강서(承和講書)는 승화(承和) 10년(843) 6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이어졌다. 이때는 고사(古事)를 잘 아는 산위 정6위상 관야조신고년(菅野朝臣高年)이내사국(內史局)에서 「일본기(日本紀)」를 강의하였고 참의 자야정주(滋野貞主)와 문장박사 춘징선승(春澄善繩) 등이 강서에 참석하였다.
원경강서(元慶講書)는 원경(元慶) 2년(878)부터 원경 5년(881) 6월까지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강서의 형식과 내용이 완성되었다. 우선 학식자를 박사(博士), 도강(都講), 상복(尙復) 등으로 임명하여 강서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는 박사 대학조교(大學助敎) 선연애성(善淵愛成), 도강 대내기(大內記) 도전양신(島田良臣), 명경생(明經生), 기전생(紀傳生) 3~4명이 강서를 담당하였고, 강서에는 태정대신 등원기경(藤原基經)을 비롯한 관리들과 화산승정(花山僧正) 등이 참석하여 활발한 토의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서기』 전체 30권의 강서가 끝난 후 원경 6년 8월에 시종국(侍從局) 남쪽의 우대신(右大臣) 조사(曹司)에서 경연(竟宴)을 거행하였다. 이 경연에서는 참가자들이 『일본서기』 속의 천황과 신하를 주제로 한 화가(和歌)를 만들어 대가소(大歌所)의 어금사(御琴師)의 왜금(倭琴) 반주에 맞추어 낭송하였다. 경연이 끝난 후 강서를 담당한 박사, 도강, 명경생, 기전생 등에게 녹을 주었다.
연희강서(延喜講書)는 연희(延喜) 4년(904) 8월부터 연희 6년(906) 10월까지이루어졌다. 이때 강서를 담당한 것은 박사 대학두(大學頭) 등원춘해(藤原春海), 상복(尙復) 학생 갈정청감(葛井淸鑑)과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 등원충기(藤原忠紀)였다. 참석자의 이름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대신 이하 관리들이 참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연은 연희 6년 12월에 시종소(侍從所)에서 거행되었다.이 연희강서의 경연과 승평강서(承平講書)의 경연 때 낭송했던 화가(和歌)는 『일본기경연가(日本紀竟宴歌)』로 현재 남아 있다.
승평강서는 승평(承平) 6년(936) 12월부터 천경(天慶) 6년(943) 9월까지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이루어졌다. 이때는 박사 아파권수(阿波權守) 시전부공망(矢田部公望)과 상복(尙復) 귤중일(橘仲逸)이 강서를 담당하였다. 경연은 천경 6년 12월에 시종소에서 거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보강서(康保講書)는 강보(康保) 2년(965) 8월에 시작되었지만 언제 끝났는지, 이때 참석자가 누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강서를 담당한 것은 승평강서에서 상복(尙復)이었던 귤중일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박사가 되어 선양전(宣陽殿) 동상(東廂)에서 『일본서기』를 강의하였다. 이후 더 이상 일본 조정에서『일본서기』 강서를 실시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양로강서(養老講書)부터 강보강서까지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박사들이 『일본서기』를 강의한 내용은 『사기(私記)』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그중 일부 내용이 현재 일본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은 『일본서기사기(日本書紀私記)』라는 성립연대 미상의 책[잔권(殘卷)은 갑을병정(甲乙丙丁)으로 모두 네 종이 존재한다.]
이나 『석일본기』에 주(註)로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통해 나량, 평안(平安)시대의 『일본서기』에 대한 연구를 짐작할 수 있다. 강서를 담당한 박사들은 『일본서기』의 사서적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의 훈고학자와 마찬가지로 훈독(訓讀), 어의(語義) 등에 대한 실증적인 설명에 주력하여, 한문으로 서술된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읽어내려고 하였다.이것은 불교경전이나 한적을 읽을 때에 한자음으로 읽었던 것과 방법과 달랐다.
