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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팀 글 | 2015.08.15 23:01:40 올림 | 277 읽음
▲ 일송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등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고 '민족적 열등의식의 극복과 통일코리아'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동북아 역사대장정 6일차,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날입니다. 연길 새벽시장에 가기 위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3시 20분에 기상을 하고 4시에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시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 연길 새벽 시장으로 가는 길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의 상인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식 빵, 떡, 두유, 장국, 도시락, 신선한 과일에서부터 한국 음식인 김밥까지 다양한 음식이 있는 중국 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산 음식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인 청산리로 출발했습니다.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백운평 마을 옛터에서 스님으로부터 청산리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 백운평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합동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10여차례의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전투라 하며, 상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 유격대가 적은 병력과 무기로 일본군 사단 병력을 물리친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깜깜한 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유격대가 청산리 협곡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협곡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200명의 일본군이 사망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던 기마 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12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 뿐만 아니라 군사 배치도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이 군사 배치도를 이용해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본대를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포병 연대까지 갖춘 일본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홍범도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김좌진, 홍범도 두 부대가 협동하여 일본군 1000여명이 사살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사단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300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일본군 토벌대를 사실상 궤멸시켰다고 합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은 저절로 조상님들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항일 운동의 이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답사를 시작한 곳은 백운평 마을 옛터로 20여가구 정도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으나,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뛰어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사살하여 마을은 초토화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도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사건 발생일 이웃 마을에 갔다가 그 이튿날 돌아와서 보니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있고 모든 사람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당했던 고통이 그려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실제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직소택이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백운평에서 직소택으로 향하는 길에는 물을 건너야 했는데 물살이 강해서 철퍼덩 물에 주저 앉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서로를 지탱해 주며 모두가 안전하게 물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또 도중에는 끊어진 나무 다리도 나왔습니다. 이 때도 먼저 건넌 사람이 손을 당겨주며 전체가 무사히 끊어진 나무 다리를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길을 누비니 마치 독립군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직소택에 모인 청년들은 전투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며 잠시나마 묵념을 했습니다.
스님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민간인과 희생된 한국 독립군 뿐만 아니라 이국 땅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일본군 병사 모두가 군국주의 전쟁의 희생자라고 하셨습니다. 청년들은 희생된 모든 분께 묵념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차가운 계곡물, 좁은 협곡에서 변변한 군복도 없이 전투에 임했던 젊은 병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다음으로 대종교 3인묘로 향했습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이자 대종교를 이끌던 나철, 서일, 김교헌의 세 개 묘소는 대종교의 발상지인 청호리의 탁트인 언덕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준비해온 음식과 술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묵념을 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대종교 3인묘
나철은 국조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매국노를 암살하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활동했지만 결국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서에 자신의 유해를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했다는 설명에 대중은 숙연해졌습니다. 통일이 되지 않아 묘소를 한국에 안장시키지 못했다는 스님의 말씀에 빨리 통일이 되어 이 분들을 고국에 모셨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해보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화룡에서 냉면을 맛있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130여명의 청년들은 비암산의 일송정 언덕에 올라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주변 일대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 일송정
일송정에 오르니 탁트인 전망에 해란강과 용정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었습니다. 모두 일송정 정자에 모여 해금 반주에 맞춰 ‘일송정’,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일송정에 찾아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조상들을 생각했습니다.
