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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라고9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화구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학자가 있어 소개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학자가 있어 그의 삶을 소개하고 그의 저서 몇 권을 소개해본다. 그는 정수일 교수다.
일제 강점기 연변의 가난한 유민의 아들로 태어나, 북경대학을 거쳐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하며 중국의 엘리트로 거듭났다. 그러다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북한으로 건너 가 평양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그 후 평양대학교를 떠나 10년 동안 튀니지,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지의 대학에서 이슬람을 전공한 교수로 활동해왔다가 1984년 그는 한국인이 아닌 아랍계 외국인의 신분으로 남한에 돌아온다. 그는 아랍계 외국인으로서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국스러운 외모와 완벽한 아랍어 구사로 한국에서 만난 아내조차 그를 아랍인으로 믿고 있었다.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였고,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제국관계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 후 단국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임용되어 강의 하였고, 많은 저술 활동 및 대외 활동을 하며, 한반도의 고대문명과 아시아와 이슬람간의 문명교류 등의 분야에서 활발한 학술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는 1996년 ‘정수일’이라는 이름의 북한공작원으로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긴급 체포되고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감옥에서 ‘문명교류학’이라는 그의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사형이 선도되기 전, 그는 이미 국내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였지만, 감옥 안에서 그는 자신의 얽혀버린 삶을 반성하듯 더욱 더 연구에 매진하여 200자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연구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2000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 이후 2003년 4월 30일 특별사면 및 복권되었으며 5월 14일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는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牛步千里)”를 통하여 자신의 할 일을 학문에 몰두하는 일이라고 다짐한다.
하나하나를 새로이 출발하고 새로이 쌓아간다는 심정과 자세로 과욕이나 성급함을 버리고 천릿길에 들어선 황소처럼 쉼 없이, 조금도 쉼 없이, 오로지 앞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현대사의 한국이 놓여있던 갈라짐과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었던 학자는 사형수로서 독방에서 해왔던 것과 같이 쉼 없이 이슬람과 실크로드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있다. 어긋난 삶의 복원은 그가 추구하는 학문 속에서, 그 지식이 담긴 글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문명 교류사 연구』, 『이슬람 문명』『실크로드 사전』등이 있으며, 역주서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등이 있다.
먼저 그의 저서 『고대문명 교류사』를 소개한다.
이 책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가 서양 중심의 세계사 해석에서 벗어나 고대의 흥미로운 교류사적 사실을 풀어낸 책이다. 기간은 태고의 인류 이동 시대부터 기원후 5-6세기까지. 우선 문명 간의 교류 전반에 대한 개도장으로서 전편에 관류되어 있는 주제인 동과 서, 문명과 문명교류의 개념과 내용을 살펴보고 태고 시대 인류의 이동에서 비롯된 문명교류의 시원을 밝혔다. 아울러 선사 시대의 교류상을 구명하는 내용과 함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스키타이와 흉노를 비롯한 북방 유목기마민족에 의한 문명교류 실태 등을 조명했다.
첫째, 서양 중심의 세계사 해석 지양한다.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동양과 서양의 구분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원, 명대 문헌에서 이미 동양과 서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때의 의미는 오늘날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문헌에서는 그야말로 바다를 중심으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한 반면, 오늘날에는 서양을 중심으로 서양 이외의 방대한 지역을 자의적으로 동양으로 지칭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교류사를 다만 동서교류사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교류를 중심으로 세계사를 재해석하고 있다.
서양을 중심으로 생각하자면 신대륙의 발견이겠지만, 인류 전체의 교류사에서 보자면 신대륙의 발견은 기존 문명교류의 새로운 국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서양의 시각을 벗어나면 교류사의 시기는 고인류의 이동 시기까지 소급된다. 문제는 역사 시대 이전의 교류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본 연구에서는 원시 비너스상, 거석 기념물, 청동기 유물 등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교류사적으로 재해석하여 고대문명교류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제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 야만으로 취급되던 유목민족의 교류사적 의의를 재평가한다.
동서양 구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중심의 일방적인 시각이 아니라 보편적인 시각에서 교류사를 재구성하는 면은 유목민족의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키타이 - 흉노 - 훈으로 이어지는 고대 유목기마민족은 문명에 비해 야만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들 나름의 문화를 일구었을뿐만 아니라 때로는 침략으로, 때로는 무역으로 방대한 지역의 교류를 중개했던 유목민족의 교류사적 의의를 재평가하였다.
넷째, 고대의 흥미로운 교류사적 사실들 찾아내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이 동양에 출몰한 것은 근대 이후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실제로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중국에 공식 사절을 파견한 것은 기원후 2세기의 일이다.
이러한 예는 로마의 문헌에서 중국을 어떻게 묘사하였는지, 또한 중국의 문헌에서 로마를 어떻게 묘사하였는지를 분석하는 가운데 발견될 수 있었다. 연구에 의하면 로마가 중국을 알게 된 계기는 비단이었다.
다섯째, 기독교의 전파 또한 고대의 역사적 사실이다.
