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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묵상글 들 (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 내 속에 담긴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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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 속에 담긴 것 / 2021.10.12 04:43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사이가 손 닦는 것을 얘기하니 주님은 속 얘기를 하십니다.
겉을 얘기하니 속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속 얘기로 겉 얘기를 한판 되치기 하시는 것입니다.
씨름에 되치기 기술이 있는데 공격을 되쳐서 한판승하는 것입니다.
이 <한판 되치기> 예가 주님께는 참으로 많습니다.
어쩌면 복음의 거의 모든 것이 이런 되치기 얘기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바리사이들이 시비하니까
안식일에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옳냐고 되치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자
의사가 병자와 건강한 사람 누구에게 필요하냐는 말로 되치십니다.
사실 겉 얘기를 하는데 속 얘기를 하면
겉 얘기를 하던 사람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겉의 정결과 속의 정결을 얘기할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내면을 살피고 가꾸고 꾸미는 사람은 외면은 상대적으로 덜 가꾸고
더 나아가 자신의 위선을 부끄러워하고 아파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고 제 얘기입니다.
지지난주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옛날 저는 일기를 매일 썼는데 대부분 저의 내면을 성찰하는 내용이었지요.
그러던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일기까지 쓰지 않자 내면 성찰이
그만큼 줄어들었고 당연히 위선덩어리가 되었는데 더 심각한 문제는
위선을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천연덕스러운 점입니다.
그렇지만 나이 더 먹은 지금이 전보다 나은 점도 있습니다.
전처럼 저를 비하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긍정하는 점이나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더라도 그 관점이 조금 달라진 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 내면이 욕망으로 가득한 것보다
사랑이 충만하지 않음을 더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고,
사랑에 욕망이 얼마만큼 불순물로 있느냐 성찰하는 점입니다.
몸에 안 좋은 것을 가려 먹기보다는
몸에 좋은 것을 먹으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다 가려 먹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재로서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몸에 좋은 것을 챙기는 수준이라는 거지요.
아무튼 오늘 주님은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행하라고,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시는데
내 속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욕망 중에서 내 속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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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을 뿐 아니라,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에 그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란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 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문제 삼으십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동시에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만드신 우리의 속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렇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물을 담아주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7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깨끗해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곧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곧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이 깨끗해지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바로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입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그 자체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 다.”(루카 11,4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의 나눔으로 비우게 허소서!
사랑만이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져 당신의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그 뜻을 퍼주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게 하소서.
하여, 그 깨끗함으로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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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예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깨끗함은 겉모양을 깨끗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즉 자선을 베풀게 됨으로써 깨끗해집니다.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성베드로 솔로그는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담겨 있는 탐욕과 사악은 자선을 통해서 정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정결례는 바로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사악함을 씻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어 마음을 거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외적인 더러움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거나 마시는 그릇을 깨끗이 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외적인 깨끗함보다는 내면의 정결이 더 소중합니다.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행위에서 정화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깨끗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외적 정결함을 강조하고 중요시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잘 가꾸지 못했습니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들, 안 보이는 속은 내버려 두고 겉꾸미는 사람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그릇을 닦는 일보다 마음을 닦는 일이 우선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혼자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을 지키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주 하느님은 속마음을 들여 다 보시니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선을 숨겨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마태6,4).
