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구례까지 내려오느라 수고했으니 첫날은 설렁설렁 근방이나 구경해야겠습니다. 수년 전만 해도 여행지로 오가는 수고와 비용이 아까워서 근방과 원방을 넘나들며 샅샅이 보고, 듣고, 파헤쳤었는데 이제는 느린 게 좋습니다. 우연히 눈에 띈 찻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마주치는 주민들에게 괜한 농도 치고, 주민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소소한 물건이라도 하나 더 거래하는 느린여행 말입니다.
구례 어드메쯤
:운전을 하느라 구례를 조망한 사진은 못찍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례로 빠지자마자 마주한 풍경에 침침했던 눈이 환해졌습니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다 저녁 무렵에나 갠다는데 그 덕에 채도 높은 수채화가 그려졌습니다. 수컷들 쌍콧피 쏟는데 즉효라는 옆트임치마를 두른 냥 운무가 낮게 드리운 지리산과 구례읍의 고혹적인 풍광에 설렙니다.
사성암 가는 길
걸어가든지 셔틀버스로만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이지선다나 사지선다 같은 객관식이 아닙니다.
서둘러 점심식사를 하고 지리산과 섬진강, 구례읍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사성암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새 운무가 짙어져 잿빛 세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기대했던 조망은 커녕 구름인지 부슬비인지 온몸을 적시는 습기로 인해 코앞의 사성암 마저 흐릿합니다.
사성암(유리광전)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 544년(성왕 22) 조사 연기(緣起)가 창건하여 오산사(鼇山寺)라고 했었는데 암자에서 원효, 의상, 도선,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수도를 했다 하여 사성암이라 부른답니다.
사성암(유리광전)
장혁이 출연했던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였답니다.
마애여래입상/사성암(유리광전)
유리벽으로 보호 중이라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귀목나무
도선굴
비대한 사람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나도 통과...
오산(530.8m) 정상석
오산 전망대
절벽 위에 위태롭게 새워진 유리광전을 비롯해 마애여래입상, 800살 먹었다는 귀목나무, 소원바위, 도선굴 등 사성암 관람에 이어 오산(鰲山 자라산) 정상(530.8m)까지 올랐습니다. 비록 구례읍을, 서시천을, 섬진강을, 지리산을 조망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오늘 못 봤으면 다음에 보면 되는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그 다음에, 그 그 다음에 보면 됩니다. 어쩌면 이미 내 가슴에 각인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돌담/사성암
“저녁엔 뭘 먹을건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삼겹살! 검색해 보니깐 두마레랑 세자매가든이 맛나다든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는데 때 맞춰 맛난 음식을 찾아 먹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아내의 삼겹살타령이 구성지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요. 체크인을 위해 잠시 들렸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또 다른 삼겹살집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 집은 생고기를 써요.’란 쥔장의 한 마디가 귀에 꽂혔습니다.
삼겹살 3인분
3인분부터 주문 가능하다기에 둘이지만 어쩔 수 없이 3인분 주문. 고로 한 줄이 1인분.
자리에 앉자마자 눈에 띈 ‘구이류는 3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몹시 거슬리지만 어쩌겠습니까. 삼겹살을 꼭 먹어야겠단 아내의 눈빛이 저리도 초롱한데 말입니다. 고기의 때깔은 좋아 보이는데 삼겹살과 함께 나온 냉동새우, 냉동오징어, 냉동문어 등 구이용 냉동해산물 3종이 괜한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이 집도 점심 때 들렸었던 다슬기집 마냥 음식의 담음새가 성의없어 보이긴 매일반입니다. 기왕이면 먹음직스럽게 담아줬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겠습니다.
삼겹살쌈
단 한 점만 먹고는 아내는 조용히 젓가락을 거뒀습니다. 삼겹살에서 미약하나마 돼지 특유의 꾸릿내가 풍겼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육식을 좋아하는데 비해 유난히 육향에 민감하니 어쩌겠습니까? 주문했던 3인분 모두 나 혼자 해치울 수밖에요.
젠피 파김치(하)와 젓갈을 듬뿍 넣은 겉절이(상)
결국 삼겹살 1인분쯤과 냉동해산물 3종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이 집에서 나름 성과를 거뒀습니다. 향토색이 짙게 배인 반찬 두 개를 맛봤으니 말입니다. 젓갈(주로 액젓)을 왕창 쏟아 부었는지 숫제 황석어젓을 먹는 냥 헷갈릴 정도로 쿰쿰하면서도 간이 센 겉절이와 젠피(초피)를 넣어 담근 파김치가 그것입니다. 쿰쿰한 겉절이는 삼겹살쌈을 쌀 때 쌈장 대신 넣어 먹으니 황석어젓의 뺨을 후둘겨 칠 지경입니다. 여기에 젠피향이 폴랑이는 파김치마저 곁들이면 천하무적입니다. 양놈 겨드랑이를 핥는 것 마냥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는 성숙한 방목 양고기도 거침없이 마구 먹을 수 있겠습니다. (원래 잘먹습니다.)
지리산 봉성피자/구례
“숙소에서 피자랑 와인이랑 먹고 싶어.”
“... ...”
“배고프단 말이야.”
“그러자구.”
아마 구례에서의 피자집 방문은 출발 전부터 이미 예정 된 일이었을 겁니다. 혼자 여행을 떠날 태세였던 아내가 여행지에 대한 폭풍검색을 하던 중 피자집을 찾아낸 모양입니다. 모니터에 비친 모양새로 보아하니 내 취향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빵빵한 도우 위로 온갖 치장을 해놓은 것이 동네 배달피자집에서 흔해 접하던 그것이었습니다. 피자집이 자리잡은 위치를 보니 지리산온천단지와 여러 호텔들이 밀집한 지역이라 그럴 만도 했습니다. 임실치즈를 사용한다는데 그래도 다시 구례를 찾았을 땐 마르게리따핏짜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자를 먹는 운전자
나는 삼겹살집에서 잎새주 한 병을 마셨기에 그 후로 아내가 운전을 맡았습니다. 삼겹살을 눈앞에 두고도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던 아내는 무척 허기졌었나 봅니다. 숙소에서 와인과 함께 먹을 거라더니만 그 새를 못참고 운전 중임에도 한 조각 꺼내 허겁지겁 먹습니다. 그러게 세상사 뭐 있겠습니까? 등 따시고 배 부른 게 우선이지...
<갑판장>
& 덧붙이는 말씀 : #씻고#나왔더니#아내가#사라졌다#와인과#함께
첫댓글 오붓하게 둘이 다니시며 고장의 명소 여행기가 점점 재밌습니다,,,아직 저희 집은 무자비하게 먹는 여행이라 ㅠ.ㅠ
댁내 늘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애들부터 얼른 키우시라요.
구례가셨으면 추어탕을 한그릇 잡수고 오셨어야 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