최초로 기독교가 동양에 전파된 것 또한 근대 이후의 일이 아니었다. 고대 기독교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기독교(카톨릭),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동방 기독교(그리스 정교)로 나누어졌던 시기, 동방 기독교의 일파가 중국으로 전파되어 당 태종의 공식 승인을 받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불국사에서 석제 십자가 유물이 발견되었고, 성모마리아 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여섯째, 세계문명교류의 맥락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실크로드와 한국사의 연결은 저자의 일관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한반도 일대의 고인돌과 거석 기념물의 관련, 경주 출토 유리병과 로만 글라스의 관련, 불국사 출토 석십자가와 고대 기독교의 관련 등을 통해 한국사를 교류사적 측면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세계문명교류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일곱째, 실크로드 전도를 만들었다
실크로드의 개념을 중앙아시아 비단 무역로가 아니라 문명교류의 통로로 재정의한다면, 전 지구적 범위에서 주요 교류 루트를 재구성할 수 있다. 본서 화보에 실린 실크로드 전도는 바로 이러한 인류 문명교류의 주요 통로를 나타낸 것이며, 저자의 교류사 기획 전반을 요약하는 내용이다.
여덟째. 책의 내용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다.
실크로드 전도가 전체 내용의 요약이라고 한다면, 각 장의 시작 부분에는 해당 내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예컨대 청동기 시대 문화권이나 흉노의 이동과 훈족의 활동 범위 등을 나타낸 지도들은 모두 문헌 고증을 거쳐 저자가 직접 데이터를 제공하고 정보공학연구소에서 제작한 지도들이다.
아홉째, 고대문명교류사 최대의 두 사건의 주요 장편을 컬러로 실었다.
기원후 5세기까지 고대 인류문명교류의 양대 사건은 알렉산더의 제국 건설과 장건의 서역 탐험(서역 개통)이라고 할 수 있다. 화보에서는 두 사건의 주요 장면을 컬러로 실었다. 알렉산더의 이쑤스 전투를 그린 벽화는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되었고 현재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엄밀한 고증을 거쳐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였고, 장건의 서역 탐험은 복장 등에 대한 고증을 거쳐 상상한 장면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였다.
열째,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구속되어 재판과정에서 법정진술을 통하여 “이 책의 원고만큼은 살려서 학계에 남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한 바 있다.
둘째 그의 저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소개한다.
“왕오천축국전”은 720년 무렵 신라 고승 혜초스님이 인도와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를 돌아보고 남긴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한자로 쓴 글을, 그것도 우리 이야기가 아닌 먼 나라에 관한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번역서가 아닌 역주서가 반드시 필요한데 정수일 교수께서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우리가 혜초스님이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혜초스님이 세계 최초로 천축국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혜초스님보다 먼저 다녀와서 쓴 여행기가 몇 권 더 있다.
연대별로 세계 5대 고전여행기를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5세기에 중국 동진의 법현스님이 천축국을 다녀와서 쓴 “불국기”란 저서가 있다. 혜초스님은 16세에 당나라로 가서 20세 젊은 나이에 중국 광주를 떠나 인도로 갔다. 그러나 법현스님은 당시 평균수명이 45-50세 시대에 64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천축국 여행을 떠났다.
둘째, 6세기에 중국 북위의 혜생스님이 쓴 “송운행기”이라는 책이 있다.
셋째는 7세기에 그 유명한 당나라의 현장법사께서 천축국을 다녀와서 쓴 걸작 “대당서역기”란 책이 있다.
넷째, 7세기에 당나라 의정스님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라는 책이 있다.
다섯째가 8세기에 신라의 혜초스님이 천축국을 다녀와서 쓴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스님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704년에 태어나 719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를 만나 밀교를 배우던 중 그의 권유로 20살의 젊은 나이에 구법 여행을 떠난다. 4년 동안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하고 중국 쿠처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온 혜초는 그 여정을 기록하여,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긴다.
그 후 다시 스승 금강지와 함께 밀교 경전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787년 입적했다고 전해진다.
혜초가 남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중국 둔황 석굴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6,000자 남짓한 적은 분량으로, 세 권으로 된 원본을 축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관한 내용뿐 아니라 정세·지리·풍속·언어까지 기록되어 있어 고대 동서 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완벽한 저술의 형태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고전문학이며, 8세기 인도,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돈황석굴에서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에 의해 발견된 이래 백 년 가까이 여러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쓴 저자의 고향인 한국에서는 연구가 한참 뒤져, 지금까지 출간된 예닐곱 종의 번역서 외에는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역주자인 정수일 교수를 위대한 우리 선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불초감에 시달리게 한 원인이자 마침내 역주 작업을 시작하게 한 계기다.
이 역주서에는 기존의 연구서들을 비교·분석하고 대당서역기, 불국기 등과 같은 관련 서적과 대조했다. 또 그가 지닌 중국어와 문명교류, 이슬람, 중앙아시아의 역사, 문화, 지리 등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원문 번역 및 해설과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펴냈다.
