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따라온 한볕이는 갈 때부터 기차로 가자더니 올 때는 기어이 따로 떨어진다. 빗방울이 몇 방울씩 떨어지고 풀은 젖었어도 바람도 없고 그리 춥지 않아 산행은 큰 탈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젯밤 제사지내며 마신 술로 몸이 무겁다. 풋고추에 떡에 전에 거기에 고구마 한 망까지 차에 싣고 나선다. 축동에 큰 형수님을 모셔다 드린 다음, 장흥 장동 감나무재에 차를 세우고 제암산을 오르기로 작정하다가 아무래도 지난 수요일에 다친 왼쪽 발목이 마음에 걸린다. 오래 아프라고 작정한 것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도 없고 걱정해주는 사람들한테도 도리가 아니다.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는 중에 여수반도를 다시 차로 한바퀴 돌까 생각해 본다. 거기 가서 무얼 보지? 산과 바다? 사람? 풍물? 역사와 문화. 아, 나 자신!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는 거지? 사람 생각을 하다 제일병원에 계신 창욱 아버지와 누님을 생각하고 고흥으로 가기로 정하고 차를 조성에서 벌교로 운전한다.
4차선 길을 달려 고흥을 지나쳐 녹동 순천횟집 앞 공간에 차를 세우고 금산 나루터로 가니 10시 30분 배가 적당하겠다. 1,000원을 주고 표를 사는데 관리는 안한다. 적대봉은 하얀 구름띠를 허리에 두르고 양반처럼 끄덕않고 앉아있다. 소록도로 또 거기에서 금산으로 다리 놓는 공사가 한창이다. 연륙되면 또 어떻게 달라질까? 좋아지겠지. 소록도는 이제 환자도 없어져가서인지 아에 도로를 터널로 만든다고 배 위에서 만난 남기모 전교장은 말한다.
25분이나 배를 탔을까, 금진 선창에 내리니 대흥여객 버스가 한사람을 태우고 기다리고 있다. 종점까지 얼마냐니 800원이랜다. 왜 이리 싼가하고 앉은데 종점까지 갈 동안 한 사람도 타지 않는다. 우습게도 그 종점이란 데가 4킬로 남짓인 소재지인 대흥이었다. 내리니 막막하다. 적대봉 오를 자신도 없고, 오천에서 완도쪽 섬과 바다를 볼까? 김경호의 금장 별장터나 볼까하면서 동승한 이에게 금장길을 물으니 송광암 가는 길로 가다 보면 좋은 길 나온다고 한다.
언젠가 가 본 적이 있는 송광암 길을 오른다. 일선이라는 법호를 가진 현우는 어디로 갔을까? 그가 출가한 것은 운명일까 그의 의지로 선택한 것일까?
마늘과 양파가 하얀 비닐 사이로 올라와 온통 푸르른 밭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오른다. 길은 닳아서 작은 돌들이 발바닥을 간질이고 오르막을 가자 발목 접힌 부분에 통증이 전해온다. 빗방울 몇 개가 눌러 쓴 모자 위로 소리를 내고 밭의 마늘밭에서도 소리를 보내온다. 쉬지 않고 오르자 땀이 밴다. 11시 무렵부터 한시간 쯤 걸었을까 송광암 안내판과 난장이 금강역사가 버티고 선 입구에 도착한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게 된 송악의 덩굴을 보면서 절 입구에 닿으니 적대봉은 비구름에 쌓여 있고 저 멀리 소랑도 평일도 앞 바다가 훤하다.
나무 밑 평상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청운당과 송광암 현판이 걸린 건물을 본다. 법당과 생활 공간이 하나인가? 주련은 한글로 ‘청산은 나를 보고---’가 씌여있다. 위 건물로 오르는데 마삭줄이 열매를 보여준다. 그 작았던 하얀 꽃에서 이런 열매가 나올까 의심하며 泥牛禪院을 본다. 살림집처럼 생긴 건물엔 열쇠가 잠겨있고 옆에 딸린 텃밭은 칡넝쿨과 잡초가 우거져 있다. 이 집의 주인?은 깨달음을 얻었을까?
