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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철학자] 성 보나벤투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풍미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로 꼽히는 성 보나벤투라(St. Giovanni Fidanza Bonaventura)는, 1221년 로마에서 북쪽으로 77km 떨어진 비테르보 지역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습니다.
생애와 주요 작품들
성 보나벤투라 자신이 스스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려서 큰 병을 앓고, 사경을 헤매는 중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로 완치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연 때문이었는지 그는 124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의 진정한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 살아낸 ‘청빈 정신’에 대하여(수련자들의 규정에 해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변론」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학문적으로 정리한 학자로,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지닌 실천가요 영성가로, 하느님과 관상적 합일에 이르는 체험을 누리던 당대의 신비가로 이름을 드러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1248년부터 파리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친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1257년에는 수도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되고, 1272년에는 알바노의 추기경이 됩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면한 1274년, 보나벤투라 역시 리옹공의회가 열리고 있던 7월 15일, 리옹에서 하느님 품으로 떠납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1482년 4월 14일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인 식스토 4세에 의해 시성되어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1588년 3월 14일 식스토 5세 교황에 의해 ‘교회학자’(특별히 세라핌 박사)칭호를 부여받습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주요 저서로, 철학적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신학과 신비사상으로 전개되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여정(Itinerarium Mentis in Deum)」이라는 작품은, 피조물인 인간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관상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아울러 신학적 철학적 작품들로는 「베드로 롬바르드의 명제집 주해(Commentarius in secundum librum sententiarum Petri Lombardi)」와 「신학요강(Breviloquium)」이 있으며, 토론문제집으로 「그리스도의 인식(De Scientia Christi)」, 「삼위일체의 신비(De Mysterio Trinitatis)」, 「복음적 완덕(De Perfectione Evangelica)」과 「학문들의 신학적 환원(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등 다수가 있습니다.
또한, 보나벤투라 성인은 영성적, 설교적 가르침과 수도회를 위한 작품들, 그리고 성서주해를 위한 작품들까지, 다량의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경험에 바탕을 둔 신학과 신앙적 지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도달한 신성은 너무도 대단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이 무엇인지 깨달은 당대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원들은 예수님의 삶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겪은 수난에 역점을 둔 영성을 추구해 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나벤투라 성인 역시 신학은 종교적 체험 안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세계 전체가 창조주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자연이라는 책’에서도, 문자로 된 성경처럼 그 너머의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제시합니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가르침대로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영적인 신의 형상을 찾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다른 개별의 존재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고, 우리는 개별 존재자들을 매개체로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보나벤투라 성인은 자신의 주저인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여정」에서 “존재자들과 가시적인 것들의 불투명함에 길들여진 우리의 정신은, 존재의 빛을 바라볼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치 우리 눈이 순수한 빛을 볼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바로 이 어둠이 우리 정신에서 최고의 빛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라고 우리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또 하느님에 대하여 “처음이시고 마침이시며, 영원하시면서도 지극히 현존하시고, 가장 단순하시면서도 가장 위대하시며, 지극히 유일하시면서도 다채로우시다.”라는 ‘모순적 언사’로 하느님에 대한 관념의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곧 ‘모순의 통일’ 속에서 일상의 사고와 언어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나벤투라 성인은 신앙을 살아가는 지혜가 학문을 뛰어넘어야 하며, 그 진정한 지혜는 사랑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
보나벤투라 성인의 신학과 철학은 총체적으로 하느님 안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하느님에게로 이어지는 사유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념은 모든 인간에게 본성상 고유한 것이며, 모든 이성적 사유에서 ‘하느님 존재’에 대한 명증함은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러한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세 가지 길로 요약합니다.
그 첫 번째 길은 자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지혜를 추구함과 행복, 평화 그리고 기쁨에 대한 염원에서 찾습니다. 이것들은 영원한 노력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은 현세에서 결코 자기 스스로 끝까지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염원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이는 결국 지혜 자체를, 완전한 행복을, 그리고 절대적 평화를 위한 원천적인 앎을 전제로 합니다. 곧 지고의 선인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피조물에서 출발합니다. 곧 세상의 유한한 사물들에서 무한하고 완전한 원인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제1원인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유사한 전통적인 ‘신존재 증명’입니다.