얼굴도 이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짱, 몸짱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마음짱을 추구합니다. 마음을 잘 가꾸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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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 방문을 앞두고 그 동안의 선교 활동 과정에서 알게 된 신자들이 로마에 살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고리로 다른 신자들에게도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집필동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신으로 숭상하는 황제나 짐승 형상 앞에 경배하고 있었고, 이를 거부하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황제는 로마 교외의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바에서 밤에 몰래 모여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거나, 반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퍼뜨렸습니다. 우상숭배 풍조가 횡횡하고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악소문이 퍼져 있던 상황에서 황제는 신자들을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로 내어주거나 검투사들의 사냥감으로 죽이는 온갖 사회적 불의는 물론 하느님을 모독하는 등 종교적으로 불경스러운 짓도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로마 1,16)이라는 말로 격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세상에서는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기 마련이고, 이들은 노동자로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을 위해 노동과 노동자들을 천시하는 사회 구조를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벨기에의 까르뎅 신부는 청년 노동자들이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적으로 살 수 있도록 1925년에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조직했습니다. 급속하게 산업화되어 가던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도 이 운동이 도입되어 많은 신자 청년 노동자들이 복음을 읽고 기도하며 노동조합 운동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재 정부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로 사는 것도, 노동자 운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자각한 신자들의 활동도 생겨났습니다. 훗날 추기경으로 서임된 까르뎅은 젊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격려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작업대가 성찬을 집전하는 제대입니다. 여러분의 일이 거룩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는 빛에서만이 아니라 어둠에서도 옵니다. 하느님과 그 뜻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시대 사조는 아무리 대세라 하더라도 좇아갈 것이 아니라 몰아내야 하는 악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함께 우리도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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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책장을 보다가 옛날 신학생 때 읽었던 책이 보였습니다. 당시에 상당히 어렵게 느꼈던 책으로 친구들과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신부가 되면 이런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려운 신학책이 과연 신부가 되어서는 전혀 소용이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을 것 같지만 분명히 소용이 있었습니다. 아니 꼭 필요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나 삶 안에 하나씩 더해지면서 자신의 영성을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학교 졸업하면 “공부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공부와 깊이 있는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영성을 성장시켜서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더 쉽게 선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말과 행동이 미래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노력과 열정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공부하는 것은 당연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그 모든 지식을 다듬으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래도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이런 꾸짖음이 과연 예의에 맞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으로만 그럴싸한 그들의 위선을 그냥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겉만 깨끗한 것이 아니라, 속도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자선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자선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의로운 행동이 아닌, 남은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그래서 하느님만이 알아줄 수 있는 자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유만 계속해서 만들어갑니다. 시간이 없어서, 능력이 되지 않아서, 여유가 되지 않아서, 남들도 하지 않아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계속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펼치십니다. 그런데 자신의 작은 사랑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의 목록만을 늘릴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로마 1,21 참조). 부정적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이유를 만들어가서 적극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달리 칭찬받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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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복음을 전하라.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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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의 실험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Solomon Asch)는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부화뇌동하는 존재이며,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려 하는 존재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래서 1952년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한 장의 카드에는 직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고, 또 다른 카드에는 세 개의 직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직선 중 하나는 먼젓번 카드에 그려진 직선과 길이가 같고, 나머지 두 개는 전혀 다른 길이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애시는 피험자에게 직선이 하나 그려진 카드와 세 개 그려진 카드를 차례로 보여주고, 두 번째 카드에 그려진 세 개의 직선 중에서 첫 번째 카드의 직선과 길이가 같은 선을 골라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피험자 안에는 애시의 연구진이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도적으로 정답이 아닌 오답을 큰 소리로 답하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험자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을까요?
피험자의 절반 가까이는 눈에 빤히 보이는 정답 대신 가짜 피험자들이 우기는 직선을 답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생각나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영향을 미칠 나의 말과 행동을 더 신경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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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욕실 들어가는 입구에 옷걸이가 있었습니다. 큰 불편이 없어서 2년 동안 그렇게 지냈습니다. 옷걸이를 책상과 창문 사이의 벽 쪽으로 옮겨 보았습니다. 욕실 들어가는 입구가 넓어졌고, 마음도 편해졌습니다. 서랍에는 약을 담아든 봉투가 있었습니다. ‘소화제, 진통제, 소염제, 지사제, 밴드, 파스, 붕대’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끔 약을 찾으려면 복잡했습니다. 날을 잡아서 정리를 했더니 서랍 안이 깔끔해 졌습니다. 냉장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냉동실에 있는 것들은 ‘유효기간’을 확인하고 정리할 것들은 정리해 주어야 합니다. 컴퓨터도 가끔씩 정리를 해 주어야 합니다. 메일은 확인하고 불필요 한 것들은 삭제해야 합니다. 파일은 목적에 맞는 장소에 저장해야 합니다. ‘신문사 원고, 강의 원고, 강론, 부르클린 성당 자료’는 각자의 자리에 맞게 저장해야 합니다. 정리가 안 된 자료는 시간이 지나면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가끔씩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백신 프로그램을 사용해 주어야 합니다. 