『일본서기』는 편찬할 때에 이미 일본어로 읽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 고안되어 있었다. 즉 『일본서기』에는 314개의 훈주가 들어있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모르는 때에 일본어로 그 한자의 읽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강서를 통해 『일본서기』 본문을 일본어로 읽는 모범이 만들어졌다.이러한 평안시대의 훈독의 결과는 평안 중기의 암기본(岩崎本)을 비롯하여 전전본(前田本), 도서료본(圖書療本), 북야본(北野本)과 같은 가점(加點)이 보이는『일본서기』 필사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일본서기』의 훈독은 여기에 보이는 고훈(古訓)을 표준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서기』강서는 일본의 사학 연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 이외에 따로 본격적으로 『일본서기」를 연구한 예는 보이지 않지만, 평안시대에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혁명설을 가지고 언급한 사람도 있었다. 삼선청행(三善淸行, 847~918)은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신유혁명설을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는 창태(昌泰) 4년(901)에 조정에 『혁명감문(革命勘文)』을 제출하여 『역위(易緯)』에 따르면 이 해가 신유혁명의 해이므로 우대신 관원도진(菅原道眞)을 사직하도록 하고 연호를 바꾸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혁명감문』에서 『역위』의 정현(鄭玄)의 해석에 맞추어 신유혁명설을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 원년이 신유년(기원전 660)인 것은 1부(1320년) 혁명이 시작되는 때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로부터 1320년 후인 제명천황 6년(660)에 1부 혁명이 끝난다고 하였다.
9세기 초에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보이지 않는 자신들만의 전승을 서술하려는 씨족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동(大同) 2년(807)에는 재부광성(齋部廣成)이 『고어습유(古語拾遺)』를 저술하여 기부[忌部, 재부(齋部)]씨가 일본 조정의 제사에서 중신(中臣)씨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기부씨가 신사(神事)에 관련되었던 유래를 설명하여 기부씨가 신사 제사에서 배제된 것에 항의하고자 한 것이었다.
9세기에는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10권)가 등장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추고(推古)천황 28년에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와 대신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천황의 명에 따라 선대구사(先代舊事), 상고국기(上古國記), 신대본기(神代本紀), 신기본기(神祇本紀), 천손본기(天孫本紀), 제왕본기(諸王本紀), 신련본기(臣連本紀), 반조국조백팔십부공민본기(伴造國造百八十部公民本紀)를 저술하던 도중에 성덕태자가 죽어서 그때까지 완성된 신황계도(神皇系圖) 1권과 선대국기(先代國記), 신황본기(神皇本紀), 신련반조국조본기(臣連伴造國造本紀) 10권만을『선대구사본기』라는 이름으로 펴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선대구사본기』에는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고사기(古事記)』, 나아가 9세기 초에 저술된 『고어습유(古語拾遺)』의 문장까지 들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9세기 초 이후에 나온 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권5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미장(尾張)씨와 물부(物部)씨의 독자적 전승이 보이고, 권10 국조본기는 오래된 자료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저자는 물부씨 계통의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체 10권 중에서 1권부터 6권까지는 신대(神代), 7권부터 9권까지는 신무(神武)천황부터 추고천황까지를 천황의 계보, 10권은 국조(國造)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선대구사본기』는 평안시대에서 중세에 걸쳐 『일본서기』를 읽을 때 갖추어야 할 책으로 중시되었고, 출전으로서도 『일본서기』 이상으로 중시되었으나 근세에는 위서(僞書)로 여겨지게 되었다.
11세기 말에는 『부상략기(扶桑略記)』(30권)가 등장하였다. 이 책은 신무천황부터 굴하(堀河)천황 관치(寬治) 8년(1094) 3월 2일까지의 일본 역사를 간략하게 한문 편년체로 서술하여 육국사(六國史)의 초본(抄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불교관련 내용에 역점을 두어 서술하고 있어 일본 불교의 약사(略史)이기도 하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錄)』에서는 저자를 「아자리 황원초(皇圓抄)」라고 적고 있는데, 황원(皇圓, 1074~1169)은 등원(藤原)씨 출신의 천태종승려였다.
평안시대에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 교단에서는 불(佛)과 신(神)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여, 불(佛)이 임시로 신(神)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불교가 우위에 서서 그 주도하에 신기(神祇) 세계를 포섭하고 통합해 가려는 적극적인 논리였다. 10세기말 등장한 『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는 왕권과 세속세계를 향해 불(佛)의 세계가 신기(神祇)의 세계보다 상위에 있음을 논리화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신도가(神道家)와 신불습합적인 현밀(顯密)불교교단의 승려들은 『일본서기』를 교의(敎義)의 원천으로 존중하여 『일본서기』 신대권을 ‘신전(神典)’으로 여겼다. 이들은 각종의 신도서(神道書)를 저술하여 유통하였다.