여행기를 읽는 목적 중 하나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정수일 선생의 이번 역주는 1200년간 잠들어 있던 고문서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업이자 먼 옛날의 먼 곳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책의 맨 앞에는 혜초의 기행 노정을 표시한 지도와 최초로 시도된 혜초 복원도 두루마리에 필사된 그대로 227행으로 나눈 왕오천축국전 원문이 온다.
지금까지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국내 연구는 몇 편의 논문과 번역본이 전부다. 그러니 이 여행기는 문장을 풀이한 번역서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은 먼 옛날 먼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육천 자 남짓한 적은 분량에 40여 개 지역에서 보고 들을 것은 개괄하다 보니 내용이 간략한 데다가, 발견 당시 앞뒤가 잘려나간 상태였고 지워져 희미한 글자나 지금은 쓰지 않는 글자도 많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해 정확한 해설을 붙이고 의미나 형태가 모호한 한자 등에 대해 꼼꼼히 주석을 단 역주서가 절실하다.
역주자인 정수일 선생은 아직까지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는 현실을 오래전부터 개탄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확한 번역을 토대로 원문 분량의 약 10배에 해당하는 503개의 자세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를 국내 최초로 펴낸 것이다.
발견된 왕오천축국전은 초고본인가, 원본의 축약본인가, 아니면 원본을 그대로 베낀 사록본인가?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한 권의 두루마리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 안의 내용도 문단의 나뉨 없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이라고 규정하는 데 근거가 된 혜림의 “일체경음의”에는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휘의 주석이 상권, 중권, 하권으로 분류되어 실려 있다. 이것이 현존 왕오천축국전이 초고본인가, 원본의 축약본인가, 아니면 원본을 그대로 베낀 사록본(寫錄本)인가 하는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역주자인 정수일 교수는 “일체경음의”에 주석된 어휘와 현존 왕오천축국전에 포함된 어휘 중 서로 일치하는 어휘의 수와 나오는 순서 등을 세밀히 비교했다. 그리고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세 권이었던 원본의 축약본이라고 결론 내린다.
또한 “일체경음의”가 고른 주석 어휘의 빈도를 근거로 현존 “왕오천축국전”에서 앞뒤로 잘려나간 분량도 최초로 추산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정수일 교수의 학문의 넓이와 깊이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어 학자로서 그를 짝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혜초는 서역의 어디까지 갔는가? 동양인 최초로 아랍 제국을 밟았다.
혜초가 여행한 경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많다. 직접 다녀온 답사지와 전해 듣고 쓴 전문지(傳聞地)가 여행기 안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역주자는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구체성 여부, 지리적 위치, 여행의 목적, 직접 다녀온 답사지에 대해서는 혜초가 시작하는 문구를 일정한 형식으로 쓴 점 등을 감안해 답사지와 전문지를 구분해냈다.
그리고 혜초가 페르시아(파사)와 아랍(대식)까지는 가지 않았고 이곳에 대해서는 전해 듣고 썼다는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깨고 동양인 최초로 아랍 제국까지 다녀왔다는 근거를 타당성 있게 제시했다. 단, 그 때의 아랍 제국(대식국)은 오늘날의 아랍 세계와 그 지역적 포괄 범위와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서이다. 역주자에 따르면 혜초는 당시 아랍 제국의 중앙아시아 관할지이자 동방으로 가는 통로였던 니샤푸르(NDshApEr, 현 이란 동북부의 마슈하드 Mashhad)까지 다녀왔다.
혜초의 서역기행 경로
역주자에 의해 새롭게 추정된 혜초의 여행 경로는 다음과 같다.
중국 광주에서 출발 ⇒ 남중국해 ⇒ 불서국(수마트라) ⇒ 사자국(실론, 스리랑카) ⇒ 동천축 ⇒ 폐사리국(바이샬리) ⇒ 구시나국(쿠시나가라) ⇒ 피라날사국(바라나시) ⇒ 마게타국(왕사성, 마하보리 등 4대 성지) ⇒ 중천축구 수도 갈나급자(카냐쿱자) ⇒ 남천축국(나시크) ⇒ 서천축국(알로르) ⇒ 사란달라(잘란다라) ⇒ 탁사국(탁샤르) ⇒ 신두고라국(신드구르자라) ⇒ 사란달라 ⇒ 가섭미라국(카슈미르) ⇒ 건타라국(간다라) ⇒ 오장국(우디아나) ⇒ 구위국(치트랄) ⇒ 건타라국 ⇒ 람파국(람파카) ⇒ 계빈국(카피시) ⇒ 사율국(자불리스탄) ⇒ 범인국(바미얀) ⇒ 토화라(토카리스탄) ⇒ 파사(페르시아) ⇒ 대식(니샤푸르) ⇒ 토화라(토카리스탄) ⇒ 호밀국(와칸) ⇒ 파미르 고원(총령진) ⇒ 소륵국(카슈가르) ⇒ 구자국(쿠차) ⇒ 언기국(카라샤르) ⇒ 돈황 ⇒ 난주 ⇒ 장안 도착
여행기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풍물과 풍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혜초도 자기가 살던 곳의 풍습과 다른 이국땅의 낯선 풍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서캐와 이가 대단히 많은데, 이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토번국)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대식국)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파사국)
-토화라국을 비롯해 계빈국이나 범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호국)
혜초가 천축국 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쁨이나 험난한 여로에서의 고단한 심정을 읊은 아래의 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향수에 젖은 혜초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 시를 통해 혜초가 ‘신라(계림)’에서 온 스님이라는 것으로 일 수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셋째 그의 저서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를 소개한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는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 정수일이 실크로드 3대 간선 중 하나인 초원 실크로드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답사하고 기록한 저작이다.