정리되지 않는 정보와 자료는 자칫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몇 번씩 지난날의 삶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정통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잡아 가두는 것이 사명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놀라운 음성을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었고 바오로 사도는 그때부터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바리사이파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였습니다. 판단을 내려야 할 때도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였습니다. 체념하고 싶을 때도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였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을 때도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정리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이 들어왔고 그 악 때문에 세상은 오염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쟁, 폭력, 죄, 죽음, 갈등, 분열이 들어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이유는 죄, 죽음, 악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구원은 민족의 혈통과는 상관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원칙을 가는 곳마다 전하였습니다. 이 원칙을 어기려하면 사도들일지라도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2000년 교회를 지켜온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유혹의 바람이 불면, 욕망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 교회를 지켜온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으로는 친절한척하고, 웃으면서 뒤로는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남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욕심 때문에 형제와 다투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과 격려의 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따뜻한 말, 친절한 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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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의 병病
- 회개와 겸손, 지혜가 약藥이다 -
-“생각없이
즐겁게 뛰노는
반려견들
사람이
생각없이
그렇게 살 순 없다.”-
수도형제들과 두 봉사자매의 사랑의 돌봄을 받는 수도원 반려견들을 보며 엊그제 써놨던 글입니다. 사람이 위대함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없이 삶의 의미도 묻지 않고 그저 본능대로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하며 그냥 살아간다면 반려견들의 동물과 비슷해지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한량없는 보물
지혜를 얻은 이들은 그 가르침이 주는 선물들의 추천으로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
언뜻 펼쳤을 때 한 눈에 들어 온 지혜서 말씀이 참 반가웠습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육의 본능대로 탐욕에 눈이 가려 살아가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의외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성서는 “착하라!”고 말하지 않고 “지혜로워라!”라고 말합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합니다. 지혜를 얻은 이들은 그 가르침이 주는 선물들의 추천으로 하느님의 벗이 됩니다. ‘하느님의 벗!’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인지요! 성서의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또 교회의 성인들이야말로 지혜로운 하느님의 벗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늘 강조하는 무지의 병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로 인한 탐욕, 분노, 질투, 어리석음 등 끝이 없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입니다. 참 똑똑한듯하나 자기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이들이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부단한 회개와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겸손과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삶은 회개의 여정이요 회개와 더불어 날로 자기를 알아가며 주님을 닮아 겸손하고 온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우리 선택의 영역이요 하느님도 힘껏 은총으로 도와주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는 내용입니다. 지식과 함께 가는 지혜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공부 많이 하여 지식은 많아도 지혜가 없는, 인색하고 욕심많은 무지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탐욕에 눈멀어 그 똑똑한 이들이 어리석게도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옛 우리 어머니들은 배움은 짧아 지식은 부족했어도 삶의 지혜는 빛났습니다. 그 많은 구도자들이 사막의 수도승을 찾았던 목적도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은 바리사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지엽말단의 것들에 집착하는 표리부동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허영의 실속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선의 수행으로 탐욕을 비워낼 때 속은 물론 겉도 저절로 깨끗해집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섬김과 나눔의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내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속의 마음이 깨끗하면 겉은 저절로 겉도 깨끗해지니 전혀 걱정할 바 아닙니다. 60여년전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담임이었던 최종훈 영어선생님의 “옷보다, 몸이 깨끗하고, 몸보다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라는 훈화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참으로 부단한 사랑 실천의 자기 비움으로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 지혜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영역입니다. 참으로 의식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나누는 분투의 노력을, 사랑을 선택할 때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비로소 지혜로운 하느님의 벗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바오로 사도 역시 무지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참으로 각자 무지의 병이나 죄나 악은 제탓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힘은 복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를 무지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의 힘, 하느님의 힘은 바로 지혜의 힘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복음의 빛, 지혜의 빛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사랑의 우정관계가 깊어질수록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하고 온유한 삶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열화와 같은 회개의 촉구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노예되어 살아가는 똑똑한 바보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예나 이제나 무지한 인간의 탐욕스런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인것 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탓이 아니 우리의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불행이 대부분입니다. 지혜의 눈이 열릴 때 저절로 화답송의 시편도 고백할 것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시편19,2-3)
정말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하여 선택하여야 할 주님이요 지혜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지혜를 사랑할 때, 말씀을 사랑할 때 저절로 회개와 더불어 주님을 닮아 겸손과 온유, 지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무지의 병을 조금씩 점차 치유해주시고 당신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해주십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무욕의 지혜요 행복이옵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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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예수님을 초대한 어떤 바리사이가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랍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율법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조상들의 전통'에 속합니다. 이 전통은 구약의 율법을 풀이한 해설과 세세한 행동 지침을 전체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라고 하지요.
식사 전후에 손을 씻는 것은 옛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에서 예식을 행하기 전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이 손을 씻던 것을, 신심 깊은 바리사이들이 일상생활에 적용하였고, 율법과 전통 수호에 열렬한 이들이 이를 받아들여서 널리 퍼진 듯합니다.