2. 일본 중세의 『일본서기』 연구
강보강서(康保講書) 이후 일본 조정에서 『일본서기』의 강서는 더 이상 없었지만, 귀족사회에서 『일본서기』는 계속 읽혔다. 그리고 원정기(院政期)에는 후백하천황(後白河天皇)의 측근이었던 신서(信西)가 1153년경 『일본기초(日本紀抄)』를 저술하였다. 신서[信西, 속명 등원통헌(藤原通憲)]는 대강(大江) 가문을 중심으로 한 박사 가문의 일본서기학을 계승하여 『일본서기』를 연구하였다. 그는『일본서기』의 훈독에 그치지 않고 자구를 해석하였다. 이런 점에서 신서(信西)의 『일본기초』는 『일본서기』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일본서기』에 나오는 300여 개의 어휘를 상권[천(天), 지(地), 초목(草木), 신(神), 인(人)의 5부(部)], 하권[물명(物名), 소명(所名), 사(詞), 조수어충(鳥獸魚虫)의 4부]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그에 해당하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약술하고 그 뜻을 적은 유서적(類書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항목의 대부분은 신대권(神代卷)에서 취한 것으로 설화적인 내용이었다. 마치 「일본서기설화색인」과도 같다.
겸창(鎌倉)시대에는 복부겸방(卜部兼方, 생몰년 미상)이 『석일본기(釋日本紀)』를 펴내었다. 『석일본기』는 복부겸문(卜部兼文, 생몰년 미상)이 문영(文永) 11년(1274)부터 다음해 건치(建治) 원년(1275)에 걸쳐 전(前) 관백(關白) 일조실경(一條實經)과 그 아들인 섭정(攝政) 가경(家經) 등을 대상으로 강의한 노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강의 노트를 복부겸문의 아들 복부겸방이 28권으로 편집한 것이다. 정안(正安) 3년(1301)에는 사본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1275년 이후 1301년 이전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복부(卜部)가(家)는 원래 중신(中臣)씨 밑에서 복점(卜占)을 담당하던 집안이었으나, 겸방의 집안은 경도(京都)의 평야(平野)신사, 길전(吉田)신사의 사가(社家)였다. 겸방의 할아버지 겸뢰(兼賴)와 아버지 겸문은 모두 고전적(古典籍)에 조예가 깊었다. 복부가에는 평안시대 초기 이래 조정에서 행해지고 있던 『일본서기』 강독의 기록인 「일본기사기(日本紀私記)」가 대대로 전해지고 있었던 듯하다. 겸방은 조정에 출사하여 신기권대부(神祇權大副), 산성수(山城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섭관가인 일조가(一條家)에도 봉사한 사람이다. 그가 『석일본기』를 펴냄으로써 복부 가문은 『일본서기』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이어갈 수 있게 되어, ‘일본기(日本紀) 집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석일본기』는 개제(開題), 주음(注音), 난탈(亂脫), 제황계도(帝皇系圖), 술의(述義), 비훈(秘訓), 화가(和歌)로 나누어 『일본서기』의 성립 과정과 본문 내용, 자구의 해석, 강독법, 화가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책에서는 여러 종류의 「일본기사기(日本紀私記)」뿐만 아니라 『풍토기(風土記)』, 『상궁기(上宮記)』, 『안두지덕일기(安斗智德日記)』, 『조련담해일기(調連淡海日記)』, 『고어습유(古語拾遺)』, 『천서(天書)』,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등의 많은 고서와 한적 등을 참조하여『일본서기』의 내용을 고증하고 있다. 새로운 설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전까지의 설을 잘 정리하여 『일본서기』의 훈고학적 연구를 집대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국(戰國)시대에 없어져 버린 많은 고서의 일문(逸文)을 포함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크다. 그 후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석일본기』를 필사하면서 주석을 계승하였다. 또한 겸문은 신(神)으로서 황통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중세의 신도(神道)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겸창시대 중기에 본지수적설과 반대로 신(神)이 임시로 불(佛)이 되었다고 하는 역본지수적설(逆本地垂迹說)이 등장하였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외궁의 신관들이 이세신궁의 연혁을 설명하고, 천지개벽 이래의 신들의 제사에 대해언급한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 1295년경 성립)를 썼다. 1320년경에는 도회가행(度會家行)이 이세신도(伊勢神道)의 교설을 집대성한 『유취신기본원(類聚神祇本源)』을 저술하였다. 1332년에는 자편(慈遍)이 『구사본기현의(舊事本紀玄義)』를 저술하였다.
