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0년에 작성되었으나
그 뒤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ㅡ 조선의 궁궐을 돌아보며 ㅡ
고구려 평양성이나 국내성 환도성은 남아 있어도 고구려의 궁궐은 없다
백제의 웅진성이나 사비성은 남아 있어도 백제의 궁궐은 찿아 볼 수가 없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신라에도 반월성은 있어도
신라의 궁궐이었던 "금성"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조선에 와서야 겨우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궁궐을 만날 수 있다
코끼리가 있는 창경궁
케이블카가 다니는 창경궁
일제는 한나라의 궁궐인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만들었고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께서 시해 당하신 건청궁 곤령합(사진첨부 2024년 2월 촬영)
경복궁을 공원으로 만들었으며
일인 낭인을 시켜 이곳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경희궁 지하벙커
또한 한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라는
경희궁을 헐어 길을 만들고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만들고
전쟁 막바지인 1943년에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지하벙커를 만드는 등 한 나라의 궁궐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원래 경복궁은 7200칸으로 330동의 건물이 있던 광활한 궁궐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단 36동의 건물만이 남았고 원래 크기의 10%만이 남게 되었다.
경희궁 지하벙커
우리나라 궁궐은 남북한 통틀어 "한양"뿐이다
그런데 왜이리 허무감과 자괴감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가
500백년 역사의 빈껍데기인 궁궐은 여기 있는데 "그 주인은 어디 있는가"
이 나라의 왕통을 끊어 놓은 일본은 자손만대로 대를 이어 천황을 부르짖으며
충성을 맹세하는데................
문익환선생이 살아 생전에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1909년"에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것입니다
2001년 6월24일 궁궐답사를 마치고
<고종황제 가족사진>
왼쪽부터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 순종,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고종의 셋째아들 영친왕
고종,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첫째 아들 이건
연미복 입은 고종 황제
덕혜옹주의 어머니인 귀인 양씨(1917년경)
덕혜옹주 돌사진
1912년 5월 25일, 덕수궁(德壽宮)에서는 태어나다
고종 황제가 차를 즐기고 음악을 듣던 덕수궁내에 있는 <정관헌>
덕수궁(경운궁)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덕혜의 출산 이후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공주 ㅡ덕혜옹주
덕혜옹주는 고종이 60이 넘은 나이에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이 사이에
얻은 금지옥엽의 막내딸이자 외동딸로 1912년에 태어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고종에게는 순종제를 비롯하여 의친왕, 영친왕의 세 아들이 있었고
딸이 4명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외동딸이었다
고종은 즉조당에 유치원까지 만들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또한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21년 옹주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충무로의 일출소학교에 다니며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생모 양씨의 장례식에서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공주 ㅡ덕혜옹주 일본 강제 유학길을 떠나다
대마도 이즈하라항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의 여고시절
고종은 아들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황족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옹주를 한국인과 서둘러 약혼시키려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 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했다 고종 사망 이후 조선의 상징이 된 옹주에 대해 일제는
철저히 일본의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도쿄 유학의 명이 떨어졌다.
아예 옹주를 조선인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일제의 의도였다
아버지 고종 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일본에 끌려가 냉대와 감시속에 10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일본 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를 다녔지만 자신이 조국이 조선이라 늘 무시당한다
일본인 학생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덕혜옹주는 독살의 위헙을 감지했기에 늘 보온병에다 끓인 물을 가지고 다녔다
일본학생이 엎질러버리면 그날은 물을 먹지 안했고 한다
또 집단 구타를 해도 살려달라고 비명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 오빠(순종)처럼 독을 먹다 죽기 싫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일본 학습원 동료의 말)
이곳은 조선통신사들이 올 때마다 거쳐 가던 곳으로
'조선통신사 막부 접우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가네이시 성터
가네이시 성은 임진왜란 때 축성된 시미즈 산성의 기슭에
위치한 평성으로 스시마 후추 번주 소 가문의 거성이다
기네이시노야카타(金石屋形)로 불리는 거관이지만,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근세 성곽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가네이시 성터
이즈하라에는 청수산성이라 불리는 외성이 있고, 금석성이라 불리는 내성이 있었다
이곳이 대마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
대한제국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결혼한 뒤
