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한 자리, 편한 사람을 선호한다.
인간관계를 살펴보라.
우리는 나와 코드가 잘 맞는 편한 사람들만 골라 만나며, 불편함을 주는 자리는 본능적으로 피하려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불편한 자리로 들어간다.
의도적으로 선택한다(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바로 '사마리아'다.
여기서 '통과하여야 하겠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데이(dei)'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신적 필연성을 뜻하는 단어이다.
예) 요한 3:14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
요한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즉 하나님의 요구사항이다는 의미.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그 불편한 자리로 들어가신다.
하나님의 뜻, 즉 '건져내야 할 한 영혼'이 있었기에 일부러 그 불편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 것이다.
몇 가지 메시지를 전달한다.
1. 우리에게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마리아가 있다.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있다.
불편하지만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불편하지만 가야 할 장소가 생긴다.
그때는 가야 하고 만나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고 과감히 사마리아로 들어가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보다 더 더러운 변절자로 여겼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이 북이스라엘을 점령했다.
아시리아는 강제 이주 및 혼혈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사마리아 지역에 남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잃게 된다.
자연스럽게 사마리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이방신을 섬기는 혼합 종교를 가지게 된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신앙의 순수성을 목숨처럼 여기던 남유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가장 큰 죄악으로 보였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동참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재건을 집요하게 방해했고,
결국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독자적인 성전을 짓고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유대교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다(20)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통상적인 이방인(Gentiles) 보다 더 극심하게 경멸하고 배척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일부러 요단강 동쪽으로 거칠고 먼 길을 '우회'해서 다녔다.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면 자신의 몸이 더러워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에너지가 더 들더라도 불편한 감정과 장소를 피하겠다는 선택이었다.
여러분의 삶에서 '사마리아'는 어디인가?
직장일 수도 있다.
직장 안에서도 아침 조회시간일 수도 있고, 점심시간일 수도 있다.
직장에서 나를 사사건건 괴롭히는 직장 상사나 동료일 수 있다
또한 기정일 수도 있다.
가정 안에서 대화가 꽉 막힌 거북한 식탁일 수 있다.
혹은 내 커리어와 인생에서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약점이나 실패와 환경이 사마리아 일수도 있다.
우리는 늘 그 자리를 피하거나 우회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그 불편한 자리로 들어가신다.
2. 우리도 가끔은 주님처럼 불편한 사마리아로 들어가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불편한 자리로 들어가야 우리가 불편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낮 12시, 가장 뜨거운 뙤약볕 아래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마주한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여인도 가장 불편한 시간에 가장 불편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
죽을 맛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왔다(6-7)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피해 물을 길으러왔다가 유대인 남성과 마주하게 되었다.
즉 이 여인은 그 동네 주민들도 만나기 힘든 인물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아마 그 동네 주민들도 이 여인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여인은 동네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만 활동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남성에게 있어 사마리아 여성은?
사마리아 여성에게 있어 유대인 남성은 어떤 존재일까?
대화의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대상이었다.
가장 불편한 대상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때가 온다.
불편한 장소에서 불편한 사람을 반드시 만나야 할 때가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피할 수 없게 만드실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우리가 피할 수가 없다.
용기를 내어 사마리아로 들어가서 사마리아와 마주해야 한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분이 계신가?
피하고 싶은 문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용기 내어 만나 보시기를 권면한다.
3. 불편한 사람을 만나야 불편해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넸다(7) "물을 좀 달라"
그러자 여인이 거부했다.
9절을 읽자.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οὐ γὰρ συγχρῶνται, 우 가르 숭크론타이)
'함께(sun)'와 '사용하다(chraomai)'가 합쳐진 단어이다.
"우"가 부정어이다. "절대 --아니한다"
"절대로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단순히 "말도 섞지 않는다"는 뜻을 넘어 "물그릇이나 생활용품을 함께 쓰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아주 구체적이고 위생적·종교적인 배척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사용하는 물건에 손만 대어도 종교적으로 ‘부정(Unclean)’해진다고 믿었다.
9절을 MG세대버전으로
" 아니, 당신은 저쪽 진영(당) 사람이면서 왜 나한테 말을 거는 겁니까? 우리 서로 아예 차단(Block)하고 사는 사이 아닙니까? 내 피드에 들어와서 댓글 달지 마세요."
"아니, 보이소! 아재는 딱 보니까 저 윗동네 유대인 양반인 거 같은데, 어째 삼마리아(사마리아) 토박이인 내한테 물을 돌라 합니까? 원래 당신네들은 우리 보기를 소 닭 보듯 카고, 마이 아예 쌩까고 지내는 사이 아입니까? 와 이카십니까?"(경상도 버전)
"사마리아 고을의 여인이 가로되, '대인께서는 엄연한 유대의 사대부이시거늘, 어찌 이리 비천한 사마리아의 여인네에게 물을 청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본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여 한 상에서 겸상하지 아니하는 연고이더라."(조산시대 버전)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헬라어 원어의 뜻은 '그릇을 같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경상도 말로 '우리가 언제 봤다고 겸상을 하려 합니까?' 하는 장벽을 의미하고, 조선시대로 치면 양반이 천민의 그릇을 만지지도 않으려는 지독한 차별을 의미한다.
제가 오래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중 우리 일행이 예루살렘의 어느 호텔에 투숙했었다.
저녁 시간에 호텔 1층 뷔페식당에서 우리 일행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중 색다른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가 식사하는 구역 저쪽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우리구역과 저쪽 구역 사이에 성인 허리 높이 정도의 칸막이가 세워져 있었다.
가이드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그릇이나 수저를 혼용하지 않고 밥도 같이 먹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생수를 선포하셨다(13-14)
주님은 영생을 약속하셨다.
예수를 믿게 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이 여인의 내면 속에서 터져 나오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불편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28-29)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낮12시에 물을 길으러 왔던 그 여인이 도리어 사람들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선포했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예수님이 불편한 사마리아에 찾아오셨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을 불편하게 만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불편한 자리가 주님의 자리로 바뀐다.
가끔은 하나님이 여러분으로 불편한 사람을 만나게 만들고 불편한 장소로 들어가게 만드실때가 있다.
그 때는 너무 불편해하지 마시고 두 눈 질끈 감고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렇게하면 그 동안 우리를 괴롭게 만들었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행 8:26-40을 보라.
성령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길'로 가라고 하셨다.
광야는 메마르고, 덥고, 갈 이유가 없는 불편하고 황량한 불편한 장소이다.
빌립이 그곳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였다.
그는 유대인 빌립에게 있어 문화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이고, 율법적으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어 종교적인 거부감을 주는 '불편한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빌립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그가 읽던 이사야서의 말씀을 풀어 예수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마차 안이라는 불편한 환경에서 세례가 베풀어지고 영혼의 갈증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듯, 성령님은 우리를 광야로 부르신다"
불편한 사마리아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 불편함과 마주하라.
그래서 불편함의 문제를 해결하길 바란다.
또한 불편한 사람을 만나야한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구원해야 할 영혼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 주간에 이런 일들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