겸창막부가 멸망한 후 실정(室町)막부 시대의 전기에 해당하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신도가(神道家)로 추정되는 기부정통(忌部正通, 생몰년 미상)이『신대권구결(神代卷口訣)』(5권)을 썼다. 기부씨(忌部氏)는 중신(中臣)씨와 함께 일본조정의 제사를 담당하던 집안으로, 기부정통(忌部正通)은 『신대권구결』의자서(自序)에서 정치(貞治) 6년(1367)에 이 책을 썼다고 적고 있다. 이 책에서는유교와 불교를 이국(異國)의 것으로 배척하면서도, 송학(宋學)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여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 리(理)를 근본으로 한 신도설(神道說)을 제창하였다. 이를 기부신도(忌部神道)라고 한다. 그는 고천원(高天原)에 사는 천어중주존(天御中主尊)은 명리(明理)의 본원, 고황산령존(高皇産靈尊)은 만물화생(萬物化生)의 신, 신황산령존(神皇産靈尊)은 영(靈)이 내려와 생물의 혼(魂)이 되는 신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들 세 신은 원래는 하나로 국상립존(國常立尊)과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신도를 일본의 정로(正路)라고 주장하는 기부신도설(忌部神道說)은 강호(江戶)시대에 산록소행(山鹿素行), 석출대도(石出帶刀) 등의 유학자에 영향을 끼쳤다.
실정(室町)시대의 강정(康正) 연간(1455~1457)에는 일조겸량(一條兼良, 1402~1481)이 『일본서기찬소(日本書紀纂疏)』(6권 3책)를 썼다. 이 책도 『일본서기』신대권(神代卷)만을 대상으로 하여 일본의 고전적, 한적, 불전, 운서(韻書) 등을 사용하여 주석한 책이다. 일조겸량은 좌대신, 섭정, 태정대신, 관백(關白) 등을 역임하고 의례와 정치에 관해 20여 종의 저서를 쓴 실정시대 중기의 대표적 학자로, 『일본서기찬소』는 궁중에서 강석한 것을 바탕으로 한 책이었다. 『일본서기찬소』에서 신대(神代)는 유교와 불교의 교의를 가지고 해석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신유불(神儒佛)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에 입각하여 주석하였다. 상당히 자세한 주석을 달고 있어서 그 후 신대권 주석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그의 주석을 통해 중세 사상사를 엿볼 수 있지만, 역사 연구서로서는 가치가 높지 않다.
한편 「일본기(日本紀) 집안」인 복부가의 『일본서기』 연구도 이어졌다. 복부가는 경도(京都)의 길전신사(吉田神社)의 신주직(神主職)을 세습하면서 14세기 후반에 길전(吉田)씨를 칭하게 되었다. 길전신사의 신주이며 신기권대부(神祇權大副)를 역임한 길전겸구(吉田兼俱, 1435~1511)는 응인(應仁)의 난이 끝난 1477년경부터 『일본서기』를 강술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강의 내용을 오산(五山)의 선승 경서주린(景徐周麟)이 필록한 것이 『일본서기신대권문서(日本書紀神代卷聞書)』[1책(冊), 천리도서관(天理圖書館) 소장]다. 그 후 1477년과 1478년에 임생관무아구(壬生官務雅久) 등의 지식인에게 강술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 『일본서기도원초(日本書紀桃源抄)』[경도대국어연구실(京都大國語硏究室)소장]이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일본서기』 신대권을 읽지 못한다고 탄식하면서 승려에게 신도(神道)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길전겸구는 길전신도(吉田神道)를 확립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길전겸구는 종래의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 및 불교와 습합한 양부신도(兩部神道)를 비판하면서, 복부씨만이 전해온 유일한 지고(至高)의 신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도는 『선대구사본기』, 『고사기』, 『일본서기』와 복부씨에게만 비밀스럽게 전해진 세 종류의 경전에 의거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신도를 유일신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비전인 세 경전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주장은 유교, 진언밀교, 노장, 도교,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설을 합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의 신사에 면허장을 발부하여 전국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길전겸구의 아들로 청원가(淸原家)를 이은 유학자 청원선현(淸原宣賢,1475~1550)은 『일본서기찬소』와 많은 책을 참고하여 『일본서기신대권초(日本書紀神代卷抄)』와 『일본서기초(日本書紀抄)』(1526~1527)[두 책 모두 천리도서관(天理圖書館) 소장]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기초로 청원가(淸原家)와 길전(吉田) 가(家) 사람들은 신도를 전수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무장과 부유한 상인층과 예술가들에게 일본서기를 강술하여, 길전파(吉田派)라고 하는 학파를 형성하였다. 1599년 청원국현(淸原國賢)은 후양성(後陽成)천황의 명령을 받아 「경장칙판(慶長勅版)」으로 불리는 『일본서기신대권(日本書紀神代卷)』을 간행하였다.