우리 동포들이 자금을 거둬 세운 빗돌이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는 처음 팔번궁 앞 지금의 서일본은행 자리에 있었으나 1955년 종무지와
이혼 후 이를 쓰러트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취항 후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이 자리에 다시 되세웠다
12살 어린 나이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 왕실의 핏줄을 끊어 버리기 위한
일제의 계략에 의해 19살에 일본 황족의 혈통이 아닌 일개 대마도 번주의 양아들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32년에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귀인 복녕당 양씨)와 떨어져 일본에 끌려가 망국의 공주로써 고난을
당하고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한 이후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1947년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남편이 백작의 지위를 잃었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외동딸이었던 정혜도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어머니의 정신병과
감금,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출생경력으로 일본 황실에서의 따돌림과 친구들의 이지메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긴채 일본의 남알프스 지역에서 실종이 되었다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고국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그녀를 찿은건 해방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김을한이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 겨울이었는데 여둡고 차가운 방에 맨발이었다고 한다
김을한은 덕혜옹주 귀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승만정부는 귀국을 거부 하였다
1961년 박정희에 의해 귀국이 승인되고 1962년 덕혜옹주는 14세 때 인질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51세가 돼서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창덕궁 낙선재(昌德宮樂善齋)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는 귀국한 시누이 덕혜옹주를 낙선재에서 맞았다
조선의 마지막 ㅡ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을 지켰던 이공재씨는 옹주가 귀국하고 10여년이 지난 후
옹주의 옛 남편 소오 타케유키가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당신같은 사람은 일절 면회를 허용하지
않으니까...돌아가시오." 거절했단다.
소오 타케유키는 쓰시마 만송원에서 1985년 향년 77세로 사망한다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8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유해는 경기 남양주시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다
덕혜옹주의 묘
경기도 남양주 홍유릉의 아버지 고종황제의 뒤에 쓸쓸히 안장되었다
ㅡ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ㅡ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우리나라에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책은 소설 책 딱 하나다.
그나마 평전이 하나 있는데 이건 혼마 야스코라는 일본여류작가의 것이다.
그녀가 쓴 [덕혜희-이씨 조선최후의 왕녀]는 가장 완벽한 참고자료였다
한글로도 번역되지 않은 그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한 순간,
나는 참 많이 부끄러웠다. 혼마 야스코 선생이 쓴 헌사 때문이었다.
"이 책을 헌증하오니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책은 덕혜옹주의 생애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일본인이 그가 책을 써서 우리 나라의 여러 도서관에 기증했던 것이다.
- 권비영 장편소설 덕혜옹주 中
덕수궁(경운궁)(德壽宮)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가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요소를 가미하여 지어진 반면,
이보다 먼저 쓰여진 일본인 혼마 야스코의 덕혜옹주는 소설이 아닌 역사/인물로
분류되는 덕혜옹주라는 한 여인의 일대기를 그려낸 비소설이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운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살다간 그분이 우리의 기억에서 가물거릴 만큼 잊혀져 갈 때
우리보다 먼저 일본의 여류작가 혼마 야스코가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헤옹주>라는
책을 발간하고 또 그 책을 참고자료로 해서 우리나라 작가에 의해서 덕헤옹주라는 책이
발간되자 일본 작가가 표절시비 논란을 제기했다는 것이 나는 부끄러울 뿐이다
무언가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는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창덕궁 낙선재(昌德宮樂善齋)
역사(歷史)란 ‘밟을 역歷’과‘ 사관 사史’가 합쳐진 것이다.
단재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이 한마디에는 이 민족을 꾸짓는
강력한 질타의 소리가 배어 있다 .
중국 한족은 도끼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자르고,
일본은 그 줄기를 칼로 무너트렸다.
또 일부 종교인들은 단군 역사를 신화니 뭐니 해서 역사의 눈을 뽑아 버렸다.
그건 조선의 혼을 뽑은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단군 이전의 배달 역사, 환웅 역사의 뿌리를 싹도 안 남기고
완전히 뽑아 버렸다.
바로 그것이 이 조선의 민족혼을 뿌리 뽑는 첫 번째 정책이었다
대마도 덕혜옹주 결혼 봉축기념비
첫댓글 가슴깊이 새겨야 할 주옥같은 말씀들입니다
단재선생의 역사 인식을 요즘 위정자들이나 학생들이 백분의 일이라도 알고있는지~
님의 말씀에 절대공감하며
감사말씀 드립니다~
부족한 글인데
과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얼마전에 덕혜옹주 책을읽었 습니다.
이글또한 참 잘읽구갑니다.
아주 감명깊게 잘 감상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히려 제가
고맙습니다
김연민님의
공감된 역사에[
제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