세 번째 길은 안셀모 성인한테서 나옵니다. 곧 하느님의 이념에 이미 그 존재가 직접적으로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아주 간략한 형식을 취하여, “하느님이 하느님이시라면, 존재하신다.”라는 정식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통찰로부터 보나벤투라 성인은 “하느님이 곧 진리 자체이시며, 모든 다른 진리의 영역에 전제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 보나벤투라의 사상이 갖는 의의
13세기를 풍미한 스콜라철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철저히 이성에 따르는 철학을 했다면, 보나벤투라는 사유적인 면보다는 신앙적 마음가짐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감을 봅니다. 이러한 사유방식이 갖는 장점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질서 안에서 더 많이 우리 인간에 대한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나벤투라 성인의 철학에는 살아계신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신비롭게 일치함에 대한 사유들이 더욱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의 철학적 사유의 길(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보나벤투라)이 서로 보완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교회사 안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학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도자로, 철학자로, 그리고 신학자로 평생을 학문과 저술에 매진한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이 여전히 철학사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토마스주의자(Thomist)들 안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토마스의 생애와 주요 작품들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회로부터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토마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아퀴노(도시의 이름이자 가문의 이름)라는 마을의 로카세카 성에서 그라펜 란트울프 아퀴노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다섯 살에 성베네딕토수도회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토마스는 1239-1244년에 나폴리대학에서 일반학문을 공부한 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244년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합니다. 가족들의 영향권에서 토마스를 떼어놓으려 했던 수도회는 그를 로마와 볼로냐로 보내지만, 도중에 가족들에게 붙잡혀, 1244년 5월부터 1245년 가을까지 로카세카 성에 감금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의지가 매우 굳건하여 결국 가족들이 뜻을 굽히게 되고, 도미니코회 총장의 권유로 파리대학(1245-1248년)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거기서 토마스는 성 대 알베르토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1250년과 1251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은 토마스는 쾰른으로 교수 자리를 옮긴 알베르토를 따라 쾰른에서 1252년까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처음으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여, 1256년부터는 신학강의를 하게 됩니다.
1259년에 토마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나폴리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후 1261년에는 오르비에토에 있는 도미니코회 교수단의 수장으로 수도원에서, 그리고 1265년에는 로마의 신학교수로 로마 교황청 소속 학원에서 1268년까지 강의를 합니다. 이때 토마스가 처음으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1268년부터 1272년까지 토마스는 다시 파리대학에서 신학교수로 강의하게 되고, 그의 많은 저술들은 이 당시에 집필됩니다. 「신학대전」의 많은 부분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서」들도 여기서 저술됩니다.
1272년 초에 토마스는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와 1273년 말까지 나폴리에서 남은 열정을 모아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였지만 사색을 통해 자주 황홀경에 이르기도 했던 토마스는, 1273년 12월에 미사를 봉헌하던 중 신비체험으로 모든 저술활동을 중단하게 되는데, “내가 쓴 모든 것이 지푸라기처럼 보인다.”는 말을 남기면서 붓을 꺾습니다. 그러던 1274년 3월,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부름을 받아 제2차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려고 떠난 길에서 낙마하여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다 주님 안에 영면하게 됩니다.
그 뒤 불과 5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323년 토마스는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567년에는 영광스럽게 ‘교회학자(Doctores ecclesiae)’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토마스가 후대에 남긴 위대한 저서들은 현대의 책으로 200쪽씩 묶어도 400권가량이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토마스의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다면, 「신학대전」, 「이교도 논박(Summa contra Gentiles)」,「가톨릭 신앙의 진리(Quaestiones Disputate de Veritate)」, 「존재자와 본질에 대하여(De Ente et Essentia)」, 「명제집 주해(Scriptum super Libros Sententiarum)」 등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에 대한 주해서로, 「영혼에 대하여(De Anima)」를 위시하여 다수가 있으며, 위 디오니시오와 보에티우스에 대한 주해서와 성경주석서, 그리고 「악에 관한 논제」, 「거짓과 오류에 관하여」 등의 소품집이 전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신(神)존재 증명
13세기 말까지 이어진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세계와 서구의 관계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있을 때,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톨레도의 무슬림 학자 밑에서 공부하던 서유럽 학자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알려지고, 이 저술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토마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과 종합하고자, 이성과 신앙의 조화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갑니다. 이러한 토마스의 노력이 잘 드러나는 것이 「신학대전」 서두에서 논하고 있는 ‘신존재 증명’입니다.