인류 최초의 실크로드로 알려진 초원 실크로드는 몽골 유목기마민족의 활동무대이자 유라시아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교류와 소통의 길이기도 하다.
저자 정수일 교수는 답사단과 함께 2007년부터 중국과 몽골, 시베리아 초원을 거쳐 모스끄바에 이르는 2년여의 초원 실크로드 답사를 마쳤고 이 책은 그 대장정 끝에 완성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정수일 교수만이 들려줄 수 있는 실크로드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인류의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 300여장의 사진자료와 어우러져 실감나는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은 중국 동북지역의 대흥안령 초원로, 몽골 초원로, 시베리아 초원로를 따라 3부로 나뉘어 있으며 초원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들을 51개의 장으로 수록하여 각 지역의 문화유산, 역사, 현재의 상황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정리했다.
유목기마민족이 개척한 대륙의 초원을 따라 펼쳐지는 장대한 스케일의 ‘문명기행실록’이라 할 만하다.
정수일 교수는 초원 실크로드가 거칠고 험하지만 일찍이 찬란한 초원문명을 잉태하고 전파시킨 소통의 길이며, 문명교류의 최초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선구의 길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이 길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추적해볼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저자는 문명의 전개과정과 그에 연동된 우리 민족의 삶은 어떠한 것이었는가에 주목하여 기록하고 있다.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 실크로드에는 동서를 잇는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초원 실크로드’ 그리고 ‘해상 실크로드’, 이렇게 세 갈래의 큰 길이 있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통상 오아시스 실크로드만을 떠올리는데 그것은 실크로드 연구가 주로 이 길에만 치중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원 실크로드는 이 실크로드 3대 간선 중 가장 일찍 개통된 길로, 흑해 동북쪽 남러시아에서 시작해 카스피해 북안과 아랄해 남안, 그리고 넓은 까자흐 초원을 지나 알타이산맥 남록 중가리아분지를 거쳐 몽골 오르혼강 연안(고비사막 북단)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동남쪽으로 길을 뻗어 중국 화뻬이(華北)지방과 대흥안령(大興安嶺, 다싱안링)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그이 저서 ‘역사’에서 처음으로 밝힌 스키타이의 동방무역로도 바로 이 초원 실크로드의 서단(西段)에 해당된다.
광대한 유라시아대륙 전역에 걸친 이러한 초원의 문명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을 저자는 서구의 ‘문명우월주의’나 ‘문명중심주의’로 인한 것으로 본다.
신석기시대를 갓 벗어난 에게해의 애송이 문화를 에게문명으로 정의하면서도 이보다 3천년 후 완숙한 금속문화를 가꾼 유목기마민족의 문명은 주변문화로 비하하고 홀대해왔다는 것이다.
저자의 초원 실크로드 답사 목적은 그에 따라 애초부터 북방의 초원 유목세계가 미개와 야만으로만 치부되는 현재 학계의 관점을 극복하고 초원 실크로드의 문명사적 의미 복원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초원 실크로드를 문명사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유일무이한 책이다.
초원이나 유목민이란 말은 듣기에 따라 목가적인 환상과 동경을 자아내는 이름이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양상도 천차만별이다.
초원은 온대지방의 반건조기후로 말미암아 질척한 산림지대와 메마른 사막지대 사이에 생겨난 지대로서 북위 50도에서 40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초원은 어디까지나 태생적인 자연이다. 그것도 원래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겨나고 내버려진 자연이다. 그러다가 이러한 자연이 인간과 인연을 맺어 그 속에 인간사회를 잉태하면서부터 그 면모와 가치는 일변한다. 이러한 ‘일변’을 가져오게 한 주역이 초원의 유목민이다.
초원은 기온이나 강수량으로 보아 나무나 곡식이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건조기에는 불모지나 다름없다가도 약간의 비라도 오면 풀이 자란다. 그래서 농경은 불가능하고, 생계의 유일한 수단은 가축을 기르는 축산업이다.
그런데 축산은 목초가 필요하고, 사람이나 가축이나 생명을 이어가려면 수원이 필수다. 게다가 혹독한 계절의 변화는 인간과 가축의 이동을 불가피하게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수원(水原)이나 목초를 따라,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순회한다. 이렇게 가축을 기르면서 풀과 물을 찾아 가재와 함께 주거지와 활동지를 옮기는 일을 유목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을 유목민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초적 유목생활이 기마라는 획기적 이동수단과 만나게 되고 기원전 1000년경 청동제 고삐와 제갈 그리고 등자가 발명됨에 따라 유목민의 이동은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초원 실크로드는 바로 이 유목기마민족이 닦아놓은 길이다. 초원과 유목, 기마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인간, 이 네가지 요소가 초원문명과 초원 실크로드의 신비를 파헤치며 그 가치를 가늠케 하는 기본요소다.
