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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의 날에 할 일
시편 141:1~10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편은 다윗이 쓰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그 하나는 사무엘상 24장을 배경으로 한 다윗이 사울 왕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지은 시라고 말합니다. 다른 하나의 의견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 때에 어려움을 당하면서 저녁 때 지은 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이 시는 다윗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가 처신한 것을 시로 표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동안, 오랜 기간 동안 시편을 강해하면서 느낀 것은 150편이나 되는 시편 중에 감사와 찬송의 부분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원수들로 인하여 환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성도로서의 바른 처신이 무엇인가를 시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세상은 환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평안해 보이지만 어느 사회, 어느 가정, 어느 개인이든지 간에 어려움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편들을 읽을 때 마음에서부터 공감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했습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지금 이 시인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운 가운데 자기를 도우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아 목이 타도록 하나님을 부릅니다.
부른 것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부르짖을 때에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당장 죽게 된 사람이 “사람 살려요!” 하고 생명을 내걸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내 형편을 알아서 돌봐주세요.”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돌보시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 하는 절규입니다. 이것을 볼 때 이 시인이 얼마나 다급한 형편 가운데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알아주실 것을 원했습니다.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시끄러운 소리보다 저희 생명력이 기도에서 들려지기를 희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아 주실 것을 갈망했습니다.
“속히 내게 임하소서” 하나님의 임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을 조르며 혹시 더딜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성급히 행하지 아니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속히 하나님께서 임하여 주실 것을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본문 2절을 보세요.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시인의 드리는 기도가 주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는데 “기도할 때 손드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를 바랬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 장군을 앞에 두고 아말렉과 싸울 때 연로한 모세는 직접 일선에 나가 싸울 기력이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민족 뒤에서, 말하자면 후방에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드리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사야 1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손을 편다고 하나님이 보시며, 많이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꼭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중상하고 모략하여 그 가슴에 칼을 꽂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피흘린 손은 아무리 높이 들어도 하나님은 그 눈을 가리우실 것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심이 아니요, 하나님의 귀가 어두워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야 합니다. 죄를 없애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게 하소서” 했습니다. 분향은 올라가는 성질과 좋은 향기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분향을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했습니다.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3-4 절에 보면 “또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우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기도를 향연에 비유했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참된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향연과 같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향연처럼 하나님이 받으실 때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나 악한 생각을 가지고 기도할 수 없으며 기도한다고 해도 그런 기도는 상달되지 아니합니다.
내 마음 속에서 냄새나는 더러운 모든 것을 다 제거시켜 버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자연히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던 생각도 없어지게 되어서 원수처럼 여기던 사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친해지며, 막힌 담이 무너져 화친하게 됩니다.
성격이 맞지 않고 이해가 서로 다르며 애써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기도드리고, 또 계속해서 기도드릴 때 차차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랑할 조건을 발견하게 되며, 그 방법을 찾아내게 되고 그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향연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얼굴을 기쁜 마음으로 뵈올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여기 오늘 본문 1-2 절을 보니 “불렀다, 부르짖다, 분향함 같다, 이제 손을 드는 것.” 이 모두가 그 성격은 조금씩 다른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그 심령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제사, 다시 말하면 희생의 제물처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옳은 기도를 드릴 때 희생의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왜 제사와 같이 생각했습니까?
제사드리는 것은 지극한 정성을 드려야 하는데 기도도 이와 같은 정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가령 제사드릴 때 그 제물은 온전해야 합니다. 물론 병들어서는 안되고 다리를 절거나 눈이 먼 것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온전하고 깨끗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우리의 정성이 뒤따라야만 합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제단에 제사할 때에는 그 정성이 얼마나 컸던지 아무리 날씨가 추운 날에도 제사를 드리고 나면 땀이 흠뻑 옷에 젖었고, 제사를 끝내고 나올 때에는 너무 기진맥진해서 혼자서 걸어 나올 수가 없어서 부축을 받으며 나오곤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이와 같은 정성을 가지고 드리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라티머라는 순교자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시작하면 얼마나 진지하게 정성껏 기도드렸는지 다음날 일어날 힘이 없어서 다른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일으켜 주어야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지성껏,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진지하게 드려야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하다가 졸거나 자버리는 일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삼일기도회가 끝나면 자유로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감사한 것은 많은 분들이 남으셔서 기도하는 대열에 참여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청년들이 직장에서 돌아와 시장하고 피곤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은 분들이 남아서 기도하시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정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같이 기도하다가 일어나 나가기 전에 기도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한번 훑어보곤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얼마나 안타깝게,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드리시는지요! 그 모습이 얼마나 고상하고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요, 흠향하시는 기도라고 믿습니다.
분향에는 불이 있어야 향기가 납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분향함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이제 본문 3절을 보십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환난의 날에 우리의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는 것처럼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망하고 시비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평안할 때는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어려운 일 당하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와는 반대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신앙이 돈독해지는 체험을 하여 옛날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내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뜻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하는 고백과 같은 간증을 하는 분을 많이 봅니다.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은 환난의 키질을 해보면 압니다. 참된 신앙, 알곡 신앙을 가진 사람은 환난의 키질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러나 거짓 신앙, 쭉정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환난의 키질을 하면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날아갑니다.