바리사리들의 심중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손을 씻는 것이 하느님 앞에 정결한 존재가 되기 위한 충분 조건인지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십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겉과 속을 다 보시는 하느님께는 통할 리 없으니까요.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0-41)
사실 오늘의 복음 대목부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쏟아질 예수님의 불행선언이 시작되지요. 앞으로 사흘 동안 우리 역시 정신이 번쩍 들도록 듣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종교 제도 안에 공고히 자리 잡은 이들의 내면에 어떤 탐욕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지 아십니다.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것은 없습니다. 겉과 속을 다 보시는 그분께서 손만 잘 씻는다고, 예복을 잘 갖춰 입는다고, 율법의 문자만 잘 지킨다고 기꺼워 하실 거라 생각했다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아직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겁니다.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을 자기에게 편하게 편집하고는 그 앞에 껍데기로 서서 그저 신앙인이 체하는 수준일지 모르지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그조차도 대견할 일이지만, 하느님은 인격적 관계맺음은 물론 어떤 마음으로 행하는지 동기와 지향의 순결함까지 원하는 분이시니까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해법은 아주 단순합니니다. 사람들 모르게 품고 있는 명예욕, 재물에 대한 탐욕, 자기의 실제 수준보다 나은 존재인 척하는 자기우상화를 내려놓고 이미 가진 것을 나누어 존재의 내면을 깨끗이 비우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이들을 우려합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21)
하느님을 아는 이는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앎이 곧 사랑이기에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요. 하지만 영혼의 자리를 하느님 대신 욕망에 내준 이들은 허망한 생각과 악으로 기울어버린 어두운 마음으로 진리 대신 거짓을,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깁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복음 환호송)
이런 생각과 마음을 지닌 채, 손만 잘 씻는다고, 율법의 문자만 잘 수행한다고, 타인에게 우러러보이는 그럴듯한 행동을 잘 연출한다고 하느님까지 속일 수는 없지요. 하느님 앞에 겉과 속이 깨끗한 존재로 서려면 이런 생각과 마음을 먼저 행구어내야 합니다. 살아 있고 힘이 있는 쌍날칼과 같은 말씀께서 바로 그 역할을 해 주실 겁니다.
깨끗한 영혼과 순수한 마음 안에 가장 순결하시고 정결하신 주님만을 모셔들여 그분께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내면을 차지하신 그분과 어울리지 않는 탐욕과 욕정일랑 남김없이 내려놓고, 은총으로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아낌없이 나누는 여러분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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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11,4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는 바리사이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히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11,39)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척 하지만, 마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는 바리사이들, 율법의 겉(규정)은 중요시 하면서도,
율법의 본질(사랑)에 소홀했던 바리사이들의 거짓(위선)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이 지금 여기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한 꾸짖음이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은,
'또 하나의 바리사이들', 곧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랑 실천에는 인색한 이들에 대한 꾸짖음입니다.
오늘 독서인 로마서 1장 16-25절의 말씀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돈 버는 일을 그만 접고, 남은 삶 여유를 갖고 즐기면서 살고 싶다."
이분은 불자이신데, 그래서 돈 버는 일을 접고, 귀촌해서 적게 쓰고 절약하면서 자연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부부가 함께 절에도 열심히 다니면서.
그렇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이 임박해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겉과 속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결정적인 마지막 때를 위하여 겉과 속을 함께 깨끗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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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행동이 율법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어야 하는 율법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바리사이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렵고 복잡한 계명이 아닌,
일상의 계명을 왜 지키지 않으셨을까요?
그 답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태 5,17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조되는 이미지들을 보여 줍니다.
‘깨끗함과 더러움’, ‘겉과 속’, ‘탐욕과 자선’이 그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적용하는 율법은 외적인 모습에만 적용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함(바름)과 부정함은 손을 씻었는지,
잔과 접시는 깨끗한지, 먹으려고 하는
음식이 정한지 부정한지가 중요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율법은 하나의 기준만을 제시하였습니다.