이상 실정시대의 『일본서기』 연구를 살펴보면 『일본서기찬소』를 비롯해 신대기의 주석서가 많이 출현했으나, 대부분은 신도가(神道家)들이 자신들의 신도 교의를 설명하기 위한 공리공론으로 『일본서기』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별로 없다.
3. 근세의 『일본서기』 연구
강호(江戶)시대에는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관영(寬永)년간(1624~644)에 고활자판에 훈점을 첨가한 『일본서기』 30권[관영판본(寬永版本)]이, 1644년에는『고사기』[3권, 관영판본(寬永版本)]가 간행되었다.
실정(室町)시대에 저술된 책들도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1640년에는 청원선현(淸原宣賢)이 저술한 『일본기신대초(日本紀神代抄)』가 간행되었다.
강호시대에는 유학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하면서 일본 고전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촉진되었다. 특히 문헌학적 연구와 실증적 연구가 발발하면서 『일본서기』에 대해서도 중세에는 보이지 않던 객관적·실증적 연구가 등장하였다. 고대의 강서 때보다 훨씬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연구가 이루어져 지금까지도 『일본서기』 주석서로서 학문적으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석서『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과 『서기집해(書紀集解)』가 등장하였다.
유가신도가(儒家神道家)인 곡천사청(谷川士淸, 1709~1776)이 쓴 『일본서기통증(日本書紀通證)』은 보력(寶曆) 원년(1751)에 완성되었으나, 보력 12년(1762)에야 35권 23책으로 간행되었다. 곡천사청은 의사, 박물학자이며, 일본어학자로서 일본 최초의 아이우에오순의 일본어사전으로 2만 1천 개의 어휘가 수록된 『화훈(和訓)간[간간목(干干木)]』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는 중세에 주로 신대권(神代卷) 만을 중심으로 신도적인 교양의 면에서 연구해온 것을 타파하고 학문적 입장에서 『일본서기』 전권(全卷)을 대상으로 주석하여, 『일본서기』 전체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의 신대기 주석에서는 여전히 중세의 신도사상이나 수가신도(垂加神道)의 영향이 많이 보이지만, 인대기(人代紀)에 대해서는 일본의 종래의 설을 정리하고 특히 자구의 음과 뜻을 일본어로 명확히 고증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중국의 유교 관련 서적과 불경을 널리 섭렵하여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그는 『일본서기』를 해석하여 일본은 천황이 지배해온 나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국학(國學)의 입장에 가깝다.
한편 미장번(尾張藩)의 무사이며 국학자였던 하촌수근(河村秀根, 1723~1792)은 형 수영(秀潁), 아들 은근(殷根)·익근(益根)과 함께 『서기집해(書紀集解)』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하촌수근이 살아있던 천명(天明) 5년(1785)에 완성한 것을 익근이 약 20년간에 걸쳐 30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는 『일본서기』 서술에 이용된 많은 중국의 고전과 불전을 출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제시된 출전이 원전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예문유취(藝文類聚)』와 같은 유서(類書)에서 재인용한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일본서기』전권(全卷)의 문장의 출전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출전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총론에는 저자의 『일본서기』에 대한 견해가 보이는데, 하촌수근은 고훈(古訓)을 적은 분주(分註)는 후세에 첨가한 것이라고 보고 『일본서기』 본문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서기(書紀)』가 원래의 이름이라고 보아 자신의 주석서도 『서기집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국학자 영목중윤(鈴木重胤, 1812~1863)은 본거선장(本居宣長)의 『고사기전(古事記傳)』을 모방하여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을 완성하고자 하였으나1863년에 암살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신대기의 천손강림의 일서제일(一書第一)까지를 대상으로 한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1863)만을 남겼다. 강호시대의 대표적인 『일본서기』 주석서는 『일본서기통증』과 『서기집해』로 현재까지도 『일본서기』 주석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세에도 『일본서기』 연구는 주로 신대권(神代卷)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일본 근세에는 실증적으로 학문하려는 경향이 발달하고 천황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황실의 기원을 말해 주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설화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연구가 등장하였다.
