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업 잇는 세계 장수기업] 403년 된 프랑스 보석회사
‘멜르리오 디 멜레’의 14대손 멜르리오 회장
마리 앙투아네트가 좌판서 산 팔찌로 유명…
“경영승계 계획 10년 전부터 세워야”
1837년 파리 방돔광장과 ‘뤼 드 라 페’ 거리 풍경. 1613년 창업한 멜르리오는 1815년 이곳에 매장을 열면서 사업이 번창했다. 멜르리오에 이어 다른 브랜드들이 들어오면서 이곳은 명품 보석의 거리가 됐다.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는 1613년 멜르리오 가족에게 파리에서 보석업 허용특혜를 줬다. 아래는 특권을 하사하는 왕의 칙서.
프랑스 파리 중심가의 방돔 광장에서 이어지는 거리 ‘뤼 드 라 페’는 보석의 거리다. 까르띠에와 피아제, 불가리, 티파니 등 세계적인 보석회사들이 모두 이곳에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대형 브랜드들 가운데 낯선 이름의 보석 매장이 하나 있다. 피아제 매장과 까르띠에 매장 사이에 자리한 ‘멜르리오 디 멜레’다.
멜르리오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올해로 창업 403년을 맞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기업 중 하나다. 창업한 지 200년이 넘은 가족기업의 모임인 ‘에노키앙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에노키앙은 300여 년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간 구약성서 창세기의 인물 ‘에녹’에서 따왔다. 프랑스·이탈리아·일본·독일 등 9개국의 기업 43곳이 가입해 있다.
멜르리오의 14대손인 올리비에 멜르리오 회장은 1981년 협회 창립 때부터 참여한 원년 멤버다. 가족기업의 가치와 경제·사회적 의미를 설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달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 에노키앙협회의 산증인인 제라르 리포비치 사무총장이 함께했다.
- 한국에는 ‘부자가 삼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다른 나라도 다르지 않다. 가족기업의 약 60~70%가 2대가 지나고 3대째에 문을 닫는다는 통계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가족기업들의 생존 노하우와 가치를 공유하고 가족기업이 더 많아지도록 돕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 가족기업의 가치는 어디에 있나.
“대부분의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80%다. 가장 많은 기업 유형이다. 가족기업의 가치가 다른 기업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돈 버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장수와 생존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단기로 승부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움직인다. 번 돈을 재투자하고 사람들을 위해 쓴다. 인간미(human value)가 있다.”(리포비치 사무총장)
멜르리오 14대손인 올리비에 멜르리오 회장.
- 구체적으로는.
“가족기업은 소속 국가와 도시, 지역 사회에 더 밀착돼 있다. 고용도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난다. 그곳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가족기업 가운데는 조용히 지역사회를 지원하는 곳이 많다. 자기 생존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아픔을 혹독하게 겪은 한 가족기업은 프랑스와 독일 간 우호를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했고, 수년간 막대한 후원금을 내놓아 지역 성당을 재건하는 기업도 있다. 에노키앙의 역사는 휴머니즘의 역사다.”
- 가족기업은 성장에 한계가 있지 않나.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늘 하는 논쟁이다. 좀 더 밀어붙이면서 성장을 꾀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장은 ‘위험’이라고 인식하는 구성원도 있다. 물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수익을 내며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 외부 투자를 유치하면 기업에 대한 지배를 잃을 수도 있다. 성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할 것인가는 늘 숙제다.”
멜르리오는 가족 구성원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1613년 창업 이후 줄곧 그렇게 유지해 왔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가 고향인 멜르리오 가족은 전쟁을 피해 1515년 파리로 이주했다. 굴뚝 청소, 행상 등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다가 마리 드 메디시스 왕비로부터 보석업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으며 가업을 갖게 됐다.
타고난 예술적 감각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보석 제품을 만들어내 프랑스 여왕과 귀족 여인들 눈에 들었다.
산책에서 돌아오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베르사유궁 앞에서 좌판을 펼쳐 놓고 있던 장밥티스트 멜르리오(1765~1850)로부터 팔찌를 산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스페인과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등 유럽 여러 왕실과 귀족 가문을 고객으로 두며 사업이 번창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명품 보석업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멜르리오는 독립된 가족기업으로 남았지만, 가족기업이던 다른 보석회사들은 대기업 그룹으로 넘어갔다. 투자 여력이 커진 대기업 소속 브랜드들은 세계 대도시 곳곳에 매장을 내며 덩치를 키웠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멜르리오는 일반 소비자를 위한 보석 제품도 만든다. 사진 위부터 나비 모양의 티아라, 독특한 타원형 ‘멜르리오 컷’ 다이아몬드 반지, 사파이어 반지, 꽃 두 송이 반지와 꽃 모양 브로치, 에메랄드·진주 장식의 브로치, 조약돌 모양 시계. 프랑스 오픈 테니스 대회 트로피도 멜르리오가 만든다.
- 큰 브랜드와 어떻게 경쟁하는가.
“다행인 건 보석업은 예술적인, 장인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이 분야는 덩치가 클수록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창조의 영역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탁월한 품질이 우선시된다. 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규모가 작더라도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다만 메시지가 단순하고 명확해야 한다. 우리의 메시지는 ‘400년 넘었지만 늘 혁신과 품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옆집 까르띠에와는 다른 리그다.”
- 어떻게 다른가.