‘맞고 틀림’, ‘합당과 부당’, ‘정함과 부정함’을 나누기만 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에
매일 것이 아니라, 본질을 기억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이 내면을 향하고 마음을 움직여 내 것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축복과 구원을 자동으로
가져다주는 장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제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의무, 곧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외면이 아닌
내면을 향하는 주님의 법이 지닌 본질을 잊는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리사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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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겉은 깨끗이 닦아도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예수님과 바리사이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겉으로는 깨끗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시면서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을 닦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겉’과 ‘속’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 깨끗하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겉이 깨끗해지려면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순결해야 하는데, 이 내용물은 바로 자선과 자비와 하느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거기 모인 이들이 좀 더 고결한 사람들로 만드시려고 그 순간을 이용하신다. 바리사이가 그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38절) 한다. 주님의 행동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요 예언자라고 하는 자가 전통적 습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39절)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놓인 잔과 접시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육신의 더러움뿐 아니라,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씻어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는 육체를 지으신 분이 영혼도 지으셨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씻을 때는 똑같이 씻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자선을 통해 깨끗해질 수 있다. 즉 자비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하셨다. 또한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했으며, “네 곳간에 자선을 쌓아 두어라. 그것이 너를 온갖 재앙에서 구해 주리라.”(집회 29,12) 하셨다.
자비로운 행위는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도망자를 숨겨주는 것만이 자선이 아니다. 병든 이와 갇힌 이를 찾아가고, 포로를 풀어 주고, 지친 사람의 짐을 져 주고, 눈먼 사람을 인도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길 잃은 이에게 바른길을 일러 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자선이다.
용서하는 것도 자선이고 훈육하여 바로 잡아주는 것도 자선이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그가 용서받기를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자선하는 사람이다. 용서하고 기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잘못한 자를 꾸짖고 적절한 벌과 함께 그를 바로잡아 줌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자선에는 종류가 많다. 자선을 베풀면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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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 41)
마음을
살피는 것이
삶을 살피는
깨끗함의
여정이다.
마음이 밝아지면
관계가 밝아진다.
마음을
살피는 것이
곧 믿음이다.
나눌수록
풍요롭고
비울수록
깨끗해지는
마음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삶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삶이
바로
자선의 삶이다.
지극한 마음과
지극한 자선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우리 모두를
행복한 가족이
되게한다.
자선으로
드러나는
축복의
빛깔이다.
자선의 나눔이
성장과 성숙의
삶이다.
참된 성숙은
꾸밈이나
감춤이 없다.
자신을 돕는
사람이 이웃을
도울 수 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에서
자선을 배운다.
사랑은
기적을 만들고
자선은 사랑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한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길은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자선의 길이었다.
자선의 길 위에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다.
복음은
자선을 통해
기쁘고
깨끗한
사랑을 다시
알려주신다.
모든 것을
깨끗이 하는
사랑의 힘은
언제나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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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루카 11,37-38).”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자기들과 다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어울리지도 않았고, 함께 식사하지도 않았고,
자기들 집에 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셨다는 말은,
‘식사 전의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정결예식은 바리사이들의 관습이었고, 전통이었습니다(마르 7,3-4).
예수님께서 정결예식을 행하시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놀랐다는 말은,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심하게 거부감과 반감을 느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기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초대했는데,
같은 편이 아닌 것 같아서 놀랐을 것이고,
바리사이들의 관습을 무시하신 것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놀랐다.’ 라고만 표현했지만,
아마도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비판하는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이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마음에 ‘탐욕’과 ‘사악’이 가득 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 ‘속’을 먼저 보신다는 뜻입니다.
(‘겉’과 ‘속’이 모두 심판의 대상이지만, ‘속’이 더 중요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속에 담긴 것’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하고, 속을 깨끗이 해야 하는데,
그것은 생각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고, 삶이 변화되어야 진짜 회개입니다.)
따라서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 재물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회개했다고 말한다면,
그 회개는 ‘거짓 회개’이고, ‘위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속에 담긴 것’을 하느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것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1) 자선을 베푸는 것은, 부정하게 모은 재물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자신의 탐욕과 사악에 대해서 회개하는 방법입니다.
(피해자가 어떤 특정인이라면,
당연히 그 피해자에게 먼저 돌려주고 배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피해자가 불특정 다수라면,
‘자선 실천’이 회개와 배상을 실행하는 방법이 됩니다.)
2) 자선을 베푸는 것은, 속을 깨끗이 하는 방법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앞에 깨끗한 사람으로 서고 싶다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일에 이웃을 외면하면서 이웃 사랑 실천은 전혀 하지 않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이실까?
