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도내 곳곳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사건을 마무리하면서 51년 2월 산청·함양·거창에서 국국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1,500여명의 양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한 만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거창양민학살’로만 알려져 온 이 사건은 지난 95년 유족들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국회에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전국의 양민학살 중 유일하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단행본 책자도 몇권이 나와 있고,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과 정부의 조사에 의해 상당부분 진상이 드러나 있으므로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경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거창사건의 진상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당시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국언론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진상규명의 계기를 마련한 을 떠올리게 한다.
51년 당시 거창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 사건을 폭로한 이후 구성된 국회 특별조사단은 4월 6일 임시수도 부산을 출발, 거창 현지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계엄 민사부장이던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나는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국군 병력을 배치해 총기난사를 저지르도록 일을 꾸몄다. 조사단은 총소리에 놀라 조사를 포기한 채 되돌아가고 만다.
그후 4월 24일 이승만은 거창사건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공비협력자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었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진실은 덮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이승만 정권의 은폐기도는 의외로 외국언론에 의해 벽에 부닥치고 만다.
이 무렵 외국언론들은 거창사건을 대서특필해댔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물론 파키스탄의 신문에까지 오르내린 것이다.
현장취재가 봉쇄됐기 때문에 어떤 외국신문에서는 희생자 수가 5만명이라는 오보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승만은 이런 외국언론의 끈질긴 보도에 굴복,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내무장관을 동시에 해임하고, 사건발생 5개월만에 책임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은 오익경과 한동석, 김종원 등 책임자들을 1년만에 특사로 풀어주고 군·경 요직에 다시 등용했다. 사건 해결과정에서 유족은 철저히 배제됐다. 사건을 해결하려 한 게 아니라 적당히 덮으려 한 것이다.
유족들은 4·19직후 다시 한번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이후에도 끈질기에 진상규명 요구를 해 온 결과 마침내 95년 전국의 양민학살사건 중 처음으로 특별법을 쟁취하게 됐다.
이같은 거창사건의 교훈은 ‘역사의 진실은 끝내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이다.
50년만에 전국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의 진실을 또다시 적당히 덮으려 한다면 현 정권도 끝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20세기 한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범죄의 역사적 배경을 짚어보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과제를 모색하는 토론회가 8일 오후 7시 마산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열린다.
경남정신대문제 대책을 위한 시민연대모임(상임대표 김현주) 주최로 열리는 이번 토론회에서 발표될 전세중씨(41·마창역사연구회원)의 발제문을 요약,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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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학살의 역사, 시민운동이 해결하자
-전세중(마창역사연구회 회원.대중도서관운동가)
[전쟁범죄의 상흔]
21세기가 20일정도 남았는데 아직도 우리는 20세기 전쟁범죄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의하여 강요된 일본군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이승만 정권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 그 조직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살당한 보도연맹관련자들, 전쟁 중 빨갱이와 내통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미군과 국군에 학살당한 죄없는 양민들, 그리고 피해자이면서도 억울함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하고 50여년을 살아온 학살자 가족들 등 전쟁의 상흔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이런 비극은 일제 식민지 통치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부르스 커밍스 같은 학자는 그래서 한국의 비극은 1920년대이후 한반도 내에 친일세력을 본격적으로 양성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일제는 우익 진영 속에 이광수·김성수·장택상 같은 친일세력을 만들고, 좌익 진영 속에 ‘대화숙’이라는 전향자 단체를 만들어 민족해방운동세력 내에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
그래서 해방당시 우익 지식인의 대부분은 친일파가 되었으며, 국내 좌익 지식인도 80%정도가 대화숙이라는 전향자 단체에 가입하였다.
해방당시까지 변절하지 않고 항일투쟁을 한 주요한 정치세력은 김구의 상해임시정부세력과 김일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세력, 그리고 여운형의 국내 건국동맹세력 정도이다.
김구와 여운형은 대중적 영향력을 컸으나 국내의 조직적 기반이 취약했으며, 김일성은 북한에서만 대중적 영향력과 조직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좌익계의 친일세력]
우익 내의 친일세력에 대한 연구는 많이 되어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좌익내 친일세력에 관한 연구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병주의 실록소설 <소설 남로당>에는 미군이 진주할 당시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사람 중에서 전향한 사람의 명단과 신상을 넘겨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좌익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병주에 의하면 박헌영 계열의 핵심인 이승엽·이강국·안영달 등 남로당 중앙위원의 대부분은 전향 경험이 있고, 그 약점이 미군에게 노출되어 남한 내 좌익은 처음부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
다만 남로당 주요간부 중 김삼룡 정도만이 전향하지 않고 해방 당시까지 감옥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최근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박정희도 남로당 내의 대표적인 친일경력자이다.
또한 남로당의 2인자였던 이승엽은 인천에서 일제의 식량공출을 강제하는 기관의 이사로 복무하는 등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친일파사전에 기록되기고 하였다.
이렇게 친일 경력을 가진 인물들은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를 배경으로 각각 이승만과 박헌영을 정점으로 친미세력과 친소세력으로 결집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떳떳치 못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적 이익보다는 미·소에 기대어 극단적인 좌우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세력은 우파 민족주의자인 김구세력을 좌익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매도했고, 박헌영 세력은 민족통일과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를 세우려 노력한 좌익 내 여운형 계열을 우경주의자로 고립시켰다.
[매카시즘이 낳은 비극]
김구와 여운형의 피살은 남한 내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단독정부를 지향한 이승만 세력과 통일을 지향한 반이승만세력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에 미군정은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이승만의 안정적 집권을 위하여 우익 친일세력을 지원하면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과 같은 반공단체를 동원하여 통일을 열망하는 대중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특히 이승만 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서 김구로 대표되는 자주적이며 통일된 국가 수립을 열망하는 대중들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했다. 한국판 매카시즘 선풍이었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고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무조건 죽였다.
미군도 한국인들은 빨갱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양민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비극은 민족내부의 좌우익 투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에 충성을 하던 친일세력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 장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외세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기준으로 죄없이 죽은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해 빨갱이라서 죽이거나 탄압을 해도 좋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젖어 왔던 것이다.
지금도 빨갱이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약간의 잘못은 묻어두어야 한다는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민족화해모임 만들자]
따라서 외세가 뿌려놓은 좌익·우익이라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과거 학살을 볼 것이 아니라 반민족행위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 누가 누구를 죽였으니까 어떻게 하자는 것보다는 모두가 일제 식민지 통치의 희생자라는 관점에서 화해하고 참회하는 민족적 모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총부리를 겨누던 사람들의 시대는 20세기로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인인 21세기가 바로 내일이다. 노근리 학살에 참여한 미군과 피해자 가족들도 화해하는 마당에 우리 민족간 화해를 못한대서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 그 모임이 △좌우익 친일행위자의 해방 후 활동 조사를 통한 학살의 역사적 원인 규명 △민간차원의 일본군 종군 위안부와 한반도 양민학살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와 자료발간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복권(위령제 등) △미국과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유엔인권위원회에 문제 제기 △미군과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미·일의 사죄와 보상 요구 △베트남 전쟁당시 자행한 양민학살에 대한 참회운동 등의 일을 했으면 한다.
21세기에는 지난 세월의 적들을 역사의 무덤 속에 매장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가 있는 정의의 세기가 될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베트남에서 자행한 양민학살만행에 대해서도 참회·사죄하여 정의가 살아 숨쉬는 민족임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래야 미국과 일본에 사죄와 보상을 떳떳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시민운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