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여성언술의 특성
나. 모순적 양면성1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수필계에 세대교체가 일어난 데에는 사랑을 이야기해도 뭔가 달리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는 여성 독자들의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해낸 신달자의 공로가 크다. 물론 이런 세대교체가 일어났다고 해서 사랑과 고독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전반적 주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달자가 김남조와 다른 새로운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신달자의 수필은 김남조의 수필에 비해 템포가 빨라졌다. 문장은 더 화려해 졌지만 축축 늘어지던 김남조의 글에 비해 신달자의 수필은 경쾌하고 가볍다. 김남조와 유안진이 애용하던 '그대여' '당신이여' 운운의 듣기 거북한 돈호법도 자취를 감추었고, 과장된 자기 고통의 몸짓도 꽤 절제하였다. 소재를 다루는 방법도 세련되었다. 울며 한탄하는 청순 가련형에서 담담해지고 세련된 현대 여성으로 변모한 것이다.
신달자의 수필은 소재 자체도 훨씬 '현대적'이다. 특히 여성의 일과 자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사랑의 포로가 되면서 '일과 자아'를 유지하고 싶은 여자들에게 신달자 수필은 그럴듯한 인생 지침서 역할을 한다. 여자가 옛날처럼 남자한테 죽어지내서도 안 되지만 "남성과 한 줄에 서기 위해" "고개를 치켜드는 무모한 남녀평등의 외침"도 옳지 않다는 설명이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한 자리에서 지식을 겨루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꽃과 같이 은은한 향기를 지녀야 한다. 이처럼 병존하기 힘든 두 진술이 갈등 없이 놓이는 것이 신달자의 여성관이다. 여성의 자아를 한껏 주장하다가도 그 목소리가 기존 질서의 담벼락을 넘어서는 순간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자의 덕목으로 되돌아온다. 그녀의 수필은 가부장적 통념의 벽을 두드리는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듯하다가 놀라서 다시 닫아 버린다. 그녀의 수필이 변혁의 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존 질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요인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의식을 그럴듯하게 병존시키는 데 있다.
마지막 아이가 잠들었다. 이제야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책상 앞에 앉는다. 그저 습관대로 그렇게 앉아 있게 된다. 창 밖은 어둠뿐이고 나를 엿보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안다. 자유다. 뜨거운 자유다. 나는 오랫동안을, 하루의 시작에서부터 이 시간을 기다리고 이 시간을 사랑하며 살아왔다.
자주 시계에 눈을 준다. 아직은 멀었군. 창 밖이 밝아오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 또 시계에 눈을 준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새벽이 멀지 않았군. 식구들이 하나씩 깨기 시작하고, 밖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고, 나도 얼굴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가야 할 아침이 오겠군.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간을 재단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배우리라. 그것을 배워서 내가 사랑하는 이 시간을 내 삶의 시간 중에 가장 많이 재단하여 가장 넉넉히 잡아 두리라. (굵게 강조 : 인용자)
- 신달자, 「새벽에 돌아오는 여자」중에서 -
여성시인 신달자의 「새벽에 돌아오는 여자」는 아이를 가진 어머니, 가정을 가진 주부가 갖는 가사일을 의무처럼 받아 들여야 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작가는 가족이 다 잠들면,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자유를 사랑하는 작가의 이중생활을 그린 수필이다. 여성의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작가도 피곤한 일상을 접고 책상에 앉으면 무수하게 쏟아지는 질문에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새벽이 오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족 앞에 나서야 하는 중년 주부의 갈등하는 정신세계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이 길이 아닌데. 아, 이곳이 아닌데'하면서도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자신의 자화상은 가장 초라한 행색으로 추운 거리를 헤매다가 돌아와 앉은 여자다. 가족이 잠든 밤을 이용해 고독을 즐기는 이 아픈 자유를 사랑해야만하는 현실에도 이제는 길들여져 있다. 새벽, 몸부림치는 아이를 안고 눈을 감으며, 내 손은 청결한가하고 묻는 작가의 마음 속엔 우리 사회의 두터운 인습적 가부장제 신화인 모성의 신화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정신의 자유, 잠든 밤의 사색과 고독을 통해서 이루었던 소망, 만났던 사람, 절망마저도 가슴에 죄로 각인되는 우리 시대의 운명적 여성의 삶은 가족을 떨쳐내고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상으로 돌아와 있어야 하는 중년 여인의 내면세계는 눈물겹도록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대는 결혼에 대한 꿈과 실현으로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직접 느끼며 그런 대로 감미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30대는 모성에 눈뜨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이것저것 살림 모으는 재미도 가져 보며 깡그리 가정에 붙잡혀 있다가 40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문득 그 친구는 생각하였다.
"나는 무엇인가?"
남편과 아이들이 모두 대문을 빠져나간 아침 나절 이사온 집 같은 너저분한 집 안을 청소하다가 어쩌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생소해서 어느 새 잔주름이 생기고 마음보다 늙어 있는 자신을 보며 놀라 중얼거리게 된다.
"이것이 아닌데, 정말 이것이 아닌데......"
살아가다가 문득문득 자기를 불러 보는, 자기를 만나고 싶은, 자기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불혹의 나이 40세에는 많은가 보다.
"이제부터 내 인생을 살아야지."
"나도 좀 사람답게 살아야지."
찌든 가정 안에서 곤죽을 치르며 살아가는 주부들이 단호한 결의를 내뱉는 탄식 같은 말이지만, 왜 그들은 모르랴. 바로 '자기'가 그 가정의 안락에서만 진정한 '자기'일 수 있는 오늘의 현실을 수용해야 하는 것을. (굵게 강조 : 인용자)
- 신달자, 「나는 무엇인가」중에서 -
신달자는 여성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면서도 가정의 안락 속에 진정한 자기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내 인생다운 것이 무엇이며 사람다운 생활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지만 어쩐지 직장과 학교에 빼앗긴 남편과 아이들과의 격조한 대화로 순간순간 외로워지는 것을 숨길 수 없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주부를 외롭게 하는 것은 가족들과의 문제나 대화가 아니라 무엇인가 지금보다 더 다른 생활에 대한 향수와 목마름, 더 인간적이고 싶은 갈망 때문일 것으로 진단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누구나 만족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 색다르게 보이는 주부, 문화생활에 익숙한 세련된 모습의 고급한 주부, 혹은 여류 명사,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회의를 앓고 있는 것 같으니, 주부들에게 콧노래라도 부르며 청소를 하면 가뿐하고 밝은 기분이 된다고 쓰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