이웃 사랑 실천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
<더 나쁜 것은 ‘탐욕과 사악으로’ 모은 재물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기 혼자 복을 받으려는 욕심으로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그것은 ‘봉헌’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도둑질한 돈을 하느님께 바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가장 깨끗한 것,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합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겉과 속을 모두 깨끗이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겉’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나는 속이 깨끗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겉’을 깨끗이 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고, 그것도 사실상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20,46-47).”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였습니다.)
‘긴 겉옷을 입는 것’과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은
겉으로만 거룩한 척 하는 것입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들에게 인사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뜻합니다.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들이 그런 자리에 앉을 권한과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누가 권하기도 전에 먼저 자기들이 가서 앉는다는 뜻입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상대로
율법 상담 같은 것을 해 주면서 아주 비싼 수수료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짓은 사제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과(루카 19,46)
같은 일이기 때문에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에 불신감을 갖지 말고, 두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지 마라.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부리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 너 자신을 들어
높이지 마라. 떨어질까 두렵다. 네 영혼에게 불명예를 자초하지 마라.
주님께서 네 비밀을 폭로하시어 회중 한가운데에서 너를 내던져 버리시리라.
네가 주님께 경외심을 갖고 나아가지 않았고, 네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집회 1,28-30).”
(‘위선’은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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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1,41)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속입니다. 겉으로 양순해 보이고 선해 보여도 교묘하게 다른 이들을 속이며 사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 영성에 대해 대단히 심오한 진리를 말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모질게 대하는 교만한 이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진정 겉과 속이 같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길을 찾아 무르익어가는 가을이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바리사이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그분을 보고 놀랍니다. 유대인이라면 으레 율법에 정해진 대로 식사 전에 돌 항아리에 담긴 물에 손을 씻고 식사 중에도 식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했기에 놀란 것은 당연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의 외적 절차를 지키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그들은 율법 준수에는 열중하면서도 일반 민중들에게 자비심을 지니지 않았고 공의롭게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고 선택받은 사람이라 여기면서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던 것이니 겉과 속이 달랐고 속은 오염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11,39) 곧 잔과 접시의 겉과 속은 하나임에도 겉만 깨끗이 닦듯 율법의 준수와 형식적인 절차를 중요시하는 것은 위선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11,41)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릇입니다. 이 그릇에 담아야 할 것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공경하고 흠숭하도록 하십시오.”(22,26)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주님의 주도권을 늘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다른 이들을 사랑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주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에 정신이 쏠리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하며 외적인 형식과 인사치레를 하며 겉치레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속살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어떤 규범을 의무적으로 지키는 것도, 무엇을 얼마나 하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순수한 지향과 사랑 가득한 마음이 없다면 기계적인 행동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 가을에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주님을 흠숭하고, 주님의 자비와 선을 담는 주님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릇을 빚었으면 합니다.
주님, 영혼 저 깊은 곳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당신 사랑의 눈을 주시고, 제 영혼의 그릇에 당신의 관대한 자비심을 부어주시어, 그 사랑으로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헤아려 모두가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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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혼의 정결예식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현현’이자 ‘육화’의 결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인간에게 보여주셨던 모습은 대체로 인간을 향한 강한 연민과 측은지심, 강력한 구원의지로 가득한 따뜻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가끔 격하게 진노하실 때가 있었으니 바로 당대 지도층 인사들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접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강생하셔서 우리 사회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시면 아마도 똑같이 반응하시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 마음의 순수성을 지속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시대 지도층 인사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정말이지 봐주기 힘든 꼴불견이 있습니다.
영혼이 조금도 담기지 않은 가식적인 인사가 그렇습니다.
마음,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적인 담화가 그렇습니다.
껍데기는 요란스럽지만 내용은 보잘 것 없는 행사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행태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것에 엄청난 강조점을 두었지만 더 중요한 내면적인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정결예식, 즉 육체를 깨끗이 씻는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당시 그 어떤 사람이든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식사 때 사용되는 그릇 역시 규정에 따라 정성들여 깨끗이 닦여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도 씻지 않으시고 식탁에 버젓이 앉는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공공연하게 정결예식을 거스른 일은 당대 일종의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 사이에서 정결예식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웃기는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작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마음을 씻는 일, 회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교무금 장부에 납부도장을 찍는 일에는 철저했지만 무고한 이웃의 고통, 가난한 이웃의 요청에는 눈을 감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삶은 주객이 전도된 삶, 정말이지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물음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외적인 정결을 전부로 여겼습니다.
몸과 접시, 밥그릇과 수저 등을 뽀득뽀득 잘 씻을 때 하느님 앞에 정결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음의 순결, 영혼과 윤리의 깨끗함에 더 관심이 크십니다.