일명 ‘다섯 가지의 길(quinque viae)’이라 불리는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초심자들에게 주제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신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을 소개하려는 교수지침서로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는 신에 대한 지식은 타고 나는 것이라고 여겼으면서도, 그 지식이 막연하고 조악할 때가 많아 입증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신존재’의 자명성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는 것, 곧 신의 결과물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을 이성으로 밝히고자, 스스로 신에 대한 신앙을 배제하고, 철저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사유에 의존하여, 신존재 증명을 꾀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증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다섯 가지 방법으로, 곧 인과관계 안에 ① 제1원인에서, ② 제1운동자에서, ③ 필연적 존재에서, ④ 완전성의 최고단계로, 그리고 우주만물의 ⑤ 목적인(目的因) 안에서 신을 이성적으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존재를 증명하면서도, 토마스는 ‘신이 존재한다.’에서 존재의 의미가 우리가 사용하는 존재의 의미와 같을 수는 없기에, 신에게 유비적인 언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우리 이성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한계의 여지를 남기고 있기에, 토마스에게 이성적 역할은 다시금 신학적 영역의 여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위한 토마스의 윤리학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사유를 근간으로 당대까지의 모든 윤리적 통찰을 아우르고, 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사상을 「신학대전」 II부에서 전개합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행복이라는 전통적인 통찰에서 출발하여,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니라, 지속성과 진정성을 향한 의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보편적 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신하고, ‘보편적 선’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토마스는 재물이나 감각적 쾌락, 그리고 권력이 ‘보편적 선’에 부합하지 아니하고, 이는 오로지 ‘존재 자체’인 신 안에서 찾을 수 있기에, 인간 삶 전체의 목적을 신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곧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선’이신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복’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신을 인식하고 사랑하는 것’ 안에 ‘궁극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오로지 인간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성 대 알베르토
중세시대에 비범한 학자로 그 탁월함을 인정받아, ‘보편적 박사’라 부르는 알베르토 성인에게는 늘 ‘위대한(大, Magnus)’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닙니다. 그 명성만큼이나 성인의 철학적 사상은 우리에게 여전히 위대한 전거(典據)로 남아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박식했던 위대한 주교학자
1200년 독일 남부 슈바벤 지역, 라우잉겐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대 알베르토는 1223/9년경에 독일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쾰른에서 공부한 뒤에, 파리(1243/44-1248년)와 쾰른(1248-1254년)에서 신학을 가르칩니다. 쾰른에서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학생으로 맞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 뒤에 성인은 독일 도미니코수도회의 관구장(1254-1257년), 레겐스부르크의 주교(1260-1262년), 이어서 교황사절로 일하다가, 다시 쾰른의 교수로 돌아와 리옹 공의회(1274년)의 교부로 활동합니다.
성 대 알베르토는 학자로, 그리고 주교로 오랫동안 많은 활동을 하여 드높은 명성을 지닌 채, 1280년 하느님 안에 영면합니다. 그리고 1622년에 복자품에 오른 뒤 한참 지난 1931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면서, ‘교회학자’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우리에게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그리고 당대에는 법률가이자 과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그야말로 여러 분야에 박식했던 위대한 성 알베르토는 70편이 넘는 논문과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 저술의 양이 엄청나, 「동물학」(De Animalibus)과 「식물학」(De Plantis)에서부터 연금술과 관련된 「광물론」(De Mineralibus)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거의 모든 내용을 학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중요한 저술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도우려고 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주해집」들일 것입니다. 더불어 논리학과 물리학, 수학과 형이상학적 저술들만이 아니라, 신학적 저술들도 다수 포함됩니다.
신적 조명에 따른 형이상학
성 알베르토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철학을 준비시키는 성인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알베르토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을 주해하는 것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알베르토가 신학과 철학을 하는 데서는 오히려 플라톤과 성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신의 조명에 따른 형이상학이 그렇습니다.