유학자 신정백석(新井白石, 1657~1725)은 향보(享保) 원년(1716)에 『고사통(古史通)』을 저술하여 신대(神代)부터 신무(神武)천황까지의 전승을 고찰하였다. 이 책에는 권두에 「독법(讀法)」과 「범례」를 두어 고사 연구 방법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신(神)은 곧 인간’이라고 보고,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고사기』, 『일본서기』 등을 참고하여 고사(古史)의 전승을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해석하였다. 그는 신(神)의 일로서 비밀스러운 일로 만든 것은 천통(天統)을 높이고자 한 것이지만, 백성을 바보로 만들고 스스로를 존대하게 하는 것은 진(秦)이 2대 만에 망했듯이 멸망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국학자이며 신도가였던 길견행화(吉見幸和, 1673~1761)도 보력(寶曆) 2년(1752)에 『대문필기(對問筆記)』와 보력 10년(1760)에 『신대상강(神代尙綱)』을 저술하여 신대의 신기한 이야기를 인사(人事)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대판(大坂)의 정인(町人)학자였던 산편반도(山片蟠桃, 1748~1821)는 향화(享和) 2년(1802)에 『夢の代』를 저술하여, 『일본서기』, 『고사기』의 신대의 설화와 신무천황부터 중애천황까지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후세에 만들어 넣은 이야기라고 보았다. 상전추성(上田秋成, 1734~1809)도 문화(文化) 5년(1808)에『담대소심록(膽大小心錄)』을 저술하여 신대의 설화를 후세에 만든 이야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귤수부(橘守部, 1781~1849)는 천보(天保) 13년(1842)에 신대기부터 신무기(神武紀)까지의 주석서인 『능위도별(稜威道別)』을 썼다. 그는 권1·2의 총론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데, 신대의 설화 속에 동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합리적인 연구는 『일본서기』의 기년의 불합리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서기』의 기년에 대해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유학자 신정백석이다. 그는 『고사통혹문(古史通或問)』(1716)에서 추고(推古) 10년(602) 백제승려 관륵이 역본을 가져온 이후 일본에서 역(曆)이 사용되면서 그 이전의 기년을 모두 역산하였으므로, 일본무존(日本武尊)이 죽은 지 30년 후에 아들 중애천황이 태어나는 등 『일본서기』의 기년에 착오가 많다고 하였다.
한편 국학자 등정간(藤貞幹, 1732~1797)은 『충구발(衝口發)』(1781)에서 『일본기』를 읽으면 일본의 문물은 마한과 진한에서 시작되었고 변한의 것도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신무천황원년 신유년(기원전 660)에서 600년을 늦추어야만 연기(年紀)가 맞는다고 주장하였다. 본거선장(本居宣長)은 등정간(藤貞幹)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반발하였으나, 자신은 『고사기전(古事記傳)』(1798)에서 『일본서기』의 기년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여러 번 밝혔다. 그는 특히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비교하여 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이2주갑(120년) 소급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군서유종(郡書類從)」의 편찬에도 참가한 국학자 석원정명(石原正明, 1760~1821)은 『연년수필(年年隨筆)』에서 신무기원은 신유혁명설에 의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국학자 반신우(伴信友, 1775~1846)는 「일본기년역고(日本紀年曆考)」를 저술하여 신무천황 즉위년은 신유혁명설에 의해 제명(齊明) 7년(661)신유년에서 1부(1320) 소급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4. 근대의 『일본서기』 주석
강호(江戶)막부가 멸망하고 새로 명치(明治)정부가 들어선 이후 명치 초기에는 강호시대 후기에 등장하였던 『일본서기』 기년(紀年)에 관한 연구도 이어졌다. 성야긍(星野恆), 관정우(菅政友), 길전동오(吉田東伍), 나가통세(那珂通世) 등의 연구로 『일본서기』의 신무천황원년은 신유혁명설에 의해 조작한 것이며, 『일본서기』의 기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나가통세는『상고년대고(上古年代考)』(1878)에서 『일본서기』의 건국기년은 추고 9년(601)에서 1부 1260년을 소급하여 설정하고 안강기(安康紀) 이전의 기년을 연장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삼국사기』 등의 한국사서와 대조하여 신공기(神功紀)와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이 2주갑 소급되었다고 보고 이를 수정한 결과 『삼국사기』의 왜병침입기사와 신공기의 ‘신라정토(新羅征討)’ 이야기가 서로 부합되는 것으로 보았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면서 근대천황제가 확립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에서는 주권자로서 천황의 신성한 지위를 강조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천황의 신성한 지위를 문헌적으로 증명하는 정치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는 『일본서기』를 학문적으로 연구할 자유는 보장되지 못하였다.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된 후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일본서기』의 주석서로『표주일본기(標注日本紀, 1891)』와 『일본서기통석(日本書紀通釋)』이 발간되었다.『표주일본기』는 국학자로서 이세신궁 황학관(皇學館)을 창설기도 한 부전년치(敷田年治, 1817~1902)가 그 전의 여러 주석서를 정리하여 펴낸 책이다.
