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168)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147) - 디모데전서 강론(9)
디모데전서 강론(9) - 5장 17절 ~ 6장 21절
사도들의 서신서는 율법과 선지서에서 예언했던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에베소에는 각 가정 성회 마다 섬기는 장로와 말씀 가르치는 장로가 있었다. 그런 장로를 존귀하게 대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연보의 도움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 중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율법과 선지서를 연구하면서 예수가 메시아이며 예레미아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베드로에게 가서 15일을 함께 살았다. 자신이 깨달은 내용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에게 간 것이다. 우리는 율법서와 선지서에서 예언했던 바가 사도 바울에게 정확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서신서는 그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실제로 일어난 구원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아들이지 말 되, 죄를 범한 것이 밝혀지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하고 그로 인해 나머지 사람도 두려움을 갖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클레로스의 내적 성장을 위해 책망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잘잘못을 가리고 책망할 사람과 칭찬할 사람을 가리라는 것이다. 서로 물고 먹는 문제의 본질에 주목을 해야지 어떤 선입관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예. 민중신학, 해방신학, 휴머니즘 교리의 오류) 싸르크스에 휘둘리는 사람에게 직분을 맡기지 말고 검증하고 맡기라고 권면한다.
종교적 본성에서 나오는 타부나(예. 중국 사람들에게는 아편, 한국 사람들에게는 술, 담배) 금욕적 접근을 피하고 병 치료를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먹으라고 디모데에게 권면하고 있다.
사람들의 죄와 선행도 결국 다 드러나니 신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분석과 판단과 해법 제시 - ②종과 상전의 관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노예 신분의 형제자매들이 그들의 상전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판단과 언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외부인이 상전일 때는 충성되게 종노릇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가르침이 모욕을 당한다는 것이다. 세상 노예들이 자기 주인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이며, 상전이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노예 신분의 형제자매들이 상전에게 충성하라고 하는 이유는 클레로스를 위해서 세상 상전에게 충성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가르침이 모욕을 받게 되면 클레로스가 성장하고 확산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자신의 상전이 성회의 형제인 경우는 혜택을 받게 되는 사람이 그 형제이니 더욱 충성하라는 것이다. 즉 이 경우도 클레로스를 위해서 충성하라는 것이다.
즉 어떤 경우라도 충성스러운 노예가 되라는 것이다. 그래야 클레로스가 성장하고 확산하기 때문이다.
클레로노모스들에게는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것이 소망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노예이며 형제자매들 서로에게 노예가 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와 나를 보호하고 세우기 위해 어떤 판단과 분석과 실천을 해야 하는가의 틀에서 절대로 못 벗어난다. 사고의 주체가 "나"(이기적 인간) 또는 "공동체"(공동체적 인간) 또는 "타인"(이타적 인간)이다. 그러나 클레로노모스들은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을 기준으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실천한다. 사고의 중심이 열린 공동체로서의 "우리" 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이다.
싸우는 자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원리들과 경건한 삶에 대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토론과 논쟁에만 병적으로 집착을 하는 사람은 시기와 말다툼과 비방과 악한 생각과 결국 분쟁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가지고 논쟁하고 충돌하고 싸우지만 진리가 관심이 아니라 자기가 올바른 주장을 해서 인정을 받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자기 배(코일리아:빈 곳)만 섬기는 자들이다.(권력의지, 인정욕구) 그런 정상적인 자들은 반드시 투쟁을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마귀의 자녀들은 자기를 보호하고 세우기 위해서 서로 물고 먹는 싸움판이 벌어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인가에 관심을 갖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들을 위해서 서로 의논한다. 따라서 싸우는 자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은 자들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런 자들과는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실 때까지 일단 헤어지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분석과 판단과 해법 제시 - ③재물의 사용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과 함께하면 경건은 그 자체로 큰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호하고 세우는 데 부족함이 있어서 만족을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이란 나는 빈 곳(코일리아)이 없다는 것이다. 빈 곳이 없는 사람이 경건한 삶이 가능하지는데 그 경건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삶이다. 사도 바울이 표현한 일체의 비결이다. 나에게는 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자기 코일리아를 채우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비움의 영성이나 맨발의 영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만족하고 없으면 구하라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고 클레로스의 성장과확산을 위해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빈이나 무소유나 달관이나 금욕이 아니다. 세상에서 부유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죽음의 공포나 결핍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빈 곳이 채워지지 않아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대 없이 사는 훈련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의 훈련이다. 그러나 때가 되어 사명을 감당할 때는 주머니를 돈으로 채우라고 말씀하셨다. 돈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답은 공포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채워진 삶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이 가나안 복지다. 자기 재물로 형제자매들과 행복하게 사는 삶을 이루라는 것이다.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하나 된 공동체, 하나 됨이 답이다. 형제자매와 하나 된 행복한 관계를 만드는데 그 재물이 쓰여지는 게 답이라는 것이다. 그 때 재물은 귀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을 힘을 다해 재물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클레로스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도둑이 든다, 오직 보물을 클레로스에 쌓아 두라, 하나 된 너희들의 마음도 클레로스에 있다고(마6:19-21)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다.
클레로스가 현실적인 답인 이유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권하기를 이런 것들을 피하고 오직 하나 됨을 추구하며 싸르크스와 의 선한 씨름에 열심을 다하고 영원한 생명을 굳게 붙들라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 됨을 소망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됨이다.
클레로노모스들이라고 해서 죽음의 형벌과 결핍의 형벌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초월하고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해결은 베품과 나눔으로써 본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것을 탐내지 않기 때문에 해결되는 것이며 나의 기쁨이요 월계관인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느니 차라리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진 신실한 자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해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죽음이 끝이 아니고 완전한 축복, 완전한 클레로스로 가는 문이다. 그 때까지 잠자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로스는 실제적으로 유일한 답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사도들에게서 성취된 답이다.
하나가 되는 것이 존재의 이유가 된 사도 공동체에서 오고 간 편지를 자기를 보호하고 세우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자들이 올바로 독해하고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저들의 왜곡된 시각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의 심정, 사고, 논리가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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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기도는 한금옥 자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