내려오는데 스님 한 분이 아래서 올라오기에 손을 모으고 인사를 드리니 과일이나 드시고 가라며 들어오랜다. 배와 사과와 귤을 담고 들어와 왼손으로 껍질을 깎는다. 사과가 맛있다. 12시 30분쯤 과일을 먹으며 스님의 말씀을 듣는다. 일선과 관일스님 이야기도 해 본다.
‘토굴 생활을 많이 했어요. 옛 토굴을 찾거나 또 새 토굴을 찾아 지내다 보면 어느 전생에 내가 이 곳에 살았던 것처럼 안온해 져요. 하루에 한끼만 먹고 지낸지도 꽤 되었고, 토굴을 직접 만들면서 건물과 사람사이의 교감 같은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바람과 물을 사람이 이길 수 없어요. 무조건 물만 좋다 찾지 마세요. 어떤 스님들 절집 공사하면서 공사업자들한테 많이 속아요. 감독하다가 그들의 협박과 회유를 받은 적도 많아요. 고흥의 능가사는 매우 큰 선원이었는데 백두산과 후지산의 흐름을 가로막는다하여 1917년 경 일인들이 불을 질렀대요. 부처님 모신 전각만해도 48개가 넘는 큰 규모였다는 사실들이 문헌에 남았는데 군의 관리가 가져가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가 봐요. 천관사나 보림사도 큰 사찰이었고요. 작은 절이나 암자는 다 그만큼의 기운에 맞게 자리잡았는데 요즘은 무조건 크게 한다고 깎아내려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절집은 비탈에 땅을 돋우며, 축대도 2미터가 넘으면 작은 나무를 심을 공간을 만들어 최대한 자연미를 살렸는데 업자들이 그런 것 고려않고, 스님들도 국가 지원 받으며 일하는지라 깊이 생각하지 않은가 봐요’
한 시간여 앉아있었을까 다리도 아프고 너무 오래 시간을 뺏는 것 같아 일어선다. 점심 공양을 사양하면서 신발을 신다가 법명을 여쭈니 ‘정보입니다. 바를 정에 넓을 보요’하신다. 넓을 보자는 얼른 모르겠다. 普일까 라고만 생각한다.
빗방울은 여전히 떨어진다. ‘적대봉아 다시오마’ 하고 내려오는데 1시 30분이 되간다. 매 30분에 녹동에서 매 정각에 금진에서 배가 나간다. 교회에 다녀온 충현이가 점심먹자지만 전화로 늦었음을 알리고 천천히 걷는다. 천관산과 금당섬의 암벽이 보인다. 남쪽 저 멀리로는 아마 망산(만덕산)일 것 같은 산이 보인다. 내 스무살의 사랑이 얽힌 산, 눈물이 나려한다. 갈 수 있을까? 아침과 저녁에 올랐던 저 산에.
내려오며는 눈이 더 열린다. 오르며 땀을 흘릴 때와는 다른 풍경을 보며 셔터를 눌러본다. 그들은 한결같은데 나의 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은 아닐까?
금산초등학교 뒤로 지나 고갯길을 넘는다. 2시가 넘어가자 배가 고프다. 발도 아프다. 산길보다 힘들다. 배낭에서 맥주를 꺼내 하나남은 감을 안주삼아 먹으며 걷는다. 금진마을 이르러 바닷가를 보며 사진도 찍으며 선창에 닿으니 배가 들어온다. 14시 45분. 관광이정표에 송광암은 6.2킬로미터다. 10킬로쯤 걸었나? 아픈 다리로 많이 걸었다. 오천이나 금장에 가서 선창까지 걸어오려던 계획은 틀어졌어도 그만큼 걸었으면 됐다. 기다리는 3시 40분쯤 충현이를 죽시에서 만나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었다. 3천5백원. 기어이 그가 계산한다. 보름 후쯤에 그의 셋째 출산예정이란다. 가족과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충현이 모습은 충분히 그려진다. 보기에 좋을 것이다.
고흥유자 한 상자를 실어준다.
첫댓글 장동 감나무재 내 어린 추억이 많이 숨쉬는 곳이라 지명만 듣고도 반가움에...... 감나무재에서 작은산 큰산을 지나 제암산까지의 코스가 그려집니다 늘 고운날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