알베르토는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최고의 일자[一者]에서 만물이 나온 것을 지칭하는 형이상학 이론으로 플로티누스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 필자 주)에 대한 사상을 분명히 발전시켜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신은 순수한 빛이시며, 빛들의 빛이시기에, 그 빛으로부터 모든 피조물이 발산됩니다.”라는 알베르토의 주장에서, 첫 번째 발산이 ‘보편적 존재’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러한 발산이 단계적으로 정신적 존재를 넘어 질료적인 것에까지 내려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선 질료적 세계에서 알베르토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제1질료는 순수한 가능태가 아니라, 이미 첫 번째 실재로 형상이 그 안에 가능태로 놓여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알베르토의 사유가 아리스토텔레스(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체화된 사물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 필자 주)적이기보다는 플라톤적인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두 사람의 사유를 잘 연결하고 있음을 엿보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조화시키려는 알베르토의 시도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개념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곧 플라톤은 영혼을 “인간의 육체를 움직이는 영적 실체”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의 형상”으로 그 의미를 규정하는데, 이를 알베르토는 결코 모순적이라 보지 않고, 두 정의가 영혼의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제시한다고 보면서, “영혼은 그 자체에 관해서 플라톤의 의견과 일치하지만, 영혼이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육체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다.”고 종합합니다.
‘신(神) 인식’에 대하여
알베르토는 철학과 신학을 이미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과 철학을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철학과 신학이 의미 규정에서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을 통하여, 더 이상 신학의 보조학문으로서 철학이 아니라, 이론 학문으로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분리하고, 철학자가 연구할 분야를 분명하게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마치 모든 것을 신앙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이성의 범위를 넘어 사유했던 당시의 철학적 사조에 경종을 울리고, 이성의 범위를 한정하려는 시도가 엿보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이성의 한계 지음은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켜 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알베르토는 그렇게 구분한 철학만을 통하여 ‘과연 신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던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연 이성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긍정합니다.
그러나 ‘신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대답은 단지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제한합니다. 이는 곧 모든 범주적 한계 규정의 부정(否定)을 통하여, 다시 말해, 오직 불명확한 개념들에 따른 인식을 통하여서만 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신학의 문제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신을 절대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비적 개념들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인식을 해석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신(神) 존재 증명
‘신의 존재가 과연 증명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알베르토의 생각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이 됩니다. 넓은 의미로 근거들을 제시하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오직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통하여 부정적으로만 증명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부정에 대한 불가능성을 통하여 알베르토는 신 존재에 대한 긍정을 요구합니다.
성 알베르토의 철학이 자신의 제자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만큼 독창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사적인 면에서 그 위대한 영향력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져,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플라톤과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존하던 그리스도교 사상의 전통을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는 그리스도교 사유에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것에서 그 의의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캔터베리의 대주교 성 안셀모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성 안셀모는 1033/4년경 이탈리아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다섯 살에 수도회 입회를 꿈꾸었지만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란프랑쿠스(1010-1088년?)라는 위대한 스승의 명성을 듣기 전까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수학합니다.
1060년 그는 란프랑쿠스가 가르치는 수도원학교가 있던 노르망디 지방의 벡 수도원(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신학교수가 되고, 란프랑쿠스의 후계자로 수도원학교 학장으로 일합니다.
그 뒤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고, 다시 란프랑쿠스를 이어 영국의 남부도시 캔터베리의 대주교(재임기간 1093-1109년)가 되어 일하다 1109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안셀모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철학적, 신학적 작품을 남겼습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모노로기온(Monologion)」과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을 비롯하여, 「프로슬로기온」의 존재론적 신(神) 존재 증명에 대한 변론과 더불어 내용을 보충하고 있는 「가우닐로에 대한 변론(Liber apologeticus contra Gaunilonem)」, 「문법에 대하여(de grammatico)」,「악의 원천에 대하여(de casu diaboli)」, 그리고 「삼위일체 신앙과 말씀의 육화에 대하여(de fide trinitatis et incarnatione verbi)」 등 다수가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
당시 신앙보다는 이성을 강조하는 사조가 일부 있었는데, 베렌가리우스(1000-1088년?) 같은 학자들이 그런 부류였습니다. 그는 변증법을 통한 진리 추구에서 인간의 이성은 최상의 지침이자 위대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 안셀모는 변증법적인 유용성을 거부하기보다는, 변증법의 단면적이고 분별없는 사용을 거부하면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전통에 입각하여, 변증법의 본래 용도에 따르는 사용과 더불어 신앙과의 균형감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곧 이성보다는 신앙에 우선성을 두고 신앙과 이성의 두 가지 지식의 원천을 진리 추구에서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신학자였습니다.