“까르띠에만큼 우리도 글로벌하다. 규모는 까르띠에가 우리보다 1000배쯤 클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도 그들을 존중하니까. ‘코미테 콜베르’라는 럭셔리 기업들 모임이 있는데 멜르리오가 가장 규모가 작다. 하지만 모두들 우리를 존중해 준다. 가장 오래된 기업이면서 여전히 최상급 예술적 제품과 좋은 품질의 서비스를 하는 데 대한 존경이다.”
- 언젠가 까르띠에같이 커지는 걸 꿈꾸나.
“아니. 전혀. 기업 규모가 큰 것은 권력(power)이다. 나는 권력엔 관심이 없다.”
- 그럼 무엇에 관심 있나.
“질 좋은 제품이다. 그리고 내가 물려받은 가치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 에노키앙 회원 기업의 공통점이 있나.
“사업과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기업의 소유주가 아니라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전달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우리 소유가 아니다. 미래가 주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물려줘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만큼 사업에 대한 진정성이 크고, 진짜 열심히 일하더라. 늘 혁신과 신시장 개척을 고민한다. 조상 볼 낯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미래를 위해 자본을 축적한다.”(리포비치 사무총장)
- 200년 이상 되려면 숱한 위기를 겪었을 텐데.
“수백 년을 지나며 당연히 전쟁·화재·전염병 등 온갖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비축한 자금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가 지나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에도 다시 일어났다. 전쟁 중 공장 문을 닫았을 때도 직원 급여를 계속 준 회사도 있다. 2009년 금융위기 때 매출의 40~50%가 감소한 기업은 일부 직원을 해고하는 대신 전 직원의 동의하에 급여를 삭감했다. 훗날 시장이 회복하자 숙련된 직원이 모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인간미이자 기업문화다. 오랜 시간 상호 이해를 쌓아야 가능하다.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 가족 구성원 간 다툼이나 이견이 있으면.
“가족기업인 에르메스를 경영했던 장루이 뒤마 전 회장의 말을 실천한다. 에르메스는 사촌들이 많은 대가족이었는데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주주 배당 등이 점점 복잡해졌다. 뒤마는 ‘회사 경영에 쏟는 시간만큼 가족 관리에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 간 화합이 회사 경영의 절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족기업이 사라지는 건 내부의 문제 때문일 경우가 많다. 가족이 잘 유지되면 위기가 닥쳐도 집단적 지혜가 도출된다.”
- 성공하고 싶은 가족기업에 조언해 달라.
“성장하는 산업에 종사해야 하고, 이익을 내야 한다. 이익을 내지 않는 회사는 생존할 수 없다. 가족이 경영에 참여하는 일을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 승계 계획은 승계가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최고 권력에 있는 사람은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면 너무 늦다.”
- 승계 계획이 성공하려면.
“보통은 창업 후 2~3대에 문제가 생긴다. 이보다 더 오래되면 가족들이 자기만의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잘 간직하다가 후대로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다. 당연히 대표에 오르면 첫 번째 임무로 후계자를 준비하게 된다.”
[S BOX] 200년 넘은 장수기업 모임 ‘에노키앙’ 회원사 43곳…이탈리아 13곳, 일본 8곳
왼쪽부터 베레타 권총, 도라야 양갱, 월계관 사케, 루이 라투르 와인, 푸조 자동차.
200년 이상 된 장수 기업 모임인 ‘에노키앙협회’의 회원이 되는 길은 퍽 까다롭다. 창업한 지 최소 200년이 넘어야 하고, 창업자의 자손이 현재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또 창업자의 가족이 회사를 100% 소유하거나 최대주주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경영 실적이 우수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있다. 기업 실적 보고서는 물론 호적이나 족보 같은 가족관계 증명 서류 등을 모두 제출한 뒤 심사를 거쳐야 한다.
제라르 리포비치 에노키앙협회 사무총장은 “회원 가입 문의가 들어와서 구비 서류 리스트를 알려주면 다시는 전화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수”라고 귀띔했다. 협회 창립 35년이 지났지만 회원이 세계 9개국에 43개 기업에 불과한 이유다.
이탈리아 기업이 13개로 가장 많고, 프랑스 12개, 일본 8개, 독일 4개 등이다. 인터뷰를 하던 날 일본 기업 3개가 막 합류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회원사는 이탈리아 무라노에서 1295년 창업한 유리업체 바로비에르&토소다. 다음은 권총으로 유명한 베레타(이탈리아·1526년)가 꼽힌다.
전통적으로 오래된 산업인 주류와 식품, 섬유 등의 기업이 대다수다. 와인 제조업체로는 휘겔&피스(프랑스·1639년), 구에리에리 리자르디(이탈리아·1678년), 루이 라투르(프랑스·1797년)가 있다. 위스키·브랜디 등 리큐어 업체는 슈바르체(독일·1664년), 더카위퍼르 로얄 디스틸러스(네덜란드·1695년) 등이다.
17~18세기에 태동한 프라이빗뱅킹 전문은행 중에선 롬바르 오디에르(스위스·1796년), 픽텟(스위스·1805년) 등이 참여했다. 창업한 지 206년 된 자동차업체 푸조(프랑스·1810년)는 가장 ‘젊은’ 회원 가운데 하나다.
유럽 바깥에서는 일본 기업이 유일하다. 일본 이시카야현의 온천여관 호시는 718년 창업 이래 가족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전통과자 업체 도라야는 16세기부터, 아카후쿠는 1707년 사업을 시작했다. ‘월계관’으로 알려진 일본의 사케 업체 겟케이칸(1637년)도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