▲ 해금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일송정’ 노래
이어서 ‘고향의 봄’을 다함께 부르니 고향을 떠나 만주 벌판에서 삶을 일구어 낸 우리 선조들의 고향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느껴지고 넓은 들판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용두레 우물을 구경하고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로 향했습니다. 용정중학교 옛 건물은 조선족 사회의 독립운동 역사, 윤동주 시인, 학교 연혁에 대한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용정중학교
전시관을 둘러보며 만주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과서에는 깊이 다루지 않는 독립운동 역사를 세세히 배우고,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진 시간이었습니다. 타국에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전시해 놓은 모습을 보니 조상에 대한 자긍심이 깊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시관에는 윤동주시인이 친필로 쓴 서시의 원고지도 전시해놓고 윤동주 시집도 판매 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학교 차원에서의 노력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답사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즉문즉설을 해주었습니다. 통일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면 친구는 통일보다 나 자신 내 가족의 안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는 분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도 인구의 극소수였다”고 하며 “분단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지금 세대에게는 통일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절실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한국이 직면한 문제를 말하며 통일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한국은 모방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왔는데 모방에는 한계가 있고 창조를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국내 저성장의 한계를 과거에는 식민지화 등 영토 확장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창조를 통해서만 저성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교육, 제도 등 사회의 변화도 함께 일구어 가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성장 국면을 맞은 한국에서 통일은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고, 사람들이 서서히 이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 통일의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니 청년들도 “아하!” 하며 공감했습니다.
여러 시간 버스로 달려 길림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한 후 이번 역사기행에서 스님의 마지막 저녁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강의에서 스님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천 및 과거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강대국들의 역학 변화에 따라 한국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등에 대해 스님은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과 미래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찾는데에 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좀 더 정확하고 알맞은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했다고 하죠. 명나라는 그 당시에 세계 최대 강국이였습니다. 그런 중국과 우리가 같이 살면서 그 문명을 받아들였는데 거기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는데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해서 막아주기도 했었죠. 명나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는데 국력을 많이 낭비했기 때문에 명나라 자국의 관리는 되었지만 변방의 관리는 소홀하게 되었고 그 소홀한 틈을 타서 청나라가 일어난 겁니다.
그 때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명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게 ‘야, 우리는 명나라를 침공할테니 너희는 길을 열어주라’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런데 조선은 자신이 부모처럼 생각하는 명나라를 치겠다는데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겠죠. 그래서 결국 조선이 공격의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명나라의 대리 전쟁을 해준 셈이 된 것이죠. 그래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였습니다. 조선이 패하게 되면 결국 명나라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조선을 도와준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명나라를 위해서 방패 막이가을 되어 준 것입니다.
이럴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그 시대로 돌아가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 조선 관리들의 의식구조,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감히 왜인 오랑캐가 부모 국인 명나라를 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그런 불충한 나라에게 우리는 길도 비켜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유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던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우리는 그 일에 관계가 없으니까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해라. 그러나 우리 영토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 자주성이 당시 우리들에겐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나라는 곧 우리 나라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쨌든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막아내었지만 국토는 엄청나게 황패화 되었죠. 조선, 명, 일본이 싸우는 틈에 만주 지역에 대한 관리가 비니까 이곳에서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서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청나라는 똑같이 일본처럼 우리에게 ‘명나라와 단교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으로 봤거든요. 그런 여진족이 ‘내가 형님할게. 니가 동생해라’ 하니까 엄청 기분 나빠 한 겁니다. 그래서 ‘No’ 했더니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완전히 굴복해서 신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뜰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을 못한 겁니다. 만주의 여진족이 일어나서 중원을 점령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청의 속국이 되었는데, 청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일본이 다시 일어나서 조선을 두고 청과 대립을 하게 되었죠. 그럴 때 다시 우리는 청이 지는 해이고 일본이 뜨는 해라는 것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이 기회를 활용해서 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독립함과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일본에게 먹힐 수 있으니 일본으로부터의 위험은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예상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청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만 생각했지 일본이 어떤 위협이 될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수구파들은 일본이 우리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청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청은 몰락하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죠.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을 때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고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해서 이기고 일본이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까지 지배하니까 일본이 마치 세계를 재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1940년대로 들어오면서 거의 다 친일로 바뀌어 버립니다.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본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여긴 겁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그 때 모두 자진 패간 했거든요. 기미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일본에 협력하게 됩니다. 조금만 참으면 독립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겠죠. 그런데 사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잖아요. 5년 앞을 못 본 겁니다.