우리에게 초원 실크로드란 무엇인가
저자는 몽골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몽골과 우리 사이의 의아해질 정도의 유사성에 이른바 고려풍을 피부로 느끼곤 했다고 술회한다.
고려 세종과 원세조 간에 서로의 풍속을 바꾸게 하지 않는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약속이 있었을 정도로 고려풍과 몽골풍이 일어났고 이것이 분명 소중한 유대임에는 분명하지만, 역사성은 무시한 채 유사성만을 내세워 우리 문화의 원형을 몽골에서 찾는다든가, 두 나라간의 국가연합 같은 엉뚱한 호기를 부려서는 안된다고 경계한다.
초원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의 뿌리를 찾는 것은 따라서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적 조건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미래를 착실하게 예비하는 필수적인 작업이다. 초원 실크로드는 역사와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게 트이게 하고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국가적·외교적 갈등을 풀어갈 시공을 초월한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현재 정수일 교수는 몇 년 전 방대한 ‘실크로드사전’을 펴낸데 이어 최근에는 “해상실크로드사전”까지 펴냈다.
넷째 그의 저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소개한다.
나는 이슬람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코란이나 이슬람문명과 관련된 전문서적을 읽은 것보다 이슬람세계를 여행하면서 직접 체험하고 느낀 여행기를 읽은 것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할 것 같아서 이 책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중세의 세계적 대여행가이며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모로코人)가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 10만km를 종횡무진 두루 편력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연대기 형식으로 기술한 현지 견문록이다.
동서교역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 정수일 교수가 복역 중 옥중 완역한 책으로, 이슬람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한 여행문학의 고전이다. 복잡 다단한 여행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각각의 장마다 그 내용에 따른 여행노선 세부도 총 25매를 만들어 덧붙였다.
이븐 바투타가 미증유의 대탐험을 성공리에 단행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세계에 관한 선배 아랍-무슬림들의 축적된 지식이다.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 문명의 전성기에 많은 아랍-무슬림 학자와 여행가, 상인들은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현지 견문기 등 귀중한 기록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이 책은 중세 이슬람의 법관이자 학자로서 30년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빈 이븐 바투타(1304-68)의 여행기를 완역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여행문학의 고전적 전범으로 꼽지만 알고 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
이슬람세력이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14세기 초, 모로코 탕헤르(퇀자)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 세계 주유의 대장정에 나서 3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 장장 10만여 km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야말로 희대의 여행가이자 탐험가라 할 수 있다.
23년간의 여행 동안 17년을 중국에서 보냈으며 이의 기록도 옥중 구술의 필사본이라는 마르코 폴로에 비해볼 때 이븐 바투타의 여행과 기록은 그 방문지의 범위와 여정에서나 탐험성 짙은 그 성격으로 보나 단연 독보적인 것이다.
모로코 명문사족의 자손으로 철저하게 이슬람문화 속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이븐 바투타의 이 여행의 동기는 무슬림의 필생의 종교의무의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였다.
돈독한 신앙심, 넘치는 탐구심과 지식욕, 강인한 기상과 더불어 당시 세계의 지배적 세력이던 이슬람문명권의 현실적 힘은 그를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카스피해 북부와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내륙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당시 성행하던 이슬람교파의 하나인 수피즘이 전도를 위해 세계 도처에 설치한 무슬림의 숙소인 '자위야'와 이슬람교 특유의 형제애는 이 오랜 여정을 가능하게 만든 또 하나의 주요한 배경이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겨가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앞선 위대한 여행가들의 후예이지만, 당시 세계의 역사, 문화적 정황은 그의 탐험에 독특한 성격을 더해준다.
이븐 바투타가 세계를 탐험하던 14세기 전반은 1258년 압바쓰조 이슬람 통일제국의 멸망 후 세계 각지에서 지역중심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다.
3대륙을 아우르는 이슬람세계는 여전히 세계 지배세력의 하나였으나 동쪽의 일한국, 서쪽의 맘루크조, 이베리아반도의 나스르조를 중심으로 이전의 통일 이슬람세계는 다극화하고 있었다.
각지에 파고든 이슬람문명은 토착화되는 한편으로 지역적 특성이 가미되어 독특하고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추세는 이븐 바투타의 탐구욕과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고,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문명 전성기에 세계로 뻗어나간 무슬림 학자와 상인, 여행가들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은 그의 여행의 충실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의 대장정은 당대 이슬람 마리니야조의 쑬퇀(군주) 아부 아난에 의해 진가를 인정받고 기록으로 남게 된다.
이븐 바투타는 27년간의 아시아와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창 아프리카 내륙을 여행하던 중 아부 아난의 특명을 받고 귀향해 여행기 집필을 시작한다.
이후 아부 아난의 지시로 이 여행기 원본을 요약하고 다듬은 당대의 대문장가 이븐 주자이 알 칼비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여행기의 저본(底本)이다.
