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합병조약을 체결한 다음날, 황성신문(8.23.)은 '중요문제'라는 애매한 용어로 짧게 기사를 실었다. "총리 이완용과 농상대신 조중응이 통감부를 방문하여 데라우치가 제시한 중요안건을 논의했다"는 내용이다. 8월 24일에는 일본 추밀원에서 천황이 참석한 어전회의를 열었다는 사실과 한국 각의에서 '중요문제'를 논의했다는 경과를 비교적 상세히 실으면서도 '한일병합'이라는 말은 없었다.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이미 6월에 통감부에 매각되어 논조가 이전과 달라져 있던 데다, 그나마 8월 17일 정간처분을 받았다가 9일 뒤인 26일에야 정간이 풀렸으니, 합병문제를 보도할 수 있는 지면이 없는 상황이었다. 긴박한 시국의 움직임을 알릴 수 없도록 일본은 언론에 완전히 재갈을 물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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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는 23일 정치집회를 일절 금지한다는 공고를 내고 세 사람 이상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도록 했다. 8월 초부터는 방학을 맞아 귀국하는 일본 유학생을 조사하거나 체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들에게는 정치적 언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있는 유학생도 엄중하게 단속했다. 국내 학생 가운데도 영어학교와 보성전문 학생을 헌병사령부와 경무총감부에서 체포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일본에서는 '만조보(萬朝報)〈1번 이미지〉'가 8월 27일자 호외로 한국의 주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讓與)한다는 합병사실을 보도했다. 27일 새벽 2시에 서울 주재 특파원이 타전한 기사였다. 국내 한글 신문으로는 '신보'가 8월 28일자에 처음 '합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 국내의 일인 발행 '조선신문'이 같은 날 "일한합병으로 한국문제가 해결된 것은 일본제국 제2의 유신이며, 한국으로 보아서는 제1 유신에 해당한다"면서 기념호 발간을 예고했다. 한 달 후인 9월 27일 조선신문은 무려 28페이지의 대특집 합병기념호를 발행했다. 8월 29일자 도쿄 아사히신문은 호외로 합병조약 8개조를 보도했다. 황성신문도 이날 호외를 발행했으나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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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합병이라는 민족의 치욕적 대사변에 통분함을 나타내는 신문은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합병이 공포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이튿날부터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어 순종의 '조칙(詔勅)'과 '칙유(勅諭)', 일본 천황의 '조서(詔書)'를 실었다. 이어서 한일합병조약 8개 조항과 '조선귀족령'을 1면 전체에 배치했다. '한성신문'(황성신문)은 1면 머리에서 시작하여 거의 전면을 '조선귀족령'으로 채웠다. 피 끓는 논조로 항일투쟁을 격려하던 민족지의 면모는 어느 신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합병을 기념하는 엽서〈2번 이미지〉가 발행되었다. 일왕 메이지와 고종의 사진을 위아래로 배치하여, 한국이 일본에 복속되었음을 암시한 엽서였다.
대한제국은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장엄한 최후를 맞는 모습을 보이지도 못했고, 처절한 비장미(悲壯美)조차 남기지 않은 채 죄 없는 민초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고 허망하게 사라졌다. 의병들은 피 흘려 싸우고, 자결한 우국열사와 망명을 떠난 지사도 줄을 이었으나, 황실과 고관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도 자신들의 안락을 챙길 생각부터 했다.