지금 시대에서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 뜨는 해로 올라올 것이고, 미국은 지는 해로 가게 되겠죠. 그러나 소비에트처럼 중국이 뜨다가 가라앉고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지, 이번에는 확실히 중국이 뜨고 미국이 가라앉을지는 또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요. 아무튼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 지금입니다. 이런 시점에 잘만 하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판이 짜여지면 분단이 고착화되는데,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날 때는 잘만 하면 통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즉 미국의 단독 판에서 미국과 중국의 판으로 새롭게 짜여질 때 이것이 고정화되면 다시 몇십 년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세력 변화의 기회를 활용할 시기는 아주 짧습니다. 우리가 마음 먹는다고 언제든지 통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문제는 이런 좋은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주체 세력이 지금 없는 것입니다. 북한은 예전에는 통일의 주체 세력으로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자신들의 체제 방어에 급급하고, 남한은 역량은 되는데 과거 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습관이 남아서 아직도 북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체제 유지에 급급합니다. 즉 이제 우리의 책임은 남한을 어떻게 발전시키냐 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적인 이익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느냐 이렇게 책임의 범위가 넓어져야 하는데, 지금 민족 전체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을 안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기회는 왔지만 통일의 길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평화는 유지되었는데 이제는 평화마저도 깨지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북한에 친중 정부가 들어서서 우리가 미국에게 하듯이 북한이 안보도 중국에게 맡기고 핵우산도 쓰게 되면 첫째 통일은 물건너 가게 되고, 둘째 평화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중의 세력 충돌이 남북의 충돌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남북의 갈등은 옛날에 비해서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전에 평화재단을 세우고 이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까지 반통일로 가버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미래 이익을 지혜롭게 찾아낼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사실 분단된 한국에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안보와 성장은 중국 없이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미국 없이도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붙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판이 짜여지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국이 갖는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해서 미국과의 관계도 잘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속적 한미 관계가 아닌 한반도에서는 우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주적 한미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옛 친구도 잘 관리하고 새 친구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양다리를 잘 못 걸치면 낭패 당하기기 쉽죠.
그래서 남한이 지혜가 있다면, 우선 남북 관계를 초보적으로라도 풀어야 합니다. 너무 남북 관계를 많이 풀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흐트러 놓으니까 미국에게 뒷통수를 맞게 되요. 미국 입장에서는 남북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어야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의 군사 협력에 동의하겠죠. 이 흐름을 깨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장을 약간 낮추면 한일 간의 군사 협력을 할 필요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국민들이 동의를 안 하게 되어 미국이 무조건 밀어 붙이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적대시 하면 이것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어긋나니까 군사적인 관계만 빼고 다른 것은 오히려 과거사 문제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 됩니다. 한미 동맹만 갖고도 충분히 북한에 대응을 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인 도움까지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군사 협력은 중국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중국과의 우호 협력을 위해서도 한일 간 군사 협력은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역사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찾기 위해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스님은 강대국과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해 설명했는데, 강대국들의 세력 판이 이미 짜여 졌을 때는 변화를 꾀하기가 어려우니 기존의 판이 무너지고 새로운 판으로 고착되기 전에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목에서 청년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세가지 열등의식이 있다고 하면서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통일 한국을 만들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가슴 뛰는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민족적으로 세 가지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첫째, 상고사에 대해서 중국 문명의 아류라고 생각하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둘째, 근대사에 있어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셋째,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서양 문명을 벤치 마킹하고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은 심리적으로 병에 속합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심리가 덜 불안해지고 떳떳함이 생깁니다.
이 중에 서양으로부터 갖는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이것은 역사기행의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독립이 외세에 의해서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홀한 것은 아니였음을 알아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일 만큼은 우리 손으로 이뤄내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막아내었습니다. 중국의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전투력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세계 최강이였던 원나라와도 고려 시대 때 90년이 넘게 전쟁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쉽게 복속되지 않았습니다. 발해는 당나라가 한참 번영할 시기에 당나라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새로 만들어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습니다.