성 안셀모는 「프로슬로기온」의 서문에서 후대에 아주 빈번히 인용되어 스콜라철학의 근간이 되어버린, “이성에 따라 추구하는 신앙”과 “나는 이해하려고 믿는다.”라는 중요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성 안셀모가 이 두 문장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신앙은, 모든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세에서 늘 신비로 남을 수밖에 없는 신앙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에 따르는 필연적인 이유를 제공하는 정신의 힘을 확신했습니다. 곧 ‘삼위일체’나 ‘육화’ 신앙의 신비 앞에 우리의 이성은 그 필연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그는 계시된 진리 앞에 겸손한 태도와 더불어 그 계시된 진리를 증명하는 이성의 능력에 드러나는 무제한적 낙관론을 잘 결합하려 했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하여
성 안셀모의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입니다. 그가 「프로슬로기온」 2-3장에서 제안하고 있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은 오늘날에도 분석철학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성 안셀모가 전개하는 증명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무엇인가 반드시 생각하고 있다는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단어로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의 지성 안에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사유전개 방식입니다. 그래서 그의 증명에 사용된 전제는, ① 우리가 하느님을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엇”으로 믿어왔다는 것에 놓입니다.
그리고 성 안셀모는 이제 ② 심지어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도 만일 그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라는 ‘정의’를 들으면, 그 개념을 이해한다는 사실에서 ③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지성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까지 세 번의 단계를 거쳐 성 안셀모는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인 하느님이 우리의 이성에 존재한다는 근거를 지우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이 실재로도 존재해야만 한다고 논리를 전개해 나갑니다. 곧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실재가 아닌 이성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이는 더 이상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에만 있는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에 실재적인 존재를 덧붙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앞선 전제(하느님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이다.)에 위배되기에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인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에만이 아니라, 실재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의의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그러실지 모르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역시 성 안셀모의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논거를 철학적 말장난 같다고 느꼈습니다. 성 안셀모 역시 자신의 논거를 흥미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했지만 객관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논증이라고까지 본 것은 아니었기에, 여기서는 이러한 반대 논의들은 차치하고, 이 논증이 중세에 아주 잘 알려졌었다는 사실과 하나의 논증으로 분명 상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성 안셀모의 논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합니다.
물론 후에 중세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성 안셀모의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을 하느님에 대한 논증을 단순히 ‘사유’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이끌어내려 했다고 반박하지만, 세간의 비판과 달리, 성 안셀모가 자신의 증명을 단순한 사유의 개념에서 출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분명 성 안셀모는 하느님의 실재의 체험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토대로 출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 안셀모가 ‘실재하는 사물들의 존재’가 단순한 ‘가능성이나 사유된 것’보다는 더 크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성 안셀모는 스스로 자신의 정의에서 이미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유가 온전히 그분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무한한 하느님의 존재를 개념화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어쩌면 그의 신 존재에 대한 논증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신앙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고대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에게 강렬했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적 영향을 중세로 연결하는 학자가 있다면, 바로 스콜라철학의 선구자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0-877년)일 것입니다.
중세철학사에서 유일하게 만나게 될 아일랜드 철학자인 에리우게나는 810년경에 태어나, 일찍이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고, 라온이라는 도시의 ‘주교좌성당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서 프랑코 왕국의 자유학과(artes liberales ; 중세의 3과인 문법, 수사, 논리와 4학인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학을 묶어서 지칭한다.) 교수로 일하다 877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에리우게나는 위 디오니시우스의 작품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선생과 학생의 대화 형식을 빌려 중세 초기의 유일한 철학서 「자연 구분에 대하여」(De divisione naturae)를 저술합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이중 예정설’(하느님께서 한 사람에게 이미 고정된 한 가지의 운명을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거나 지옥 두 가지 모두를 처음부터 예정하고 계시다는 예정설)을 주장한 오르바이스(Orbais : 북 프랑스 지역에 위치한 베네딕토수도원)의 신학자 고트샬크를 반박하려고 쓴 「예정론」(De divina praedestinatione)과 이교도 학자였던 마르티아누스 카펠라의 백과사전적 작품인 「철학과 메르쿠리우스의 혼인」(De nuptiis philologiae et mercurii : 메르쿠리우스는 로마신화의 ‘교역과 상인의 신’으로 그리스신화의 전령의 신이었던 헤르메스의 역할이 큰 신)에 대한 주석 등의 다양한 작품을 남겨놓았습니다.