여러분, 우리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서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욥이 갑자기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훌륭한 10남매가 하루 아침에 몰살되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달려들어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욥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였습니다. 욥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환난의 때 입을 열어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맙시다.
시편 39편 1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했습니다.
잠언 13장 3절에 보면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했습니다.
욥기 2장 10절에도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욥이 자녀와 재산을 잃을 뿐 아니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너무 가렵고 안타깝고 해서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려 하시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그때 욥의 대답이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의 하나의 말 같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요?”
이렇게 욥은 환난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좋을 때도 말에 조심해야 될 것이지만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더욱 말에 조심하여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입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한 마디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남을 해치는 경향을 가진 길로 나가지 않게 해야 됩니다.
선한 사람은 혀가 짓는 죄의 재앙을 압니다. 그리고 얼마나 거기에 빠지기 쉬운지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말에 실수함이 없도록 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왜요? 자신들의 주의나 결심이 우리의 혀를 지배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이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을 굴레로 씌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입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은 쓸데없이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난의 때에 반항하여 악으로 기울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악한 행실에도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내 안에 죄로 향하는 어떠한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억제될 뿐 아니라 극복되게 하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이를 모면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에서가 언제 그 장자의 특권을 포기했어요? 배가 몹시 고팠을 때, 팥죽이 붉은 것으로만 보일 때였습니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여자들이 어떻게 잘못된 길로 탈선합니까? 서울이 좋다고 해서 무작정 와 놓고 보니 실상 그렇지만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활의 위협을 받게 될 때 힘들이지 않고 돈 벌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사람이 언제 악과 타협합니까? 의를 위해서 살아 보아야 별것 없고 당장 배고프고 애들 키우기 어려우니까 양심대로 살아보았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지조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며 거두리라” 선을 행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누가 알아 주지 않는다고, 당장에 어떤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맥풀리지 않아야 합니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거둘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1절 이하에 보아도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26편 3절에도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노니 악한 자와 같이 있지 아니하리이다” 했습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고 외식하는 자는 마귀가 앉을 수 있는 둥지를 남겨 둔다.”고 하면서 “악인을 미워하되 하나님이 지어 주신 그 생명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 내세운 것을 미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악인의 집회를 미워하는 것도 그들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하는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이 말하면서 바로 이것이 “완전한 증오(odtum perfectum)” 라고 했습니다.
존 번연은 악과 타협하는 사람을 가리켜 두 가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Mr. Anything’ 혹은 ‘Mr. Smoothman’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악과 타협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씨’나 ‘미끈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악과는 타협할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행실을 하는 데서 떠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결합하거나 악한 행실을 범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악한 세상에 처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떤 모양으로 악의 영향을 받게 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악에게 빠질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기도로 떠받치지 아니하면 우리도 모르게 악으로 향해 굴러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거나 죄악된 일을 행하려는 어떤 자극에도 충동되지 않도록 기도를 통해 내가 죽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매일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옛 사람, 옛 성품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5절 말씀을 보십시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다윗은 그의 결점이 거론되기를 원합니다.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거짓으로 너무 어이없는 것으로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실제로 잘못과 부족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비난에 최소한의 진실이라도 있었으면 자기를 꾸짖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했습니다.
다른 말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리라, 나는 그의 섭리의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 책망을 거역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의 징표로서 받아들이며 은총의 수단으로 선용하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난의 도구가 되는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의로운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책망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이 의로울 때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럴 때 그들로부터 바른 책망이 나오고 그것을 또한 잘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 자체가 공정하면 책망하는 사람이 의롭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니다.
사람은 보통 아첨하는 말을 좋아합니다. 아첨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좋아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이 아첨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바른 말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말에 “양약고구 이어병이요, 충언역이 이어행이라(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나를 바로잡는 말이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 이익하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충고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섭섭할는지 모르나 우리는 그것을 인내로써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친절로써 받아들여야 합니다.
잠언 6장 23절에 보면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책망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해도 그것은 치료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책망이 원수의 입맞춤이나 우매자의 노래보다 더욱 사모할 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책망은 내게 주어진 더러운 죄를 치료할 수 있는 머리의 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희의 재난 중에 그들을 위한 기도”로써 우리에게 이와 같이 신실하며 친절하게 대한 사람들의 우정에 보답해야만 합니다.
하몬드(Hammond)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책망은 의로운 나를 멍들게 하며 나를 꾸짖습니다. 그러나 저 독이 있는 기름은 나의 머리를 상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나의 기도가 저희의 재난 중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난은 누구나 당합니다. 언제 당할는지 모릅니다. 이런 때 우리는 기도합시다. 말을 조심해서 범죄하지 맙시다. 악과 타협하지 말고 낙심하지 맙시다. 의인이 책망할 때 귀에 거슬려도 달게 받아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