『일본서기통석』은 반전무향(飯田武鄕, 1827~1900)이 저술한 것으로, 70권 5책(1892), 색인 1책(1926)의 방대한 주석서다.
반전무향은 국학자(國學者)로 강호시대 말기에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에도 참가하였고, 명치시대에는 태정관(太政官) 수사관(修史館)과 동경대학(東京大學) 교수, 경응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48년에 걸친 연구 작업 끝에 1899년에 완성한 이 책의 권1은 총론으로 찬사(撰史), 제호(題號), 이본(異本), 일서(一書), 독법(讀法), 윤식문화지론(潤飾文華之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일본기(日本紀)』가 원래의 명칭이며, 홍인(弘仁) 경에 『일본서기』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 주석서에서 반전무향은 본거선장(本居宣長)의 『고사기전(古事記傳)』과 『신대기(神代紀)계[상투]화산음(華山蔭)』, 곡천사청(谷川士淸)의 『일본서기통증』, 하촌수근의 『서기집해』, 평전독윤(平田篤胤)과 반신우(伴信友), 영목중윤(鈴木重胤)의 『일본서기전(日本書紀傳)』 등을 인용하고, 때로는 ‘어떤 사람’이라고 하면서 부전년치(敷田年治)의 『표주일본기』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통석』에 반전무향의 독자적인 설은 거의 없어서 그가 처음부터 강호시대의 여러 주석서를 집대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독창성은 없지만 『일본서기』 주석을 집대성한 최초의 활자본이었기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다.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번역한 책도 등장하였다. 좌백유의(佐伯有義)는 『일본서기』를 일본어로 훈독한 『육국사(六國史) 일본서기(日本書紀)』[조일신문사(朝日新聞社), 1928·1929]를 저술하였다. 좌백유의는 다시 관문(寬文) 9년판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제본(諸本)을 비교하여 본문을 정하고 글자 옆에 훈(訓)을 적어넣고 두주(頭注)를 붙여 『증보육국사(增補六國史) 일본서기(日本書紀)』[상(上), 하(下), 조일신문사(朝日新聞社), 1940)]를 저술하였다.
무전우길(武田祐吉)은 좌백유의(佐伯有義)의 『육국사 일본서기』 훈독문을 참고하여 작은 제목과 황기년(皇紀年)을 넣은 『국문육국사(國文六國史) 일본서기』[상(上), 하(下), 대강산서점(大岡山書店), 1932·1937)]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본문은 북야본(北野本)을 저본으로 하였으나 결권(缺卷)은 창고관본(彰考館本), 전전가본(前田家本)을 저본으로 하여 다른 고사본들을 비교하여 교정하고 두주에교이와 어구 해석을 간단히 서술하였다.
『일본서기』에 수록된 가요의 주석서로는 상기정삼(相磯貞三)이 『기기가요신해(記紀歌謠新解)』(1939)를 저술하였다.
『일본서기』의 고사본과 고판본을 모으고 소개하는 일도 이루어져, 흑판승미(黑板勝美, 1874~1946) 등은 『일본서기고본집영(日本書紀古本集影)』(1920), 『비적대관일본서기(秘籍大觀日本書紀)』(1927), 『북야신사본(北野神社本) 일본서기』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연구자들은 『일본서기』의 고사본을 영인본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일본제국헌법의 제약 때문에 일본 근대의 연구자들은 『일본서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호시대까지 신대(神代)에 집중되었던 『일본서기』 연구 경향이 바뀌어, 역사 시대에 대한 연구가 추진되었다.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1873~1961)은 『神代史の新しい硏究』(1913),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1919), 『神代史の硏究』(1924), 『上代日本の社會及び思想』(1933)을 저술하여,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6세기 전후의 대화조정(大和朝廷) 관인이 황실의 일본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상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이들 사서의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는 『일본서기』는 한적(漢籍)이나 불교경전(佛敎經典)의 문장을 빌려 윤색한 것이 많아 천무기(天武紀)와 지통기(持統紀)를 제외하면 서술 내용을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일본제국헌법 체제하에서 이러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학문적 연구는 용인되지 않았다. 1940년 그의 저서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神代史の硏究』, 『일본상대사연구(日本上代史硏究)』는 1940년에 발매금지 행정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신무(神武)천황부터 중애(仲哀)천황까지의 역대천황의 존재에 대해 그가 의혹을 품은 것에 대해 동경지방재판소(東京地方裁判所)는 유죄로 판결하여 금고(禁錮) 3개월과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결국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퇴직하게 되었다.