존재의 질서
우선 논리교사였던 에리우게나에게 논리의 법칙이란 비단 사유의 규칙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존재의 법칙 역시 하나의 논리적인 무엇이 됩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생성이 곧 논리적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플라톤적 사유로부터 귀결되었고, 후에 스피노자(1632-1677년)나 헤겔(1770-1831년)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간단히 그의 사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존재의 질서는 인식의 질서에 따르기에, 존재적으로 최고의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만 합니다. 곧 논리적 차이를 통하여 최고의 것으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이 설명되고, 이는 결국 모든 존재자들의 생성이 하느님이란 원천으로부터 비롯되며, 다시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것으로 이 모든 과정이 논리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의 목적
사실 존재의 다양화를 설명하는 에리우게나의 삶과 철학의 목적은 아우구스티노 성인(354-430년)을 따라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아는 기쁨에 놓여있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에리우게나는 「자연 구분에 대하여」에서, “오 주 예수님, 저는 당신에게 성령으로 영감을 받은 당신의 말씀을 사변을 기만하는 어떠한 오류도 없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보상도, 어떤 다른 행복도, 어떤 다른 기쁨도 요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예정론」에서는 “삼라만상 가운데 최고이며, 첫째 원인인 하느님을 겸손하게 경배하고 합리적으로 탐구되는 참된 종교의 규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철학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철학이 성경에 드러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 필자 주).
에리우게나는 결국 철학과 종교를 철저히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저서 「철학과 메르쿠리우스의 혼인」에서 “철학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그가 바라보았던 철학의 목표는 전적으로 영적이고 종교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을 통한 신앙의 조명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통찰력을 향한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에리우게나는 진리에 이르는 여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의 이성이 원죄로 물들어 어두울 때입니다. 이때는 인간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탐구할 수 없고, 창조주의 존재 증명에 한계를 지닙니다.
두 번째 단계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육화한 이후에 이성은 이제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계시라는 진리의 원천을 함께 지니며, 인간의 이성은 계시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탐구하고 신앙을 우리 삶에 유효하게 만드는 과업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끝으로, 진리 추구에서 인간의 세 번째 단계는 천국의 삶으로, 인간은 이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직관하는 단계에 이르고, 이렇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이 신앙을 대체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성에 앞선 신앙
그리스도교의 철학자임을 늘 자부했던 에리우게나에게 신앙은 늘 앎보다 우선시되었고,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의 이성에 앞서 있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신앙은 사유를 요구했고, 이 두 가지(신앙과 사유)는 철학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신학 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적인 사상가였던 그가 사용한 철학적 방법론은 유출설로 대변되는 신플라톤주의였기에, 그 역시 자신의 생애에 이미 의심을 받던 바대로, 훗날 그의 가르침이 ‘범신론적 유출설’이라며 1210년과 1225년 두 번에 걸쳐 가톨릭교회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에리우게나의 주요 저작인 「자연 구분에 대하여」는 신플라톤주의 변증법에 의해 조직된 그리스도교 사상의 방대한 종합입니다. 곧 만물의 원인인 하느님은 최고의 단일성으로 제시되고, 창조란 이 단일성으로부터의 다수의 발현 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 구분(division)되는 과정으로 자연은 하느님의 단일성에서 하강하며, 개체로 갈수록 보편성은 감소하되, 복수성을 증가시키는 ‘본질의 종속’ 안에 펼쳐지는 세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리우게나가 자신의 사유에서 범신론적 유출설을 피해가는 중요한 개념은 ‘자연과 창조(natura et creatio)’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느님과 피조물의 차이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에리우게나는 창조(창조는 ‘산출’을 의미합니다.)의 개념을 존재론적 차별화로 이끌면서, 이러한 창조가 ‘하느님의 자유로운 창조’일 수 있는가, 또 창조가 ‘하느님의 충만함’에서 오는 ‘필연적 흘러넘침’일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한한 세상’과 ‘절대적 초월자’로서 하느님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철학자]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이른바 ‘위(僞)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라는 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철학자를 소개합니다(2005년에 새로 펴낸 「성경」에서는 라틴어를 따라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고스’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그리스어를 따르면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스’라 읽힌다. 영어로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트’라고 읽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나라 책들에서는 보통 ‘위 디오니시우스’라고 칭하면서 통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독일어를 따르는 「가톨릭 사전」의 표기대로 아레오파기타라 표기한다. - 필자 주).
