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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도는 삶이 고단해도 낙심하지 말고 자유를 누려야합니다.(행14:19-28)
2022, 12/11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14:19-28절 말씀으로“성도는 삶이 고단해도 낙심하지 말고 자유를 누려야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벌써 12월도 두 번째 주일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올해도 2주 남았는데 왜 이리 세월이 빠르게 흐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빠르기가 10대 때는 10㎞, 60대는 60㎞로 자기 나이 때에 맞추어 지나간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각자 빠르게 가는 세월을 역 이용해 올 한해 유종의 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22절)
둘째로,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성도에게 환난이 따릅니다.(22절)
셋째로, 성도는 고난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20절)
그러면 본문말씀을 따라가면서 이 세상 살아갈 때 삶이 고단해도 낙심하지 않고 왜 자유함을 누려야하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22절)
본문 2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아멘.
바울과 바나바가 더베로 이동해 복음을 전할 때 주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그들에게 오직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머물라고 권면하면서 그 말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때어나 지금까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데 왜 핍박이 있느냐며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만 해도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고, 앞으로 그런 때가 다시 올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예루살렘을 포함된 팔레스타인전역과 온 세상을 지배했는데, 로마는 황제숭배와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나 기독교는 오직 여호와만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 로마의 신들을 거부하자 로마는 강력한 힘으로 기독인들을 굴복시키려했습니다. 하찮은 변방의 노예들이 감히 자신들이 섬기는 황제와 신들을 거부하니 당연히 탄압하고 핍박하겠지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콘스탄티누스황제(306-337년)가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284년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숨어 다니며 살았고,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선교초기,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벼슬에서 쫓겨나고, 숨죽이며 초야에 묻혀 힘들게 살았고, 심지어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북한도 공산독재3대 세습체제와 공존할 수 없는 기독교를 멸절시켰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수령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기와집에서 살 수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독인들은 너무 잘 알았습니다. 실제 북한의 현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 김일성과 그 일족들은 신격화하여 섬길 것을 강요했지만 우상을 섬길 수 없는 기독인들이 어떻게 이런 체제와 이를 따르는 친북주사파들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북의 공산세습독재정권은 기독교인으로 밝혀지면, 아니 성경만 소지해도 수용 3년이면 50%이상이 죽고, 5년이면 70-80%가 죽고 10년이면 거의 100%가 죽임을 당하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생을 마감합니다.
또한 회교권과 이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토속종교국가들의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핍박이 도를 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교회 안으로 총기를 난사해 집단살해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적대감과 핍박이 도를 넘어 크게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위험한 환경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치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는 그들을 볼 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이곳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유 때문이며,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귀한 신앙의 자유를 주님오실 때까지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북한에 경도되어 북한중심의 통일을 이루려고 애쓰는 세력들이 득세해서 또 이 나라를 장악한다면 우리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습니다.
지난 2020년에 코로나를 이유로 교회를 패쇠할 수 있는 법안이 국회에 올라왔습니다. 다행이 통과는 안 됐지만, 코로나가 아니어도 사회분위가 교회에 적대적으로 변하면 교회를 패쇠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얼마나 귀한지를 잘 모릅니다.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길 수 있는 권리입니다. 때문에 어떤 고난과 환란이 와도 심지어 생명을 잃는 한이 있어도 신앙의 자유는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은 이 땅에서 삶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북한처럼 이슬람이나 회교권처럼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로마의 카타콤처럼 북한처럼 숨어서 숨죽이며 몰래몰래 눈물로 예배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신앙의 자유함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공동체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전도하고 충성을 다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성도에게 환난이 따릅니다.(22절)
본문 2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아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많이 겪을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우리는 보통 예수 믿으면 범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형통해서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을 듣고 또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환란을 많이 당한다고 말씀하시니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환란을 겪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법과 저질이 판치는 깡패들 속에 법대로 착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양아치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요? 그를 존경하며 본받으려고 할까요? 아니면 왕따 시키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할까요? 그 안달 때문에 아마 견디지 못하고 그들처럼 똑같이 살거나 멀리 도망갈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 우리 믿는 사람과는 물과 기름처럼 생각과 행동이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들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데, 고전6:14-16절에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럴진데 우리가 어떻게 믿지 않는 자와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수인 저들은 소수인 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못하여 저들에게 비난받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사회공헌도가 훨씬 더 높습니다. 좋은 일 많이 한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를 준 것 없이 미워하는 것은 저들이 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아 하나님과 그 백성들이 괜히 미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속국가며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노골적인 핍박은 없어도 전도를 해보면 기독교와 기독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소수이지만 저들은 다수라서 우리를 핍박하는데, 이런 현상은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임으로 우리가 세상의 핍박과 환란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딤후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사람을 세상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건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작업하고 공작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다가 포기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핍박과 환난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환난 자체는 괴롭고 힘듭니다. 그러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로마서5:3절 말씀처럼 환란이 소망을 더 깊게 해주기 때문에 고난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계시록7:14절에서도 큰 환난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을 볼 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환란은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할 때 다가오는 시련을 힘들게만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극복하십시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왕궁에서 편히 살 수 있었지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말씀합니다.(히11:24-26) 그러면 혹자는 모세가 변태적인 매조키스트(masochist)라서 고난을 즐기는 것 아니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그는 왕자의 삶이 육체적으로는 좋겠지만 그것이 죄악의 나날이었고, 거기에는 영원한 심판과 멸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포기하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나라백성과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더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애굽의 죄악의 낙입니까? 아니면 고난이 있어도 천국의 희락입니까? 결정은 여러분들이 하시고, 그 책임도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부디 현명한 결단으로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도는 고난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20절)
본문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들어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아멘.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가사상태에 빠져 성 밖으로 버림을 받았는데 다시 살아나 성으로 들어갔다가 이튼 날 더베로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만큼 극도의 적대감을 보였던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갔을까요?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죽음도 각오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때문이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전도자의 일생을 책임져주신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악마의 소굴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저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을 신으로 숭배하려던 자들인데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의 말에 현혹되어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하여 돌로 쳐 바울이 죽음에 이르자 성 밖으로 버렸으니 세상에 이런 황망한 일이 어디있단 말입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 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 저도 여러분도 무서워서 들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의 그런 마음을 알고 엡3:13절에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여러 환란 당하는 것이 너희에게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 허무함과 배신감 분노 이런 것보다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보다는 자기의 느낌이나 감정, 아픔만을 중요시하여 하나님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일어서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가 힘을 잃지 않고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돌에 맞아 가사상태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자 다시 일어나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주의 일을 할 때나, 세상에서 실패와 좌절의 때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시37:23-24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세벨이 죽이려고 추격해오자 절망하여 죽여 달라고 하소연을 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음식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왕상19:7)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또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 머물 때도 하나님은 그 가뭄 중에도 까마귀를 동원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함으로 그를 돌보시고 새로운 사역지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나라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이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서면 됩니다. 옛날 홍수환 선수가 1973년 7/3일 남아공 더반에서 WBA세계밴턴급타이틀 전에서 4번 다운당하고 15회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당시 이억만리 남아공에 고기잡이하러 와 있던 20여명의 원양어선 선원들만이 응원하는 가운데,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선수가 4전5기의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고후4: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살다보면 고난도 만나고 어려움도 만나고, 신앙 때문에 애매한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고난이 올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서 다시 일어서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홍수환 선수처럼 최후승리를 거두고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딤후4:7-8)
최후승리자가 되어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영광의 반열에 세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