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 제처 놓고 철마산행 길을 잡았어요. 신안2차 아파트 진입로에 차들이
없는 것이 시에서 불법 주정차량을 싹 다 정리 한 모양입니다. 애써 닦아
놓은 길에 미친놈이 파킹을 했으니 딱지 떼려면 떼시라. 딸랑 민소매만 입고
가기 뭐해서 긴팔 면 티로 화이트 콘셉트를 잡았는데 더위가 입구부터 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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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4.19'입니다. '제주 4.3'사건부터 '여수 순천
항쟁'까지 훓어오면서 또렷히 알게된 한 가지는 역사란 단순한 팩트 체크가
아니라 팩트가 말하려는 '진실을 찾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란 인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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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수송초등학교 학생 강 명희, 《나는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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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
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엄밀히 따지면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제가 아는 4.19의 서막
입니다. 이승만의 하야와 더불어 4.19는 주도세력인 학생들에 의해 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지식인들도 그에 동조했습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4.19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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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했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를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합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4.19가 혁명이었음은 국민의 상식으로 정착되어 갑니다.
그렇지만 그 혁명의 뜻이 무엇인지는 논의되거나 합의된 바가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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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한국의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
이었지요. 조선왕조 시대까지 일반 백성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누리지 못
했고 소수의 양반신분만이 조정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받았을 뿐입니다.
일제하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한국인들은 세금을 냈지만 정치적 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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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받았어요. 한국인들이 정치적 주권자로 성립하는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의 성립에 의해서였는데 그 국민이 봉기하여 정부를 타도한 것이 4.19입니다.
이런 일은 한국사에서 전무후무합니다. 이후 4.19는 보통의 한국인들에게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승화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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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
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 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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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 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
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해요. 이는 곧 대한민국 헌법의 4차 개정의 빌미가 되었고 ‘법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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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급‘의 원칙을 무시한 이 개정은 그 이후로 줄곧 "소급입법개헌" 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시국이 안정되고 국가가 정상으로
발전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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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 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5.16 군사정변). 장면은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 보선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5.16 정변은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정부에 실망한 지식인들은 박 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자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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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성명을 냅니다. 실제로 4.19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서울대학생회는
4.19를 계승한 군사혁명으로 환영식을 하였으며 정통성까지 확보하여
날개를 단 호랑이가 되었다고 평해지는 제5대 대통령 선거와 제6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보듯이 군부의 슬로건에 동감하였다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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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 정희 집권기에도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의거로 많이 불렸지만)
의거 못 지 않는 혁명으로 많이 언급됩니다.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
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몇 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어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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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명칭의 학문적 논쟁은 단순한 극우파의
유사학문은 아닙니다. 일례로 프랑스 혁명만 하더라도 학계에서는 현대에
그 '혁명'이라는 명칭을 엄정한 시험대에 올리고 있으며, 전체주의 비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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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한나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혁명'으로 시작했으나 '반란'으로 끝나
버렸다고 평가하기까지 합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 프랑스 제1공화국
이 태어나는 그때에도 이미 공화국은 사산 됐다는 게 아렌트의 평가입니다.
혁명은 해방(liberty)이 아니라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활동이고,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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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freedom)가 얼마나 헌법에 잘 스며들고 성공적인 체제가 들어서는지가
중요하다는 게 그녀의 설명입니다. 때문에 아랜트는 미국 혁명을 프랑스 혁명
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정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4.19가 혁명
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은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와 크게 관련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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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만약 제2공화국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하는데 실패한 체제
라면 4.19는 의거, 혹은 미완의 혁명일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제2공화국이
성공적으로 자유를 헌법에 명시했는데 단지 5.16 반란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붕괴한 것이라면 4.19는 혁명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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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4.19는 정권을 뒤집은 사건이며, 한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어요.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또한 4.19 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첫 승리였고, 근현대사
에서 처음으로 직접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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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월 혁명은 '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합니다. 도올이 그의 신간에서 명시한 대로 조국의
우파 기독교는 독재 정권의 하수인이었다는 태생적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목에 백 퍼 동감합니다. 아, 우리 보수 우파 기독교는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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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산 중턱에서 살모사를 만났어요. 물론 깜짝 놀랐는데 사이즈가 있지
가오 상하면 안 될 것 같아 동물적인 본능으로 놈을 렌즈에 담았어요. 이놈아!
내가 드래곤 용띠라고. 숨은 그림 찾기가 필요해보입니다. 살모사를 찾은 분
들은 스포츠복권을 사시라.
2023.4.20.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