여행기 앞뒤에 붙은 이븐 주자이의 서문과 발문은 아랍문장 특유의 화려한 만연체 수사법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흔히 접하기 힘든 아랍문학의 진수를 맛보게 한다.
철두철미 이슬람적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문물을 접한 바투타의 개성과 함께 사실적 내용과 생동감 넘치는 서술은 이 여행기를 주저없이 여행문학의 고전으로 꼽게 한다.
동서교역사와 씰크로드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정수일 교수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상세한 역주를 붙여가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완역한 이 책은 지난 4백여년간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약 15개 언어로 축약,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역본은 1853-58년에 빠리에서 출간된 프랑스어본이 유일하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에서 두번째의 완역본을 한글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서교역사와 씰크로드학의 권위자로서 현지에서 수학해 아랍어에 정통한 정수일 선생은 이 여행기의 더할 나위 없는 역자이다.
초역본들에서 보이는 한계를 충분히 감안하고, 찬미와 기원의 삽입구를 비롯한 중세 아랍문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원서의 특징을 모두 살려 옮겼다.
또한 시공간적 거리에서 오는 이질감과 낯선 느낌을 해소하고 최대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유명사와 문물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역주를 붙였다.
옮긴이의 해박한 식견과 아울러,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굽힘없는 소신과 열정 가운데 태어난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이 한글 완역본 역시 소중한 작업이다.
원서에 수록된 이븐 바투타 여정의 세부도 25장과 함께 옮긴이가 꼼꼼한 고증 끝에 만든 '이븐 바투타 여행로 전도'와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 여행로 비교도'가 실려 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 두 권을 소개한다.
이 책을 보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나는 두 권의 참고서적을 함께 본다. 먼저 코란(꾸란)과 코란의 이해를 돕기 위한 ‘꾸란의 이해’라는 보조서적과 세계전도를 이용하고 있다.
전 세계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약 20억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매일 5번 예배를 드리며 이슬람의 제1 경전인 코란(꾸란)을 암송한다. 교리, 예배의식, 생활 규범 등이 담긴 코란은 무슬림에게 삶의 지침서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아랍 국가는 코란을 헌법으로 두기까지 한다.
코란은 약 1400년 전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하느님(알라)에게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610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근 히라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이를 제자들에게 입으로 전했고, 실제 기술은 제자들을 통해 이뤄졌다. 이후 구전과 필사가 진행되면서 내용이 조금씩 다른 코란이 생겨났지만 제3대 칼리프(이슬람제국 최고통치자) 우스만(644∼656 재위)이 단 하나의 코란으로 집대성했다.
이 정본은 아랍어 문법이 정립된 933년부터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번역본은 인정되지 않는다.
무슬림은 하느님의 뜻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언어를 아랍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학자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현재와 같은 거대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된 것은 하나의 언어로 된 코란 때문”이라고 했다.
코란을 외우고 예배로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슬람 언어와 문화가 아랍권에서 자연스럽게 전승, 전파됐다는 설명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Iisa)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마르얌의 아들('Iisa Ibn Maryam)'으로 보는데, 알라가 동정녀 마르얌에게 정령을 불어넣어 잉태 탄생케 하였다고 인정한다.
『꾸란』에서는 예수를 선지자(al-Nbi'), 사자(使者), 메시아(al-Masih), 알라의 노복('Abdu'l Lah) 등으로 칭한다. 특히 예수를 포함한 선지자들에 대한 믿음을 하나의 신조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에 관해서는 유태인들이 그 자신을 직접 십자가에 매달아죽인 것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을 대사(代死)시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알라가 선지자인 그를 곁으로 불러올렸다고 믿는다.
【아래 그림】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 오래 전에 출판한 “세계의 종교들‘이란 책 중에서 ‘휴스톤 스미드’라는 저자는 “어느 문명에서나 어떠한 종교의 서적도 코란경만큼 서양적인 맛에 가까운 책은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아랍 언어처럼 인간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언어는 또 없을 것이다‘.라고 기슬하고 있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 “전쟁의 역사”를 소개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 생존을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쟁의 역사를 공부하면 세계사는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두꺼운 세계사 책을 꺼내놓고 세계사를 공부하는 것보다 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세계사 공부는 저절로 된다.
이 책은 9000년 동안의 인류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인류의 역사가 전쟁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인류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언제나 맞물려 있었다. 전쟁사에는 인간의 품성과 문화, 정치, 종교, 과학, 한 시대를 지배한 시대정신과 시대의 흐름 등이 모두 담겨 있으며, 인류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전쟁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2차 세계대전의 명장 몽고메리의《전쟁의 역사》는 인류를 괴롭히는‘악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는‘전쟁’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살상의 현장을 체험한 군인이었던 저자는 기원전 7000년부터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로마 전쟁에서 한국 전쟁까지 시/공간을 아우르며 9,000년에 달하는 세계 전쟁사를 풀어놓는다.