그런 고구려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전통을 가져왔느냐. 고구려의 뿌리는 부여였습니다. 또 유물과 유적으로는 배달 문명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연결해보니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은 부여를 계승하고 조선을 계승하고 배달 문명을 계승한 것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문명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문명이었음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중국 문명의 아류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인접했기 때문에 서로 교류 협력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를 보면서 민족의 뿌리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다시 신라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발해로 계승되었습니다. 발해 이후부터 우리 역사의 단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라는 또 조상 없는 역사로서 부강하게 등장했습니다. 이 연결 고리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연결되게 됩니다. 그 사이인 발해를 고려로 연결하고, 신라를 고구려로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고구려에서 고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혼란을 겪었지만 그러나 대를 이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사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남북 간이 멀어지면 북한이 멸망하고 중국으로 흡수되어도 남한에서는 ‘적이 없어져서 좋다’ 이렇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발해 시대의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사의 왜곡이 또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로 나갈 때 남북의 갈라진 두 역사를 모두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남한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하더라도 북한을 포용해서 그 역사를 같이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립운동사가 완성이 됩니다. 북한의 역사를 없애버리면 독립운동사가 아주 빈곤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 과제는 통일입니다. 통일은 우리 삶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통일로 가는 핵심 키는 남한 정부입니다. 만약 남한에 통일의 주체 세력이 형성되면 당연히 북한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토만 통합할 것이 아니라 민족사도 통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 한국은 다시 한일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한중일 삼국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창조성을 확보해서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고, 로마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는데, 왜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겠습니까. 반도 국가는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반도 국가였습니다.
노력하다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젊은이가 이런 꿈이라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꿈도 없이 돈만 벌어서 뭐 하려구요? 이런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삶이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의사라면 환자 치료도 열심히 하지만 돈이 벌리면 그 돈 갖고 북한의 의료 개선에 투자를 할 것이고, 역사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을 꿈꾸며 동북아 역사기행에 여러분들을 초청했는데 여러분들은 백두산 천지 보러 온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다이어트를 좀 하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 너무 비만적인 삶을 살아요. 삶을 다이어트해서 심플하게 만들면 시간이 좀 남게 됩니다. 돈도 좀 남게 됩니다. 그 시간과 돈을 통일이라는 우리들의 목표를 향해 좀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선거 때가 되면 손가락만 좀 저한테 빌려주세요. 손가락만 좀 잘 놀려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웃음)
이제는 총 들고, 돌멩이 들고 안 싸워도 세상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 선배들이 우리 사회를 민주 사회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손가락만 잘 놀리면 되는데 대신 나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액주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인원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딱 갖고 살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 하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 손가락을 좀 빌려야 되기 때문이죠. 이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가락을 좀 빌릴려면 평소에 잘 해야 합니다. 평소에 말도 안 듣고 맨날 싸우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얘기를 꺼내면 미워서 엉뚱한 사람에게 투표합니다. 그러나 이런 목표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두 고마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꿈꾸는 문명의 전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니 매일 절을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 이렇게 관점만 바꾸어도 벌써 여러분들의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이런 기적이 지속되려면 한 세대가 노력해야 합니다. 한 세대가 노력하면 저는 그런 기적이 정말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기적이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 하나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강연은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청년들은 졸린 눈을 부릎뜨고서라도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강연을 듣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스님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고 하자 청년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엿보였습니다. 통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이라는 문명 전환의 원을 세우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소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하면서 통일을 실현할 정부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평소에 사람들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하자 청년들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기적을 만들고 이를 지속하려면 한 세대가 힘써서 노력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스님의 강연을 듣고 나서 조금 더 활기있어지고 자긍심이 생긴 분위기가 되었는데, 한 청년은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청년들 모두가 스님으로부터 열등의식 극복이라는 집단적인 심리 치료를 받은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일은 버스로 장시간 이동하기 때문에 길림의 새벽 시장에 들러 각자 아침과 점심 식사 끼니를 구입한 후 오후에는 고구려의 성곽이 가장 잘 남아있는 백암산성에 도착해 고구려의 기상을 마지막으로 느껴보면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은 내일 있을 정토회 천일결사 8-6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팀 보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 오늘 현장 스케치는 임여원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