물론 몸을 잘 씻어 건강한 위생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모든 불의와 부도덕한 일에 저항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 양심과 영혼의 창조주이시기도 합니다.
율법에 따라 손을 깨끗이 씻는 일은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릇을 깨끗이 닦는 정결예식은 그릇 속에 담길 잉여분을 가난한 이웃들과의 나눔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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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나친 의전이나 형식주의는 내적 탐욕과 사악의 열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형식주의’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형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속이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숨기기 위해 그 반작용으로 겉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을 지나치게 깨끗하게 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 안에는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형식에 신경 쓸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보좌 신부 때 랍스터를 처음으로 단 한 번 먹어보고는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 신부가 부자 동네 본당에서 제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음식 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습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은 워낙 고급스러워서 너희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돈을 모아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축일 날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나오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촌스러웠던 그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명한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아마 음식 전문가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먹어서 맛있으면 좋은 음식입니다.”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은 것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면 잘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가미되면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청년들이 고급 레스토랑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제를 억지로라도 그런 곳으로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요?
만약 사랑했다면 형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을 차리며 먹는 랍스터보다 집에서 혼자 끓여 먹는 라면이 더 맛있습니다.
형식에 얽매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유롭게 해 주는 게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그런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줍니다.
저도 유학을 10년 가까이 다녀왔기 때문에 물론 어느 정도는 레스토랑 식사법에 대해 압니다.
그러나 약간 어려워하는 신자들과 그런 곳에 가면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그냥 포크로 찍어서 한 입 베어 뭅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곳에 가면 숨이 막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교회 내에도 이런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요?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신부님, 주교님, 추기경님, 교황님이라
부르기보다는 Reverendo(존경할만한 분: 사제), Eccellenza(탁월하신 분: 주교), Eminenza(위대하신 분: 추기경), Santita(거룩하신 분: 교황)등의 칭호를 붙입니다.
예수님이 들으시면 웃으실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은 하느님도 어쩌면 부담스러워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들이 이런 용어로 불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과 형식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어야 할까요? 그냥 본질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본질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형식만 하면 됩니다.
이는 마치 나뭇잎과 열매의 관계와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가 가져가야 할 에너지까지 잎을 키우는 데 쓰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게 됩니다.
그러면 못 쓰는 나무가 됩니다.
에너지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열매를 최대한 많이 맺게 하려면 잎은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게 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오셨을 때 의전 차량을 가장 작은 것으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심 끝에 소울로 의전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 돈 자랑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커지기 위해 형식은 작아져야 함을 압니다.
형식이 지나치면 모두가 사랑의 에너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와 잎의 균형을 맞출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균형을 맞추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사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에 쏟을 에너지가 줄어들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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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주변에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도
주변에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가득 받은 이는
어디서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또 사랑을 나눠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체험한 이는
더 많은 사랑을 꾸준히 나눠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사랑을 전합니다.
그러나 내면이 고갈되거나 의지에 한계가 오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이내 변해버립니다.
대가를 원하게 되고
집착이 되기도 하며
무관심과 냉랭함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나 겉은 깨끗이 할 수 있지만
속이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행동과 삶을 통해 지례 짐작할 따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잘 지켰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 탐욕과 사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계명에 매여 하느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져
하느님의 율법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셨습니다.
사랑하기에 더욱 잘 지키고
계명을 잘 지키면서도 의미를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만약사랑한다면서 율법을 지키기 않으면
계명을 지키면서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의 마음은 하느님이 아닌 유혹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삶으로 드러날 수 있기를,
의미를 깨닫고 계명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길 바라며
오늘 주님과 함께
그 은총의 여정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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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2.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16-25)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8)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타락상과 믿음을 통한 의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안에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1장 32절까지는 본론의 도입부로서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와 하느님의 유기(버리심)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로마서 1장 18절은 불경건한 이방인에 대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진노'로 번역된 '오르게'(orge; the wrath)는 본래 '자연스러운 충동', '기분', '천성', '기질'등을 의미했는데, 점차 '강한 내적 열정을 나타내는 격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구약에서 '오르게'(orge)는 불의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묘사하는데 쓰였으며,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느님의 '오르게'는 죄에 대해 그분께서 나타내시는 반응이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정당한 분노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관점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8절에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임을 강조한다. '하늘에서부터'로 번역된 '아프 우라누'(ap' uranu; from heaven)에서 전치사 '아프'의 원형 '아포'(apo)가 나타내는 것은 어떤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진노가 시작되는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인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거처, 즉 옥좌(보좌)로 인식되었으며(마태23,22 ; 사도7,55), 비유적으로는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하느님과 동의어로 나타나기도 한다(루카15,18.20).
