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의 봄/靑石 전성훈
북녘에서 찾아오는 봄을 가슴에 새겨두려고, 비 온 뒷날 아침 불현듯이 불암산을 찾아간다. 불암산을 다시 오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6개월은 거뜬히 넘었을 것 같다. 허리디스크로 왼쪽 다리가 저리는 증세가 있어서 늘 걷기가 불편하다. 먼 거리를 간다는지 둘레길 또는 산에 오를 때는 몸 상태를 보고 정한다. 그 때문에 누구와 약속하기가 어렵다. 그날그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상황에 맞추어 일정을 잡아야 한다. 겨우내 중랑천을 걷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야트막한 동네 뒷산인 초안산을 찾는다. 겨울철과는 달리 봄에서 늦가을에 걸쳐서는 몸이 훨씬 좋아지는 것을 몇 년에 걸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내려 불암산 입구로 들어서자, 불암산 정상 너머에서 아침 햇살이 붉게 물들이며 떠오른다. 배드민턴장 입구에는 불암산 산신제를 지낸다는 현수막이 보인다. 계곡에 물이 흐르기에 다리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귀 기울인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더니,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좔좔, 쾅쾅거리는 폭포수 같은 소리가 아니고, 어린아이가 숨을 고르며 자듯이 아주 작은 소리가 난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생명의 물소리가 이끼긴 바위를 휘돌아가며 얕은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고개를 들고 언덕을 올라가니 산수유가 노오란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반갑다고 인사한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을 지으며 산수유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후다닥후다닥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까마귀 한 마리가 인기척에 놀란 듯이 날갯짓을 짓더니 훨훨 저 멀리 날아간다. 저 혼자 놀이에 빠졌던 까마귀에게 뭔가 불안함을 느끼게 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간간이 산새 소리가 들리지만, 산을 찾은 사람들 발걸음이 멀어지면 숲속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가까이 찾아오는 봄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묵주기도를 바치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계곡을 따라서 물을 머금은 미끄러운 바윗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올라간다. 어젯밤에 비가 내린 탓에 산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가까운 곳은 확연히 구별되지만 조금 먼 곳은 물체를 정확하게 인식하기가 곤란하다. 어렵게 바윗길을 올라가니 예전보다 훨씬 버겁고 힘들다. 호흡이 가파르고 환절기 탓에 코에서는 연신 콧물이 줄줄 흐른다. 끝없는 계단과 바위를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정상 바로 밑 석장봉에 도착한다. 다람쥐광장 의자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0시 30분이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정상에는 대여섯 명의 등산객이 보인다. 배낭에서 수첩을 꺼내어 산에 오른 감상을 적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진달래가 때가 되면 꽃을 피우려고 봉오리가 조금씩 맺히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계절의 바뀜에 따라서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새싹을 키우는 숲의 모습에 커다란 박수를 보낸다. 산 정상에서 바람이 조금 불어와 시원하고 햇살은 더욱더 땅 가까이 내리쬔다. 정말로 봄이 완연히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도 느낄 수 있다. 편히 쉬고 있는 의자 앞으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젊은 남녀가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약동하는 시절도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을 앞서가는 노인이 내일의 내 모습이듯이, 등허리 뒤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세월을 희롱하는 사람은 한 시절 나의 분신이었음이 틀림없다. 내게 주어진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와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여 지낼 수 없는 노릇이리라. 지금 현재 삶의 충만함과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힘들어도 괴로워도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그 모두가 삶의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신(神)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한쪽 문을 열어 준다”라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고 지고 가는 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지는 오로지 자신에게 달린 몫이 아닐까. 집을 나서기 전에 염려했던 것보다는 다리가 그다지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탕 한 알을 입안에 넣고 불암산 정상을 바라본다. 이제 내려가면 언제 다시 올라올지 모르지만, 가을이 물들어갈 때는 깊어가는 가을 불암산의 운치를 맞이하리라 기약해 본다. (202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