이 책의 매력은 전장에서 직접 전쟁을 체험한 군인이 쓴 역사서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군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로멜 군대를 격파했던 명장이자 영국의 육군원수를 지낸 몽고메리 장군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가 쓴 책처럼 단순히 전쟁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은 않다. 몽고메리는 그동안 역사가들이 소홀히 했던 전쟁에서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전쟁터에는 피로, 공포, 소름끼치는 상황, 심한 결핍, 부상과 죽음의 가능성 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문제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내면을 음미하고 그것과 교감하며, 각 상황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고민, 결단, 각고의 노력 등 인간적인 약점까지도 부각시키고자 한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더러는 문명의 소산이라고 말할 테고, 더러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합의를 도출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항상 중재자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내린 판결은 정의보다는 힘에 기초한 것이었다.
몽고메리는 이 책을 통해 전쟁을 찬양하고자 하지 않는다. 전쟁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전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몽고메리가 결국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평화라는 이상이다.
오랜 시간 살상의 현장의 있었던 그는 아래와 같은 글로 오히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평화를 당부한다.
“진정한 군인은 타인을 적으로 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야수를 적으로 삼는다. 한 군인으로서 나는 희망한다. 황금빛 노을이 지고, 반목과 싸움을 잠재우는 소등 나팔소리가 울리는 그날이 오기를. 이윽고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며 세계 온 나라의 친선과 평화를 깨우는 기상나팔이 울리는 그 시대가 오기를.”
그는 이 책에서 탁월한 지도자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는 한국의 전쟁을 언급하면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교 분석하기도 하는데 그 부분이 흥미롭다.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성서』를 쉽게 이해하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는 『The illustrated Bible(일러스트 바이블)』을 소개한다.
일러스트 바이블은 제목 그대로 성서의 이야기를 삽화 컬러 그림으로 그린 일러스트가 있는 성서이다. 영문판으로 되어 있어 영어 공부를 겸해서 읽으면 유익하다.
성서에 실린 일러스트는 성서 일러스트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영국 ‘DK 출판사’가 성서 내용을 엄밀한 고증에 근거해 알기 쉽게 그린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단순히 일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성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This magnificent storybook depicts Jesus' life, from his humble birth to the miracles he worked, the parables he told, and the spread of his message.
Colourful illustrations and Gospel tales make this book a treasure for all ages to share.
성서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계에서 연간 4,000만 권이 팔리는 베스트셀러다. 단순한 판매부수만 보더라도 성서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호텔 침상 옆에는 항상 성서가 놓여있다. 음악, 회화, 미술의 배경에도 성서가 있다. 또한 계약의 개념, 정직, 공평, 투명성 등 국제적인 룰의 바탕에 흐르는 사상은 모두 성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손에 끌려 교회의 주일학교에 다녔으며 결국 그들의 사고방식의 바탕에는 성서가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성서지식이 없으면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성서를 모르면 대화는 물론 비지니스의 진행도 순조롭지 못할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서지식은 그리스도교를 알기 위해서나 국제사회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항목이 되었다.
따라서 서구의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바탕이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만들어낸 성서는,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현대인들이 서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 “The Bible as History”를 소개한다.
"The Bible as History(역사로 본 성서)"는 고고학적 발견들을 배경으로 성서의 내용이 실제 존재했던 역사였음을 밝히고 있는 세계적으로 천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서(Over 10 Million Copies Sold) 영어 공부를 겸해서 성서와 함께 보면 세계사 공부에 유익하다.
『동양 고전』을 영어로 읽으면서 영어 공부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아래 그림】주역은 영어로 번역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역경을 영어로 “I-ching”이라고 하지만 뜻으로 풀어서 “Book of Change”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세계적인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죽을 때 머리 맡에 놓여있던 책이 주역이었다.
【아래 그림】동양고전을 영어로 변역한 유명한 “James Legge”의 책이다. 논어는 Confucian Analects, 대학은 The Great Learning, 중용은 The Doctrine of the Mean으로 영역하고 있다.
【아래 그림】논어(Confucian Analects)는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지혜를 전하는 동양철학의 고전이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을 사는 이치나 교육, 문화, 정치 등에 관해 논의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아래 그림】대학(The Great Learning) 대학(大學)은 어떻게 학문을 하고 어떻게 자신을 바르게 하고 어떻게 사회에 이바지하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를 다룬 책이다.
【아래 그림】중용(The Doctrine of the Mean)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그의 명저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중용을 “Golden Mean"일고 멋지게 번역하고 있다.
중용(中庸)에서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 ‘庸’이란 평상심을 뜻한다.
이 책 중용은 사람은 어떻게 하여 이성으로 돌아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래 그림】맹자(Mencius)
이 책은 유교사상을 완성한 맹자의 철학이 담긴 정치사상서이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위기 상황 속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지키고 그것을 현실에 접목시키려고 했던 맹자의 사상이 반영된 책이다. 인간과 사회, 역사 등을 대상으로 한 맹자의 다양한 언급들을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래 그림】도덕경(Tao Teh Ching)
노자가 도덕경에서 들려주는 진리의 말은 물질만능 주의에 빠진 현대인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노자의 대표저서인 도덕경은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도(道)'자로 시작되는 도경과 '덕(德)'자로 시작하는 덕경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81편의 짧은 글 속에 진정한 자기를 완성하는 도(道)와 진리의 길을 담고 있다.