일본 근대는 일본 국민의 역사를 새로 만들어 교육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1903년에는 제1기 국정 역사 교과서로 『소학일본역사(小學日本歷史)』가 등장하여 일본의 역사를 『고사기』, 『일본서기』의 신대(神代)에 보이는 황조(皇祖) 천조대신(天照大神)부터 서술하면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神勅)과 3종(種)의 신기(神器)를 강조하여 일본의 건국신화를 만들었다. 이후 1945년까지 천황통치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황국사관에 의한 역사 교육이 이어졌다.
5.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서기』 연구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고 연합국의 점령정책이 수행되면서 대일본제국헌법도 그 효력을 잃었다. 1946년에 일본은 새로운 헌법을 만들었다. 일본의 전후 체제는 전전의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전후 일본사학계의 명제는 전전의 황국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일본서기』 연구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전후의 일본 고대사학은 진전좌우길의 『고사기』, 『일본서기』 비판을 계승하는 일에서 출발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 비판이 방법론적으로 요구되었고, 고고학과 중국의 문헌, 한국의 금석문 등이 중시되었다.
1950년대에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활발해졌다. 특히 씨족계보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일본서기』의 편찬 과정에서 일본국가의 논리를 명확히하고자 하는 연구가 축적되었다. 이는 1960년대에도 이어졌다. 1960년 발족한 「일본서기연구회」는 『일본서기』와 관련한 논문을 모은 논문집 『일본서기연구(日本書紀硏究)』[삼품창영(三品彰英) 편(編), 제1책(冊), 각서방(塙書房), 1964]를 간행한 후 2013년 1월까지 모두 28책을 간행하였다.
전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엄밀한 교정을 통해 본문을 확정하여 훈독하고 상세한 주석을 한 주석서가 1960년대에 간행되었다. 판본태랑(坂本太郞), 가영삼랑(家永三郞), 정상광정(井上光貞), 대야진(大野晋)이 교주(校注)한 『일본고전문학대계(日本古典文學大系)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암파서점(岩波書店), 1965, 1967]가 그것이다. 이 책은 본문(本文), 훈독문(訓讀文), 두주(頭注), 보주(補注), 교이(校異)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문은 신대기(神代紀, 권1~권2)는 복부겸방본(卜部兼方本), 인대기(人代紀, 권3~권30)는 겸우본(兼右本)을 저본으로하여 여러 사본으로 교정하였다. 고대사를 중심으로 관련 학문을 종합한 두주와 보주는 『일본서기』 연구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본서기』 주해서이다. 이후 『일본서기』를 전거로 하는 연구 논문은 질과 양 모두 증가하였다.
국학원대학 일본문화연구소에서는 『일본서기』 신대권의 교본을 『교본일본서기(校本日本書紀)』(1-4)[각천서점(角川書店), 1973·1975·1989·1995]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관문(寬文) 9년판을 저본으로 하여 약 30종의 『일본서기』의 고사본(古寫本)을 교합(校合)하여 본문, 훈의 이동(異同)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교본(校本)이다.
1980년대에는 정상광정(井上光貞), 천부무윤(川副武胤), 좌백유청(佐伯有淸)등이 현대일본어로 번역하여 주석한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1987]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관문(寬文) 9년판본을 저본으로하여 여러 고사본을 교합한 교이(校異)를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일본어로 번역하고 소제목을 달아 읽기 쉽게 하였다. 이 책에서 원문과 교이(校異)를 제외하고 현대어역과 주 등을 새로 편집하여 문고본 『일본서기(日本書紀)』 Ⅰ, Ⅱ, Ⅲ[중앙공론신사(中央公論新社), 2003·2004]으로 간행하였다.
우치곡맹(宇治谷孟)이 번역한 『전현대어역(全現代語譯) 일본서기(日本書紀)』 상(上)·하(下)[강담사학술문고(講談社學術文庫), 1988]도 등장하여 『일본서기』를 쉬운 일본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도헌지(小嶋憲之), 직목효차랑(直木孝次郞), 서궁일민(西宮一民), 장중진(藏中進), 모리정수(毛利正守)가 역주(譯注)한 일본고전문학전집(日本古典文學全集) 『일본서기』(전3책)[소학관(小學館), 1994~1998]도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