따라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은 죄인들이 결코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없음에 대한 경고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피할수 없는 진노는 '모든 불경(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난다. 여기서 '불경'에 해당하는 '아세베이안'(asebeian)의 원형 '아세베이아'(asebeia; godlessness; ungodlines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예배하다'라는 뜻이 있는 '세보마이'(sebomai)의 합성어로서 '예배하지 않음','신(神)을 믿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을 가리키며,'불의'의 발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의'로 번역된 '아디키안'(adikian)의 원형 '아디키아'(adikia; nrighteousness; wickedness)는 이처럼 '경건치 않은', '불경(不敬)한' 자들의 당연한 결과로서 '부도덕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즉 '알레테이아'(alletheia; truth)는 문맥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명백히 계시된 하느님의 업적과 자취이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바로 바른 삶임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불의'(아디키아)로 억누르고 있어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억누르는'으로 번역된 '카테콘톤'(katechonton; hold; suppress)은 '~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다','막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테코'(katecho; 루카4,42; 2테살2,6.7; 필레몬1,13)의 현재 분사로서, 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버릴 수 없어서 명백히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억눌러 불의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자들에게는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이것은 '나타나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칼륍테타이'(apokallyptetai; is being revealed)가 계속됨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로 쓰였다는 데서 암시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최종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하게 나타나지만, 지금 현 시점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정의)의 속성이 범죄를 방치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범죄하는 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1,37~41)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38~41)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는 행위는 당시 유대 사회의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으며,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정과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다.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사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서 조차도 철저하게 지켜온 규범이었다(마르7,3.4).
사실 식사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단지 의식적인 차원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것이 무슨 거룩한 계명인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적 정식을 왜곡한 유대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강하게 책망하시기 위해 의도적인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겉으로는 식사 전에 손도 씻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는 등 거룩하고 고결한 삶을 사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왜곡하고, 그 속마음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하는 등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기서 '탐욕'에 해당하는 '하르파게스'(harpages; greed)는 '억지로 끌고 가다', '탐심을 가지고 붙잡다'라는 뜻을 지닌 '하르파조'(harpazo)에서 온 말로서 '강탈', '약탈', '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히브10,34; 마태23,25).
루카복음 16장 1~13절의 '약은 집사의 비유'가 끝난 다음에 바로 루카복음 사가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루카16,14)이라고 하면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원색적인 평가를 한다.
또한 마르코 복음 12장 40절에는 바리사이들이 돈에 대한 탐욕으로 '과부들의 가신을 등쳐' 먹는 행위까지 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속마음은 '사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악'에 해당하는 '포네리아스'(ponerias; wickedness)는 '악한 성품의', '타락한'이라는 뜻을 지닌 '포네로스'(poneros)에서 유래하여 '시기심', '악의'(로마1,29)를 의미한다.
루카 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되찾은 이들의 비유'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큰 아들은 분명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실과 또한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잔치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루카15,28).
이처럼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지독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그들이 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바리사이들은 내용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외적 행위만 깨끗하고 거룩하게 잘 꾸미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내면세계도 아름답게 보아 줄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바리사이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들아'에 해당하는 '아프로네스'(aphrones; you foolish people)는 '어리석은', '지각이 없는'을 뜻하는 '아프론'(aphron)의 복수 호격이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과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고, 영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자칭 타칭 의인이요, 존경받는 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겉 뿐만 아니라 속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종교적 형식 준수를 통해 겉만 거룩하게 보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카 복음 11장 41절의 '속에 담긴 것'에 해당하는 '타 에논타' (ta enonta; what is inside)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데, 음식, 마음, 재물로 보는 경우가 그것이다.
루카복음 11장 39절의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는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그런 탐욕과 사악의 마음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기에 그런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에서 부정한 재물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 '자선'에 해당하는 '엘레에모쉬넨'(eleemosynen; alms)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는 말씀은 자선의 결과 그들 자신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된 것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것'('판타'; panta; all thing; everything)은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했다는 죄의식을 비롯한 하느님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선하게 되면, 재물을 옳게 사용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평화와 양심의 자유가 그들을 더러운 탐욕과 사악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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