그는 도(道)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다.
도가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를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행위로 보았고, 노자의 도덕경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래 그림】장자(The Book of Chung Tzu)
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여유로움의 세계를 담은 책으로 대지(大地)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손자병법은 영어로 번역하면 "The Art of War" 즉 "싸움의 기술"이다.
When you know others, you are able to attack them When you know yourself, you are able to protect yourself. Attack is the time for defense, defense is a strategy for attack. If you know this, you will never be in danger even if you fight a hundred battles
결국 知彼知己면(지피지기 : 저편의 사정을 알고 이편의 사정을 알고 있으면) 百戰不殆다(백전부태 :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말이다.
손자병법의 최고의 기술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영어로 하면 Those who win every battle are not really skillful, Those who render others' armies helpless without fighting are the best of all
【마치 면서】
나는 정수일 교수가 저술한 책을 읽으면서 그의 깊은 학문적 연구가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나 조선시대 18년 유배 생활을 하면서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5백여 편의 저작을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다음은 정수일 교수가 1996년 10월 21일에 옥중에서 보낸 편지 중 일부를 올리면서 마친다.
“이방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오늘은 당신이나 주위에서 못내 궁금해 하는 한 가지, 내가 어떻게 해서 여러 외국어를 습득하게 되었는지 더듬어 보겠오. 법정에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게 무슨 자랑거리는 아니오. 남들이 궁금해 하고 내 인생역정의 한 단면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용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처음으로 접한 글자는 중국 한어가 아니고 일본어였소. 소학교 때 일어를 배우고 해방 후에도 줄곧 일본서적을 읽었고 지금도 일어책을 놓지 못하오.
다음으로 고등학교에서 중국어, 러시아어를 배웠소. 중국외교부에 근무하면서 중국말을 할 만큼 했소. 러시아어는 대학 때 교재로 채택되어 자연스럽게 익혔고 북녘 땅에 들어가서 교수를 하다 보니 학계에 러시아어가 보편화 되어있어 러시아 원전을 수없이 독파해야 했소.
영어는 대학에서 익혔지만 이집트 유학중 공용어로 쓰였기에 더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소.
아랍어는 전공이었고 10년을 아랍어권에서 살았으니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몸에 익었소. 남한에 와서도 단국대, 외대, 명지대에서 아랍어를 강의했소.
독일어와의 인연은 좀 의외지만 카이로대학 유학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 여럿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익혔소. 프랑스어는 구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등에서 근무하면서 업무상 습득하지 않을 수 없었소. 프랑스어는 매력 있는 언어로 왜 자기 언어를 사랑해야하는 지 알게 했소.
스페인어와도 접촉할 기회가 있었소. 모로코에서 있을 때 스페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 호기심에 익혀나갔소. 향학열에 불타던 시절, 아랍어와 많이 뒤섞인 페르시아어에도 도전했오. 이란 동무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웬만한 대화는 가능해졌오. 지금 문명교류학에 천착하고 보니 이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소.
또, 말레이 대학의 교수로 지내면서 말레이어를 해야했고, 필리핀 국적을 따야했기에 필리핀어에도 몰입했었소. 이렇게 보면 동, 서 12개어와 씨름해본 셈이오.
자율적일 때도 있었고 타율적일 때도 있었으나 현재 문명교류학을 개척하는 마당에 인도 고대어를 비롯한 두세개를 더 배워야 할 것이오.
아무튼 60평생 녹록찮은 외국어의 여신에 사로잡혀 그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소. 어찌 보면 비운이기도 하고 행운이기도 하겠지. 이 모든 것은 나의 꿈과 더불어 시작된 기구한 인생역정과 관련된 일일 것이오.
동분서주하며 부대기는 세파 속에서 그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이방어를 낚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많이도 소진했소. 그러나 예정된 일이었고 운명으로 여기고 신명을 다했기에 추호도 후회는 없소. 오히려 이제라도 그 결실을 하나씩 맺고 있으니 큰 보람을 느끼오.
사실 외국어는 아는 만큼 세계로의 지평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이니 큰 자산이오. 이상, 내 경험이 후학들에게 무슨 보탬이 될는지 모르겠으되 한 사람이 뜻을 두고 부딪혀보고 도전했다는 것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오.
요즘에는 정수일 교수와 같이 학문적 깊이가 높은 훌륭한 학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좋은 책을 많이 저술해내기 때문에 나같이 정규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도 좋은 책을 통하여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정수일 교수의 학문 세계를 동경하며 이화구 올림
P.S., : 재미없는 책이야기만 잔뜩 올려서 지루할 것 같아 사람 냄새나는 사진 몇 장 올려본다.
지난 금요일 초등학교 동창들 번개모임 사진이다. 서울에 35년 이상 살았어도 강북에만 살다가 강남역 인근으로 나가보니 마치 뉴욕의 Manhattan에 온 것은 같은 착각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 저녁 해미수산에서 예정된 전라고 9회 재경모임에 친구 여러분의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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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와 사진 잘 보았습니다.
저도 정수일 교수님의 책을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책도 거의 다 소장하고 있고요.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