그가 남긴 글들
그의 이름은 바오로 사도의 설교로 회심한 성인(사도 17,34 참조)의 이름을 딴 필명으로,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나 신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정확히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필명으로 6세기부터 글들이 전해졌고, 9세기경에는 라틴어로 번역이 되어, 아주 높은 명성을 얻었던 철학자였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13세기에는 대 알베르토 성인과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의해 그의 글들이 주해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글들로는 「하느님의 이름들에 관하여」(peri theion onomaton), 「천상적 위계에 관하여」(peri tes ouranias hierarchias), 「교회적 위계에 관하여」(peri tes ekklesiastikes hierarchias), 「신비신학에 관하여」(peri mystikes theologias)라는 작품들이 전해집니다. 특히 ‘신비신학’이라는 용어는 위 디오니시우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의 신비신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비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가 제기하는 철학적 성찰의 커다란 구조는 하느님께 이르는 세 가지 길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에게 하느님 자신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인식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분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서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장소가 됩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신비신학에 관하여」에서 우선 세 가지 단계를 구분합니다. 긍정신학, 부정신학, 그리고 상징신학이 그것들입니다.
철학적 성찰의 구조 - 긍정과 부정 신학
긍정신학은 주로 「하느님의 이름들에 관하여」에서 다루어지며, 성경의 말씀을 다룹니다. 우선 “하느님은 선입니다.”(마태 19,17 참조)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이를 플라톤주의의 전통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선의 이데아를 최고의 이데아로 보는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아름다움과 선에서 나오며, 그것 안에 존재하며, 그것에게로 돌아갑니다. … 심지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선과 아름다움 안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근원을 초월하는 것의 근원, 완성을 초월하는 결말이 있습니다. … 따라서 만물은 아름다움과 선을 바라고 열망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울러 존재, 생명, 진리와 같은 단어들로 하느님을 서술할 수 있으며, 이들은 동시에 부정신학으로 옮아가는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술할 수 있는 모든 것과는 다른 존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고,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재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기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하느님은 본질”이라고, 또는 “생명”이나 “이성”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육체성도 지니지 아니하시고, 장소도 형태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는 한 빛도 어둠도 아니며, 진리도 오류도 정신도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긍정을 넘어서기에 부정이 되고, 이 부정 역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 부정을 통한 또 하나의 인식이 되기에, ‘인식할 수 없음을 넘어서는 초월적 인식’이라는 역설적 서술이 가능해집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은 인식할 수 없는 분임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훗날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를 역설하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년)의 사유를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신비신학 또는 상징신학
이제 위 디오니시우스는 긍정과 부정 신학을 넘어서, ‘신비신학’ 또는 ‘상징신학’이라 명명하는 것에로 나아갑니다. 신비신학은 우리의 경험적 내용들을 취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적용하여 번안해 냅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신에 대한 형상을 서술할 때 그러한데, 하느님을 “성채”라든지 “태양”이나 “샘”에 비유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분노하신다.”든지 “후회하신다.”는 표현 역시 그렇게 드러나는 기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원래적인 단어의 의미라기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실재적으로 표현이 어려운 하느님께 적용하기 위한 비유적 또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곧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 위치하는 표현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정신사 안에서 꾸준히 발전하면서, 긍정신학, 부정신학, 그리고 신비신학의 삼중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810-877년)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한테서도 이러한 삼중구조는 그대로 이어져 나타나지만, 하느님을 인식하는 다양한 방법으로라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한 내적인 구성요소로 받아들여 “유비적인 신(神) 인식”에로 발전해 갑니다.
위 디오니시우스의 개념화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통한 철학은 이제 이렇게 단순히 인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진리”, “초월적 선”, “초월적 존재자”에로 사유가 이어집니다.
물론 그에게 이런 모든 사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놓여있는 “살아계신 삼위의 인격적 하느님”에게로 모아져, 가장 우선의 원리를 “하느님께서 다스리심”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여기서부터 세상의 모든 다양함이 비롯되었음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